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팝의 고고학 1960 - 탄생과 혁명 한국 팝의 고고학
신현준.최지선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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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 1960


10대의 어느 한 때, 오래된 트로트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현인, 김종구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하염없이 들으며 마음이 좀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땐 몰랐지만 아마도 '자기 연민'이 아니었을까. 
소년 노동자로 살면서 나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공장노동자, 건설노동자로 10대, 1970년대를 보냈고, 그때 라디오에서는 나훈아, 남진, 김추자, 최헌, 송창식, 어니언스, 패티김, 이은하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비록 몇 달이었지만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음악에 몰두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국민학교 다닐 때 동무들과 유행가를 부르며 마을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추억이 있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대중음악은 우리에게 유행가였고, 어린 우리는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많이 불렀다.

이 책은 '한국 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음악과 당시 한국에서 불렸던 음악(민요)이 결합해 '트로트'라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 분야는 지금도 '트롯'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생산하고, 소비한다. '트롯'과 함께 두 줄기 가운데 하나로 '팝'이 있는데,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한국 팝'은 전후, 여기서 '전후'는 1945년이 아니라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를 뜻한다. 미군이 한국에 상주하면서 미국의 대중음악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한국 팝'이 하나의 장르로 탄생한다.
미8군으로 상징하는 미군의 존재는 전쟁을 겪은 한국 민중에게 '나라를 구한 은인'이자, 굶주린 대중에게 곡식(밀가루, 설탕)을 가져다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절대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해방 직후 약 3년의 '미군정' 시기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미군은 한국 정치가를 배제하고, 그들이 직접 한국을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다. 해방 직후 민족주의자인 여운형 등을 배제하고 이승만과 친일파 계열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도 바로 미군이 정치적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해방 직후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했으며, 한국을 3년 동안 '미군정' 체제로 다스렸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해 '작은 3차대전'을 한반도에서 치른다.
이승만은 미군(맥아더 장군)에게 '전시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 역량이 형편 없다는 걸 인정하고, 외국군인 미군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전시작전지휘권'은 한국이 세계 6위의 전투 능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음에도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주권 국가에서 '전시작전지휘권'을 외국에 넘겨준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만큼 한국에서 미군의 존재 의미는 여전히 특별하다.

전후 가난이 극심하던 때,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이 그나마 무대에 설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미8군으로 대표하는 미군부대의 무대였다. 미군은 세계 곳곳에 있는 미군을 위해 본토에서 순회공연팀을 만들어 공연을 하러 다녔는데, 냇 킹 콜, 조니 마티스, 진 러셀, 마릴린 먼로 같은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이 한국의 미군부대에서 공연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직접 연예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공연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미군은 한국의 대중음악인을 훈련시켜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미군은 까다로운 심사(오디션)을 통과한 한국 대중음악인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들은 피나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미군들이 환호할 정도의 기량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 대부분 미군 무대에서 활약한 사람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미군의 엄격한 오디션을 통과해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고, 미군부대의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은 자신의 창작 능력보다는 미군이 요구하는 미국의 음악, 미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해야 했다. 즉, 한국 팝은 정확히 미군의 요구로 한국에 이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부대의 무대는 특별했으며, 한국의 방송(라디오, 텔레비전) 무대는 '일반 무대'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있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가수, 연주자들은 전국에 있는 극장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극장은 대중이 가장 쉽고,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고, 영화는 기본이 두 편으로 '동시상영'이었다.
가수와 연주자들은 영화 한 편이 끝나는 막간에 공연했으며, 이런 방식의 공연이 나중에 가수의 독자 공연으로 발전해 '리사이틀'이 되었다. '하춘화 리사이틀', '남진 리사이틀', '나훈아 리사이틀' 같은 제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극장에서 공연했던 걸 어릴 때 극장의 간판으로 본 기억이 있다.

1960년대 한국에서 그룹, 중창단이 활발하게 탄생한 것도 미군 또는 미국의 대중음악 영향을 직접 받은 결과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1960년대 그룹이 많이 생겼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에벌리 브라더스를 비롯해 드리프터스, 문글로스, 플래터스, 브라더스 포, 사이먼앤카펑클, 더 벤처스, 비지스, 비틀즈가 50년대, 템테이션, 포시즌스, 비치보이스, 도어스, 마마스앤파파스, 스콜피언스, 잭슨스, 핑크 플로이드, CCR, 애니멀스 같은 밴드들이 60년대 초중반에 결성한다.
한국에서는 신중현의 '에드 훠'를 시작으로 '김시스터즈', 블루 벨스, 봉봉 사중창단, 자니 브라더스, 아리랑 브라더스, 멜로톤 트리오, 키보이스 등이 줄지어 나타났다. 이런 그룹 활동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70년대로 오면서 듀엣이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등장한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한국은 독재 정권 체제에서 수출중심의 산업으로 재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1961년, KBS를 시작으로 1962년 MBC, 1964년 TBS 같은 민간 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의 영향은 급격히 커졌다.
대중음악이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전국의 극장을 돌며 공연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스타'가 되는 시기였다. 방송국은 컨텐츠가 많이 필요하던 때였고, 특히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의 쓰임이 폭발하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면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트롯과 함께 블루스, 팝, 록 같은 다양한 음악이 대중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독재 정권에서 나름 다양한 음악이 등장한다.
이 시기는 대중음악의 다양함과 폭발적 확산과 함께 독재 정권이 블랙리스트, 금지곡 지정으로 대중음악과 문화를 통제하고 억압했다. 대중가수를 통제하는 방식은 마약(대마초)과 가사 검열이었다. 독재 정권은 어리석은 짓이 분명한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휘두르며 대중예술을 통제, 억압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박정희가 살해당하는 걸로 끝났다.

60년대는 대중음악 빅뱅의 시기였다. 2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민요와 혼종으로 시작한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칭으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뽕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롯'은 한때 팝송, 한국 팝, 록에 밀려 입지가 좁았으나 지금은 전성기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반면 50년대 시작한 한국 팝은 청년 문화와 결합하면서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때 한국 팝은 일본과 미국에서 유행하거나 발표된 노래를 '번안곡'이라는 이름으로 저작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라 '표절'을 해도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였다.
'번안곡'으로 표절을 정당화하면서 나온 노래들이 방송에 나오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대중이 소비하는데, 60년대 말이 되면 한국 팝에서 창작 음악이 나타난다. 신중현은 일찌감치 한국 록의 창작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고, 미국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은 한대수가 한국에서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개척했다.
 
한국 팝은 미군의 요구로 이식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스스로 자생,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음악가들은 외국 음악을 받아들여 한국사람의 정서를 불어 넣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번안곡'이라는 표절도 있었으나 이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고, 창작 과정과 예술의 발달에 있어 필연의 과정이기도 하다.
60년대는 현대 한국 대중음악이 탄생하고 혼돈의 시기를 보낸 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음악, 우리 고유의 민요, 미국에서 이식된 다양한 장르(팝, 록, 블루스, 로큰롤, 재즈 등)의 음악이 뒤섞였고, 독재 권력의 검열과 청년의 저항문화가 대립하면서 대중음악은 독특하게 발전한다.

이 책은 대중음악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것도 '한국 팝'이라는 장르의 역사와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고, 예술가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를 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한국의 대중예술가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창작과 예술을 위해 노력했고, 60년대의 활동을 밑거름으로 이후 대중예술은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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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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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렌커의 이 장편소설은 중국 공산당이 판매금지했다. 몇 가지 이유로 판매금지했는데,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를 한 걸로 본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 위에 있는 존재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진데, '공산당'이 먼저 생기고, 공산당이 국가 조직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의 공산당은 또한 군부와 뗄 수 없는 샴쌍동이 같은 존재다. 공산당이 곧 군부이고, 군부가 곧 공산당이다. 1924년, 중국공산당을 결성하고,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이들은 곧바로 내전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는데, 공산당과 당의 군사조직을 지휘하는 간부는 거의 모두 같은 인물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의 이념과 사상에 가장 투철하며, 당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용맹함과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했고,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하는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 공산당(의 지도부)이 보기에, 이 소설은 중국의 위대한 공산당의 존재와 역사와 역할을 폄훼하고 있으며,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을 모욕하고, 중국 붉은 군대의 명성에 먹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이 소설을 판매금지한 건 당연하다고 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중국공산당의 현재 모습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중국은 공산당 독재 사회이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채택한 기형적 국가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주창한 이후,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한다고 선언했고, 이후 실제 중국 인민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중국 전체의 부는 커졌지만,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계층은 공산당원 특히 고위 공산당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권력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했으며, 직접 자본가가 되거나, 자본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 부를 축적했다.
공산당원과 비당원, 대도시 거주민과 시골 농민의 삶은 극단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크게 벌어졌고, 중국공산당은 가난한 농민과 인민을 착취해 배를 불린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의 당번병이다. 그는 사단장과 그의 가족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텃밭을 가꾼다. 그는 이 보직을 얻으려 온몸을 내던져 사단장의 어린 아들과 놀아주었고, 여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당번병이 되었다.
그는 모범병사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식도 잘 하는 병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붉은 군대의 인재였다. 그가 이렇게 훌륭한 모범병사가 될 수 있었던건 그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그가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굳게 약속했고, 장인어른에게 혈서까지 썼기 때문이다.
시골 무지랭이였던(중학교는 졸업했다) 우다왕은 이웃마을의 말단 관리 자오의 배려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산골 출신이 군에 입대한다는 건 대단한 출세였다. 고향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하루 세 끼의 식사에는 반드시 고기가 들어 있고, 군복은 깨끗했으며, 사상학습을 통해 폭넓은 지식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우다왕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다. 공산당에 입당해 당원이 되는 것, 군대에서 공을 세워 진급해 군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장인어른인 자오와 약속한 내용으로 혈서까지 썼으며, 그의 아내에게도 맹세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는 매우 어렵고, 우다왕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사단장 부인 류롄이 유혹하는 걸 뿌리칠 정도로 윤리, 도덕으로 무장한 인물이지만 '욕망' 앞에서 무너진다.

우다왕의 아내
자오어즈는 시골의 봉건적 분위기에서 자란 여성이다. 공산주의 사회라곤 해도 중국의 시골은 여전히 봉건의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인민은 마을 촌장과 당 간부의 지도에 따라 관습적으로 살아간다. 자오어즈는 아버지(자오)의 명령으로 우다왕과 결혼한다. 우다왕은 간경화로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급하게 자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사랑의 감정이 있을리 없고, 일종의 정략 결혼이어서 우다왕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류롄과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원인이 되는데, 자오어즈의 존재는 중국 농촌 여성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자오어즈는 신혼 첫날 밤, 우다왕에게 세 가지 약속을 지키라고 맹세하도록 한다. 첫 휴가 때 군복을 가져올 것, 매년 부대에서 공을 세울 것, 승진할 것이 그 내용이다. 이때 자오어즈의 태도는 개인의 삶을 공동체(집단)와 동일하게 여기는 인식을 보인다. 즉, 결혼과 부부라는 지극히 개인의 삶을 사회의 기준으로 치환해 객관화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자오어즈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사회주의 학습의 결과이며, 공산당은 개인의 삶을 계량화, 수치화, 통계화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 당원, 승진, 간부 - 결과에 집착하도록 교육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경쟁을 통해 물질과 부를 축적하는 행위와 비슷하며, 공산주의 사회는 개인의 희생, 집단 속의 개인, 개인의 영웅화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 인간을 만든다.

류렌
사단장의 아내로, 간호부대에서 근무하던 군인이었다. 사단장이 류렌을 보고 '찍었다'고 했으나, 류렌이 사단장을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사단장이 청혼했어도 정말 싫었다면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장은 류렌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사람으로, 훌륭한 군인이고, 지휘관인 건 분명하다.
류렌은 사단장에게는 두번째 부인이다. 사단장의 첫번째 부인과는 이혼했는데, 이 소설을 다 읽으면 독자가 사단장의 이혼에 관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류렌은 서른 살 초반의 여성으로, 사단장의 아내로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 당번병 우다왕을 적극 유혹한다. 류렌의 알몸을 보고서도 유혹을 뿌리친 우다왕에게 당번병을 바꾸겠다고 협박한 건 류렌의 진심이었는지, 단지 공갈이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류렌은 우다왕이 당번병으로 사택에 들어와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름 깊은 인상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만약 사단장 당번병으로 키 작고 외모도 형편 없는 병사가 들어왔다면 류렌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유혹했을까. 류렌의 입장에서 외모는 유혹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연이지만 우다왕의 외모는 류렌의 기준에 합격했고, 여기에 우다왕의 개인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류렌의 의지가 관철된다.

사단장
1세대 공산당원으로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진정한 투사다. 철저한 군인이지만 '개인'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사단장은 작품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해도 의미 있는 역할이 아니다. 그는 특수한 임무를 띄고 두 달 동안 출장을 떠나는데, 우다왕과 류렌은 이 기간 동안 아담과 이브가 된다.
작품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사단장이 사택을 비우면서 젊은 아내와 당번병 둘만 남는다는 걸 모를 리 없고, 신경 쓰지 않았을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단장은 가장 믿는 부하에게 사택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수 있고, 아내 류렌과 우다왕이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류렌이 우다왕을 유혹하는게 사단장과 류렌의 합의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사단장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유도, 첫 부인이 당번병과 불륜 관계였음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첫 부인이 임신을 하는 것으로 당번병과의 불륜을 허락했지만, 부인이 임신하지 않았거나, 못했기에 그 책임을 지고 이혼한 건 아닐까. 사단장은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류렌이 우다왕에게 하는 건, 다시 두 가지 숨은 이유가 있다. 사단장이 성적으로 류렌을 만족시키지 못해 류렌은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불만과 함께 임신을 할 수 없어 아이를 낳지 못해, '엄마'가 될 수 없는 비극을 예상할 수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소설의 제목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모택동의 감동적 연설의 제목이다.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역사적 소명이자 당의 명령이라는 내용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해방전쟁' 과정에서 물(인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물고기(공산당)를 비유하며, 인민 속으로 들어가 철저하게 인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단장 사택의 식탁에 놓여 있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패는 소설에서 몇 가지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우다왕은 군에서 배운 신념대로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 여기서 인민은 인민해방군이 보위해야 하는 중국 인민이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며, 사단장의 부인인 류렌이다.
우다왕은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 자오어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죄책감을 갖는다. 반면 불륜인 류렌에게는 그가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이 서로 다른 대상에게 서로 다른-윤리적으로 옳지 않은-감정을 느끼면서 스스로 혼란하다.
우다왕과 류렌의 관계 시작은 전형적인 계급 관계로 시작한다. 사단장 부인이라는 강력한 권력자 류렌은 사택 당번병 우다왕을 유혹할 때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우다왕이 거절하자 그를 쫓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다왕이 굴복하도록 만든다.
이 권력 관계는 우다왕과 류렌이 육체 관계를 통해 계급이라는 사회적 권위를 내려놓으면서 점차 평등해지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짧은 관계가 끝나면 다시는 누나-동생 또는 애인이 될 수 없는 사이로, 계급 질서가 복원되는 게 두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류렌은 우다왕보다 네 살이 많아서, 사단장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여성으로, 우다왕을 어리게 생각한다. 류렌이 먼저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고, 우다왕은 '사모님'에서 '누님'으로 호칭을 바꾸는데, 이건 류렌과의 관계가 사회적 계급관계에서 개인적 관계로 전이하는 걸 의미한다.

사단장이 집을 비운 두 달 동안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류렌은 새로운 자극을 받으려는 행동으로 모택동의 부조, 글씨, 사진 등을 모두 파괴한다. 우다왕도 이 행위에 동참하며 스스로 반혁명분자라고, 총살당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두 사람은 사택의 출입문을 모두 안으로 걸어잠그고, 격렬한 애정 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택동의 이미지를 훼손하는데, 이건 개인의 욕망이 공산주의 이념보다 앞서고, 중요하다는 걸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다. 이렇게 권위와 권력의 상징인 모택동의 이미지를 훼손하면서 두 사람은 정욕이 더 강해지는 걸 느끼고 격렬한 정사를 벌인다.
이 소설에서 '섹스'는 명백히 중국의 권위와 통제에 반발하는 상징의 행위다.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 행위이며 국가나 공산당에서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우다왕과 류렌은 각자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이며, 중국공산당의 자부심인 인민해방군으로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기혼자이자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최고의 병사인 우다왕과 류렌은 중국공산당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고 '개인의 욕망'을 충족한다.

사단장이 돌아오기 전, 류렌은 자기가 임신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우다왕에게 집으로 휴가를 가라고 명령한다. 이제 다시 계급 관계가 복원되면서 우다왕은 '유사 사단장'의 지위에서 당번병의 위치로 돌아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는다.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만나도 크게 기쁘지 않고, 아내와 몸을 섞지도 않으며, 오로지 류렌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과, 다시는 류렌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다왕은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에 시달린다.
반면 류렌은 우다왕에게 약속한대로 우다왕이 도시의 큰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할 수 있도록 처리했으며, 우다왕의 아내가 그렇게 바란대로 도시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류렌은 임신했고, 그 아이가 우다왕의 아이라는 건 오직 류렌 자신만 알 뿐이다. 우다왕도 류렌의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짐작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그는 류렌에게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말을 묻지 않는다.

사단장은 인민해방군의 효율적 편재를 위해 스스로 자기 사단을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예하 부대들이 해체되거나 다른 부대로 편입하고, 많은 군인들이 군을 떠나 민간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다왕도 전역하고 도시의 큰 공장 공장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류렌이 약속을 지킨건 우다왕에게 커다란 선물이었다.
이야기는 15년이 지난 뒤에 우다왕이 류렌을 만나려 시도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두 사람은 결국 만나지 못한다. 아니, 류렌이 우다왕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우다왕은 사택 근처에서 놀고 있는 열다섯 살 남짓한 사내아이를 오래 지켜보는데, 그 아이가 류렌의 아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중국의 현대가 개인의 욕망을 '공산주의'의 틀로 가두고 있다는 걸 비판, 풍자한 이 소설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욕망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만의 공간(사택)에서 사회에 반역한다는 내용으로 중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의 욕망은 순수하지만,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 사회적 위치, 사회의 기준으로 구분되는 신분의 격차, 이념이 짓누르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권력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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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1970 - 절정과 분화 한국 팝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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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 1970

1970년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다. 기억은 파편으로 남았고, 나는 그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는 열 살이었고, 마포의 기찻길 아래, 루핑을 얹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고,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읽다가 한글을 깨쳤다.
집앞으로 문안(사대문 안쪽)에서 흘러나온 개천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하나였다. 우리집에는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은 금성 라디오가 유일한 가전제품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연속극이 나오고, '전설따라 삼천리'가 나왔다.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꼬마들은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유행가'를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았고, 남진의 '님과 함께'를 신나게 불렀다.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들, 신중현의 '미인',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봄비', '거짓말이야'를 뜻도 모르고 불렀다.
197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나는 꼬마였고, 정치를 몰랐지만 아버지에게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대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냐'라고 하셨고, 1979년,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나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일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라고 썼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없는 한국음악의 팝 계열 음악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했다. '가왕' 조용필이 1971년 처음으로 '가수왕' 상을 받은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70년대 최고의 대중잡지였던 '썬데이서울'이 주최한 '썬데이서울컵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은 최이철,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해 출전했고, '가수왕' 상을 받는다.
70년대는 듀엣, 트리오 같은 그룹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의 노래가 유행했다. 키보이스, 키브러더스, 히식스, 영사운드, 템페스트, 사월과 오월, 어니언스 같은 그룹의 노래는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마을에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오후5시에 시작하는 방송 시간에 맞춰 입장료 10원을 받고 꼬마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엄마를 졸라 10원을 받아 텔레비전을 보러 달려갔다. 일본 만화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뱀, 베라, 베로', '타이거 마스크', '밀림의 왕자 레오'를 봤고, 동네 누나들은 남진과 나훈아의 팬으로 갈려 서로 '우리 오빠'가 최고라고 부르짖었다. 남진 오빠에게 시집가겠다는 누나가 수십 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를 금지했고, 긴 머리를 길거리에서 함부로 가위로 잘랐으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재고, 경찰서로 끌고가 창피를 주었다. 청년들이 팝송을 부르고, 통기타를 치고, 한데 모여 음악 듣는 걸 두려워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천리마운동'을 시작하자 남쪽에서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으로 따라했다. 시골의 초가집을 벗겨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덮었고, 마을 길을 넓히고,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마을 주민을 감시하도록 했다. 언론은 숨죽였고, 텔레비전에는 오락과 코미디만 넘쳤다.

1974년 여름, 한여름 폭우가 개울을 넘고, 집으로 물이 넘실대면서 우리 가족은 한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철둑으로 도망했다. 날이 밝고, 철둑길에서 바라본 동네는 온통 물바다였다. 지붕만 남은 우리집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고, 머지 않아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속절 없이 헐렸다.
우리 가족은 서울의 변두리 산동네, 큰누나가 살고 있는 산비탈 단칸방에서 월세를 살았다. 나는 소년노동자가 되었고, 더 이상 유행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다. 공장 몇 곳과 식당을 전전하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가다꾼'이 되어 지방 공사장을 떠돌았다. 그때 이정선의 '섬소년'을 들었고,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외웠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와 카세트 라디오에서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사월과오월의 '등불', 어니언스의 '편지', '저별과 달을', 영사운드의 '등불'을 들었다. 

대중은 알 수 없는, 가요계 인맥과 가수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특히 팝을 중심으로 청년 가수들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어 70년대 청년문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의 팝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고, 가수들도 미군부대에서 노래하길 바랐다. 미군부대에서 이름을 얻은 가수와 밴드, 그룹이 방송과 연예계로 진출하는 수순이 자연스러웠다.
라디오 방송에서 팝송이나 대중가요를 내보내고, 진행자가 DJ(디스크자키)로 인기 연예인이 되고, 방송국으로 엽서와 편지가 무더기로 보내지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 영화계에서는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라는 특이한 장르가 등장했다. 독재정권이 체제에 부정적인 문화를 거세하고, 대중을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벗기는 영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5년이 되면서 신중현 '미인', 김정호 '하얀 나비', 김세환 '사랑하는 마음', 둘다섯 '긴머리 소녀', 윤항기 '이거야 정말', 송창식 '왜 불러', 윤형주 '어제 내린 비', 검은 나비 '당신은 몰라' 같은 노래들이 히트곡이었다. 
나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이런 노래들은 들었지만, 흥겹게 따라 부르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다. 가난과 노동으로 삶은 피곤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달에 하루나 이틀을 겨우 쉴 수 있었고, 거의 매일 잔업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 조치'를 발표하고, 많은 연예인들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화면에서, 방송에서 사라졌다. 내 삶 뿐아니라 사회 전체가 암울하고 답답하던 시기였다. '금지곡'이 늘어나고, 가수, 연예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가요와 영화는 정부기관의 심의를 받아야 했고, 창작의 자율과 상상력은 억압당했다.

1976년 2월, 나는 매형을 따라 건설노동자가 되었다. '노가다'라고 업신여기는 직업이었지만, 공장보다 임금이 많았고, 공장처럼 한 자리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반복작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자율성이 있어서 할만 했다.
송대관의 '해뜰 날'이 방송과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 인생에서도 '쨍 하고 해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최헌의 '오동잎'이 거리를 휩쓸 때, 나는 경남 울주의 새로운 공단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저 아래, 부산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서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977년, 1978년에도 나는 지방을 전전하며 '노가다'를 뛰었다. 경남 울주, 마산, 창원, 전남 광주, 충청 신탄진, 강원 속초의 건설 현장에서 때로는 하숙집에서 편하게 잠자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일하다, 때로는 현장의 허름한 숙소에서 잠자고 현장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먹으며 일했다.
세상은 내게 따뜻하지도, 호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가수들은 명멸했고, 그룹사운드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카세트 녹음기가 첨단 기기로 나타났고, '공테이프'를 사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했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
이 무렵 처음 '대학가요제'가 열렸고, 대학생 그룹과 개인의 신선한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성 가수들의 노래에 싫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대학생의 음악에 환호를 보냈다. 샌드페블스 '나 어떡해' 블랙테트라 '구름과 나' 활주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음악들은 청년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리고 '산울림'이 등장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놀라운 그룹이 등장했다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산울림'의 신선한 충격은 오래 이어졌다. 

1979년, 나는 지방에서 올라와 독서회 활동을 시작했고,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며 삼중당 문고를 열심히 읽었다. 이때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같은 여성 가수들이 도드라졌다.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끊이지 않고 나왔다. 활주로, 블랙테트라, 샌드페블스, 휘버스, 작은 거인, 장남들, 벗님들, 블루드래곤 같은 그룹사운드의 음악은 한국 팝 음악의 70년대 열매이자, 80년대를 여는 서곡이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독재가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 책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가수, 연주자들, 음악 제작자, 프로듀서, 작곡가 등의 인터뷰가 많이 실려 있어서 음악의 흐름과 가수를 비롯한 음악 관련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고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양하고 긴밀한 인간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가를 잘 알 수 있고, 가수, 작곡가, 연주자들이 선의를 가진 협업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신기하고 흐믓하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이던 시대, 아날로그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포크와 팝 음악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싱싱하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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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끝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앤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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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끝

옌롄커의 초기 작품. 중국문학에서 '신사실주의'를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고, 이 작품으로 옌롄커는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몰리는 탄압을 받았는데, 다행히 외국의 언론이 그를 살렸다. 중국정부는 옌롄커의 작품을 불온하다고 판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 소설은 단순하고 무겁지 않다. 현대 중국의 현실 가운데서 중국해방군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그것이 '불온'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정부가 이 소설을 '불온' 딱지를 붙일 작정이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바라보는 중국정부의 관료들이 매우 편협하고, 스스로 잘못을 감추려는 불안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두었다면 이렇게 크게 난리가 나지 않았을텐데, 불구덩이를 함부로 쑤셔서 사건을 크게 만든 건 중국정부였다. 그래서 옌롄커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고, 그가 중국정부로부터 탄압당하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세계문학계에서 옌롄커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되었다.

소설의 서사는 단순하다. 인민해방군 중대장 자오린과 정치지도원 가오바오신이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전우이며, 오랜동안 함께 복무한 처지라 서로를 형제처럼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은 승진에 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중국해방군은 심각한 전쟁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고 있으며, 날마다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의 삶에 심각한 고비가 닥친 건 총기보관소에 있던 자동소총 한 정이 사라진 이후였고, 두 사람이 총기를 찾으려 곳곳을 수색하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이 사건으로 문책을 당하게 될 경우를 예상하는 두 사람은 미묘한 신경전을 펼친다.
그러다 3중대 신임 병사 '샤를뤄'가 사라진 총기로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린 병사 '샤를뤄'의 자살을 둘러싼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상부에서는 병사 자살사건을 두고 중대장 자오린과 정치지도원 가오바오신을 문책하기로 결정한다.
자살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일주일 가까이 감금당해 한 방에서 생활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걸 느낀다.

'샤를뤄'의 자살 이후 오히려 상부에서는 두 사람을 심하게 문책하지 않고, 한 계급 강등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두 사람 모두 군대에 남게 되었으며, 벌점은 받았지만 더 노력해서 다시 진급하면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이 소설이 중국 현대문학에서 '신사실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서사의 사실성에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중국 현대문학 작품에서 이만큼의 '리얼리티'도 확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지만, 서사가 내재한 담론의 폭은 상당히 넓다. 군부 내부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한 것은 분명 충격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확률의 범위에 있다. 다만, 여기서 '샤를뤄'가 자살한 이유는 끝내 밝히지 못한다. 그의 부모도 아들 '샤를뤄'가 사회성이 부족해 보인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살할 이유일 수는 없다.
중국 군대에서는 물리적 폭력, 따돌림 같은 건 생각하기 어려운데, 이는 인민해방군이 일본군이나 한국군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제국주의 군대와는 다른,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중국 국가를 이루는 양대 산맥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공산당'의 지도와 '인민해방군'의 역할은 최우선 가치를 지닌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오히려 군대 내부의 문제보다는 자오린이 끝내 버리지 못하는 '농민' 출신의 비애와 원한이다. 자오린은 가난한 시골마을의 농민으로 살다 어렵게 인민해방군에 입대한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농촌에서 유일한 탈출은 군인이 되는 것인데,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경쟁자들은 군대에 추천할 권한을 가진 촌장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 
자오린도 촌장이 새집을 짓는 곳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주었고, 그의 친구가 경쟁을 포기하면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친구는 사고로 죽고, 친구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중대장이 된 이후 자오린은 휴가 다녀온 병사들이 가져온 작은 선물을 받는데, 그것이 뇌물은 아니지만, 병사들이 무언가를 가져다 바쳐야 한다는 중국 군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최저 생활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배급제도 1993년 이후부터 사라지고 중국 인민은 정부의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공산주의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인민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자오린이 아내와 딸들을 어떻게든 영내로 불러들이려 한 것도 농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와 '농민공'이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도시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라도 하지만, 시골에서는 안정적 수입이 없고, 빈민을 구제할 지방정부도 없으니 생존 문제가 심각하다.

옌롄커는 군대 내부의 문제를 꺼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농민의 가난한 삶과 그걸 방치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무능 또는 무관심을 비판하고 있다. 자오린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 가오바오신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군대를 떠나는 상황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단지 명예 때문이 아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문제가 동지와의 오랜 우정도 포기할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자오린은 상상하지 못한 인연을 만나는데, 그의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상점의 회계 왕후이를 만나게 된 사건이다. 자오린은 마흔이 넘은 사내인데, 양귀비, 서시보다 더 아름다운 왕후이가 자오린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결혼해서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자오린은 왕후이의 접근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과 열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인민해방군 장교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다는 설정은 중국 현실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자오린은 끝내 자기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왕후이와의 만남은 열린 결말로 두지만, 중국 인민의 결혼과 연애, 이혼 같은 사생활이 중국 정부의 경직된 태도를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옌롄커의 작품이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인민들의 구체적, 보편적 삶의 태도와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중국 인민의 비극성과 낙관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샤를뤄'의 죽음 이전과 이후에 보여주는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의 태도는 공산주의 사회 중국에서 개인이 가진 욕망의 표현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인민이 보여주어야 하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총 도난 사건 이후와 '샤를뤄'의 자살 사건 이후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은 상대를 비난하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를 보인다. 전쟁터에서 서로의 목숨을 살려줄 정도로 진한 전우애를 가진 이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이익에 연연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태도는 그들이 공산주의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라 해도 개인의 욕망과 이익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라는 걸 말한다.
하지만 '샤를뤄' 자살 사건의 진상조사가 끝나고,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에 대해 한 계급 강등 정도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상대방의 처지를 옹호하고, 군대를 떠난다면 '내가 떠나겠다'고 말하면서, 동지를 위해 기꺼이 자기 미래를 양보하겠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동안 중국사회는 '이상적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만들었고, 개인의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 이중성과 모순을 내재한 인간형을 무시하거나 부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옌롄커의 작품이 중국정부의 탄압을 받게 된 것도 중국정부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직된 정책과 '좌파적 환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중국의 현실을 지나치지 않게 있는 그대로 반영한 점과 개인의 나약함, 이중성을 하나의 돌연한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소설 제목이 '샤를뤄'이고, 작품에서 신입 병사 '샤를뤄'가 자살하는 건 중의적이다. '그해 여름의 끝'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여름해가 질 때'가 조금 더 느낌이 가까운데, 작품에서 '샤를뤄'가 남긴 긴 편지 내용이 바로 이 장면을 말한다. '샤를뤄'는 자살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보내는데, 그가 묘사한 풍경은 누구도 본 적 없는 몽환적 분위기다. 부대 근처에 강이 없는데, '샤를뤄'는 붉게 타오르는 강을 묘사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이 징계를 당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군대에 남아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해지는 거리를 걸어 도달한 곳에서 본 풍경이 바로 '샤를뤄'가 편지에 쓴 그 풍경이 보이는 장소였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이 편지 내용과 똑같아서 충격을 받는다.
'샤를뤄'가 자살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풍경, 중국의 거대한 대륙의 장엄하면서도 몽환적인 석양의 압도하는 자연의 힘과 경이로움이 '샤를뤄'를 죽음으로 이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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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 - 존 배로가 들려주는 우주 탄생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8
존 배로 지음, 이은아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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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짧은 시간 살다 죽지만, 그 시간이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이 들어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현대 자연과학은 우주의 기원부터 인류의 진화까지 이론과 실험을 통해 많은 부분 밝혔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류가 존재한 이후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선진국'에 속한 나라에서, 배 곯지 않고 사는 걸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구 인구의 50억 명은 지금도 가난과 굶주림,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며, 전쟁과 자연 재해로 고통받는 삶을 산다.
풍요로운 나라에 살아도 무지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많다. 인간이 만든 '신'을 믿으며, 어리석고 멍청하게 사는 사람도 많고,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며 넓고 깊은 세상을 모른 채 사는 사람도 많다.
'개인'은 사회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환경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다. 이런 한계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런 감정을 느꼈다.

다른 모든 학문은 인간의 실제 삶에 필요하거나 영향을 주고 받지만, 자연과학은 지금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 없는 경우가 많다. 수학의 순수한 이론적 성취를 예로 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리만 가설', 푸앵카레 추측', '골드바흐 추측' 같은 이론은 한평생 살면서 전혀 몰라도 되는 지식이다.
특히 이 책처럼 우주를 다룬 지식은 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내용이며, 모른다고 창피할 것도 없다. 우주, 별의 탄생과 죽음, 태양계, 원자, 양자 같은 이론과 지식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읽기에 어렵다. 자연과학은 기본이 어렵다. 이 분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이고 영역이다.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피보나치, 오일러, 갈루아, 가우스, 칸토어, 페렐만, 힐베르트, 리만, 와일스 같은 수학자,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닐스 보어, 프랑크, 패러데이, 뉴튼,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슈레딩거, 페르미, 케플러, 파인만 같은 물리학자 그리고 자연과학 각 분야마다 존재하는 무수한 천재들은 인류의 0.0001%도 안 되는 매우 뛰어난 존재들이며, 인류의 빛과 희망이다.
우리는 이들 천재가 만든 길을 따라가며, 그들이 만든 세계를 보고 놀라고 감탄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들이 만든 세계가 우리의 생활을 놀랍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만든 세계는 우리 삶과 생활에 직접 이해관계가 없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이성 활동'의 놀라움과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역이다.

자연과학을 공부한 학자, 전문가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을 위해 최대한 쉽게 쓴 자연과학 개론, 기초 입문서를 많이 출판하고 있다. 내가 자연과학 책을 읽기 시작한 건 2000년 초반부터인데, 이 시기가 한국출판계에서 자연과학 책을 본격 출간하던 때라고 알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 주류였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출판의 흐름에도 변화가 온 것이다.
가장 먼저 자연과학의 선두에 서서 대중을 이끈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이 책은 1980년대 초반에 출간했으니 이제 40년이 된 고전이지만, 여전히 잘 팔리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리처드 도킨스의 (한글로 번역한) 다른 책들을 다 읽고, 진화와 관련한 다른 책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와 관련한 책들을 꾸준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다 어려웠지만, 어려워도 꾸준히 읽으니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고, 여전히 모르는 내용이라도 읽으려 노력한다.

이 책은 우주의 시작과 진화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주가 138억년 전에 빅뱅으로 탄생했다는 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에 우주로 올라간 제임스 웹 천체망원경으로 관찰하게 되면 또 어떤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을지 몹시 기대하는데, 지금의 과학으로도 빅뱅 이후 10의 -35초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추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더 놀라운건, 10의 -35초에서 -33초 사이에 가속팽창을 한 것까지 밝혔는데, 우리의 상상으로는 10의 -35초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순간인데, 이걸 현대 인류의 과학이 포착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빛이 도달한 거리까지여서, 138억년의 시간이라고 알 뿐, 그보다 멀리 있는 우주는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우주가 여러 개인지, 닫혀 있는지, 몇 개의 차원인지 아직 모르는 것이 매우 많지만, 인류는 멸종하는 순간까지 우주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옛날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채널 사이에서 지직거리며 화면이 물결처럼 흔들리면서 잡음이 들리는데, 그게 바로 '우주복사'의 흔적이고, 138억년의 파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주와 아무 관련도 없지 않다는 걸 깨닫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우주에서 온 것이며, 우리가 죽어 육체가 사라지면 모두 원자가 되어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는 이 '과학적' 사고방식이야 말로 어떤 '종교'나 '신'보다도 더 아름답고 신비하지 않은가.
우주를 공부하는 건 '순수한 기쁨'을 얻는 지식이자,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는 동기가 된다. 우리는 저 우주 속에서 '창백한 점'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날뛰어도 우주에서는 티끌보다 작은 존재로 살다, 바다의 파도 위에 잠깐 떠오른 물방울처럼 이내 사라지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를 생각하는 건, 내가 '인간'으로 진화한 동물의 후손이고, 말과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깨달으면서, 더 없이 고맙고 행복하게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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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ls78 2023-02-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