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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펌 (2005-03-17 19:47:38, Hit : 641, Vote : 3
제목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 / 홍세화


‘민주화된 시대’라고 하지만, 이 사회를 배회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불안’이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각종 경제지표와 달리,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불안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아 존재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국사회가 자랑하는 역동성도 사회 구성원들이 품은 열망과 꿈의 반영이라기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추동하는 것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젊은이들이 취업 준비에 마음을 써야 할 만큼 실업에 대한 불안을 겪어야 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근로 빈곤층으로 내몰리는 불안을 살아야 하는 게 이땅의 구체적 현실이다. 그것은 교육·의료·주택·노후 등 공공성이 실종되고 모두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고령화 사회가 제기되면서 이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은 한 번 실업의 구렁텅이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고, 비정규직이 되면 정규직으로 되돌아올 수 없으며, 근로 빈곤층으로 내몰리면 근로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60% 가량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규정했는데, 오늘날 그 비율은 25%에 지나지 않고 70% 이상이 미래를 어둡게 내다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연대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 참여정부가 미국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야만적인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했다면, 불안에 내몰린 사람들은 인간의 길에 대해 성찰하고 모색할 처지에 놓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 이 사회의 젊은이들은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으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의 탈정치화 성향이 기존 정치를 온존시키는 정치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인식하기엔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소유’에 대한 관심과 모색뿐이다. 그와 같은 의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탓만으로 돌리기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불안은 젊은 구성원들에게 자기 소외의 길을 강요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안보 이데올로기로 사회 구성원들을 통제했다. 국가주의 교육과 도구화된 언론을 통하여 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했지만, 다른 한편, 물리력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서 적잖은 사람들은 실존적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정의와 평등, 연대의식을 모색했다. 지배세력의 안보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력하고 집요해도 성찰적 존재에 관심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까지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안보와 반공 대신 들어선 것이 자본과 시장이다. 그리고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갇혀 공공성과 사회적 권리를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된 시대는 권위주의 정권 시대와 큰 차이가 없다.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성찰하는 존재들을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퇴출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시장경쟁을 합리화한 구호였던 ‘균등한 기회’조차 이미 자본과 시장이 허락하지 않는데,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비판적 의식과 저항은 사라지고 없다. 이런 신자유주의의 자기 완결성이 아예 서민들에겐 그저 로또복권의 허망한 꿈속을 헤매거나 불안 속에서 허우적댈 자유만 남았을 뿐이다.

생산적 복지든 참여 복지든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불안이라는 질병을 치유할 수 없다. 사회 안전망 확충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함께,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근로 빈곤층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없다면 불안이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양산 법을 관철하려고 하면서 그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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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3-1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죄의식이 천오백년동안 사람을 움직였다면,  '불안'은 또 다른 천년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혼'마저 빼내기위해 혈안된 자본은 끊임없는 '불안'의 그늘로 스스로 성장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발버둥은 끊임없이 자신의 쳇바퀴에 자신을 학대시키는 것인지 모르도록 집요한 것 같습니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대로, 중소기업 임원과 사장은 사장대로, 불안 속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으며, 제 속도를 부지런히 높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그때 자신의 이익이 중요할 뿐이지, 어떻게 남생각할 여유가 있겠는지요?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면 그 동안 자신이 몸담던 그늘은 다 남일이 되고, 정규직은 임원이 되면 다 남일이 되고... ...

자본의 시대는 어느 덧, 예측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일터라도, 그 나락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본에게 안락한 고용과 평화로움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이야깁니다. 나락으로 추락하기 않게 하기위해 스스로 몸에 채찍질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기껏해야  마조히즘의 쾌락밖에 남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나 정신이 쉴 곳 마저 없는 현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싶습니다. 하지만 시작할 곳도 거기서부터 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채찍과 당근에 익숙해진 우리의 지친 몸과 영혼에겐 떨어진 바닥에서도 새싹이 돋고 피고,  남생각하는 공간에서, 함께 해보는 일들에서, 취미삼아 해보는 자발적 가난에서 애초 기초없이 시작한 자본의 바벨탑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적인 영역은 시선을 돌리는데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음의 시선.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지역과 사회, 남 생각해보는데서... ... 취미삼아 남 일 해보는데서...... 말로 하지 말고.. 공동의 노동자의식과 공적인 시민의식의 샘물마저 말라버린 척박한 현실에서 그래도 해 봐야 할 것 들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