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면 아프지 않나요

1% 부자의 꿈으로 뜀박질하며 ‘서민 우리’를 짓밟는 ‘서민 나’
아이· 학생· 농민의 죽음이 주는 무력감 마저도 익숙해져 버렸다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치 아래서 부자보다 수적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력을 갖는다고 했다. 그는 소수 부자들이 갖는 부의 힘과 다수 서민이 갖는 정치력이 균형을 이뤄 자유와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듯했다. 그리고 그의 예견은 콜럼버스의 달걀만큼이나 간단한 일인 듯했다. 그러나 달나라가 지구의 식민지가 되어간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자들의 권력은 더욱 집중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1%가 99%에게 던지는 당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서 오류를 범했을까? 달걀을 세우려면 둥근 면을 제거하면 되었다. 현명한 인간은 자유와 평등이 민주적 절차와 선거권에서 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민주적 절차와 선거권을 열망했다. 그러나 그것을 얻은 뒤에도 그런 사회는 오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희생을 감수한 용감한 자들도 무덤에서 편치 않을 이 ‘황당한’ 현실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다수 서민은 그들 전체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모두 그럴듯한 수사로 ‘우리’의 문제를 말한다. 그러나 의식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개인이다. 기껏해야 마름이 되려는 것이지만, ‘서민 나’들은 선망과 경쟁의식으로 ‘서민 우리’를 여지없이 배반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게 형성된다. 동물을 조련하는 것이 당근과 채찍으로 가능한 것처럼. 성적과 등수 올리기 경쟁이 채찍이라면, ‘대한민국 1%’ ‘부자 아빠’에 대한 선망과 성공한 연예인이 거머쥔 부에 대한 동경은 99%의 사람들의 눈에 던져지는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서민이 로또에 명운을 걸듯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모두 ‘자기만’ 당첨되는 꿈을 꾸듯이,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모는 것이 교육과정과 대중매체가 맡은 아주 쉬운 작업이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웃음거리로 만든,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가진 ‘나’들의 신음 소리는 오늘도 사회 면을 장식한다.

사실 우리가 매일 뉴스를 본다는 것은 대단한 절제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거기엔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이 담겨 있다. 나와 다른 ‘나’들이 절망적 순간에 선택한 죽음은 동시대인들인 ‘나’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줘야 하지만, 무력감을 느끼기에도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 죽음에 이르는 선택은 인간성을 상실한 무서운 사회를 향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손짓이다. 그 ‘나’들이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 등장하기까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온갖 뉴스에 등장하는 서민들의 신음소리에 우리는 무감각해져버렸다. 그렇게 '도시의 나'는 '농촌의 나'를 짓밟는다.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국민적 환호는 그것이 창출할 경제적 이익에 대한 환호일 터. 그것이 ‘나’에게 돌아올 몫이 있다고 의식하든 아니든 우리의 반응은 파블로프의 그것이어야 한다. 정부는 막대한 지원을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으로 화답한다. 그동안 진통제로 고통을 지탱하는 수많은 ‘나’들은 인정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송프로에 나가는 기적을 기대해야 한다. 청계천 ‘복원’에 시민들이 환호한다. ‘복원’되기 전의 지저분하고 혼잡스러웠던 청계천의 기억이 더욱 깔끔한 ‘복원’을 빛내게 한다. 거기서 둥지를 틀고 생계를 해결했던 ‘나’들은 며칠에 걸친 화려한 축하행사장에서 돌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 때에만 잠깐 기억된다. 느닷없이 생태주의자가 된 시민들은 말없이 말한다. 철거된 고가와 함께 시야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서울 버스들의 그 황당무계한 색깔들과 번호들에는 무감각한 눈으로 깨끗해서 좋다고 말한다. 외국인들도 놀랄 것이라고 말한다.

농촌의 ‘나’를 죽이는 도시의 ‘나’

오래전 성남으로, 광주로 이주당한 사람들의 처지를 간단히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은 미끈하게 들어선 아파트였다. 낙엽이 구르는 것만 보아도 천진난만하게 웃을 나이에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죽음을 택하지만, 그 죽음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죽을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말은 청계천 ‘복원’을 해내고 만 사람의 강인한 면모를 대변하는 것으로 반사된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되뇌며 3등 인생을 위무한다. 농민이 제 몸에 기름을 붓고, 부모와 조부모가 있는 아이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이 홀로 개에 물려 죽는다. 인분 사건, 총기 난사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한 사병이 또 어이없이 죽는다. 도시에서 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하얀 쌀알에 남아 있을 농약을 걱정하는 중에도 농약을 뒤집어쓴 채 논밭을 일구던 농민들이 여의도에 눕는다. 도시의 ‘나’들은 통상이니 경제적 효용성이니 낯선 단어로 더하고 빼며 타당성을 따지고 합리적 판단을 말한다. 농촌의 ‘나’를 죽음으로 이끈 절망은 도시의 ‘나’들의 무관심이다. 그렇게 농촌은 패배했고, 우리는 모두 근본에서 패배했다.

모든 나들이 ‘나’만의 행운을 위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짓밟으며 살고 있다는 충고는 판도라의 상자에 애당초 희망이 들어 있지 않다는 악담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는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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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11-2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세화님이
매우 슬프신가 봅니다.
글에서 절망이 느껴지는 듯 하여.....

여울 2005-11-2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흡을 가다듬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과 냉혹함은 비열하리만큼 '나'만 재생산하고 있지 않나싶네요. '나'와 '우리'사이의 간극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은 아닌지?  무관심은 의례히  중독으로 치닫고, 재산과 아파트 평수로 일상의 삶이 논의된다는 것(어떻게 벌었냐?왜?다른사람은?)이 얼마나 '우리'속에서 '나'를 발라내려는 것인지? '내정년'만 이야기하는 단체는 '우리의 고용'에 대해 한마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정규직의 정년연장만 현수막으로 걸리고 반이나 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해달라는 문구는 아무데도 보이질 않고?) '내월급'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우리'월급이 과연 얼마인지(내 쥐꼬리 월급에는 분개하지만?), '내살림'살이가 중요하지 '우리살림'살이에 대해 의견조차 교환되지 않는 현실, '나'와 '우리' 사이의 분열증 또는 그 심연의 연결고리는 무엇인지? '내자식'만 생각하지 키우는 '우리 어머니'는 당연한 것?

언제부터 '나'는 '우리'에서 벗어나 이렇게 독립한 듯 제멋대로일까? 도시의 전시상품처럼 그저 전시만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가', '어떻게','왜' 만들어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유통만 덩그러니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유통되는 '나'만을 보기만 할뿐이지? '고민'하는 자체로도 삶이 버겁기때문은 아닐까? 도시는 끼리끼리 모이게 하고, 앞집옆집 모두 같으니 세상이 같은 것이라 위안하고 사는지도 몰라?

'가진 것'은 회자되지 않고 '가질 것'만 유통되는 현실, '가질 것'만 부탄가스처럼 가슴에 안고 사는 불두덩이를 뛰는 '나'   익숙한 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당연한 것은 불문율처럼 '논의'의 자리마저 뺏겨 '터부(금기)'되는 지금

'나' ; 유통기간이 지난 것은 아닐까?  맘에 상처나고 고통스럽고, 버겁겠지만  유통기간이 지나 상하기 전에 '우리'로 소통의 잔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점점 더 영특해지고, 똑똑해지고, 적응력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지지만, 점점 더 미숙해지고, 오만해지고, 잔인해지고, 탐욕스러워지는 '나' ---- 하지만 소통기간은 재충전되지 않는 밧데리처럼 급속히 반비례하는 것은 아닐까?


홍세화님의 미어지는 '가슴'이 보이는 듯합니다.  님의 글로 한번 스스로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