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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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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만 대강 읽고 덮어놓은 『다정한 편견』을 다시 들춰보게 된 건 지인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읽은 칼럼 한 편 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손홍규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이었다. 지인은 칼럼을 소개하면서 '세상에 작가가 필요한 이유'라는 제목을 달았다. 칼럼을 다 읽고 나면 그 이유는 저절로 깨닫게 된다.

 


기억이 우리를 본다

(경향신문 2014-10-20)

 

슬픔과 고통으로 한 번 구겨진 사람은 제아무리 반듯이 펴놓는다 해도 은박지가 그러하듯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나는 초등학생이었던 어느 해를 기억한다. 나른한 휴일 오후였고 태양은 맹금류처럼 서쪽 하늘로 느리게 활강하는 중이었다. 마을 회관 앞에서 놀던 내게 동네 어른 가운데 누군가 달려와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전했다. 탈곡기에 손이 빨려 들어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절단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하던 동네 어른의 말투는 안도와 경악을 오갔는데,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로서는 아버지의 오른손목이 뭉텅 잘려나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건지 집게손가락이 잘려나간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질 만큼 슬픈 일이라는 건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마루 끝에 앉아 노을이 물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땅거미가 내리고 여기저기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병원에 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어둠이 번져오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난생처음 어떤 방식으로 세상이 어두워지는가를 알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소가 울어댔고 개가 낑낑거렸다. 쇠죽을 쑤어 외양간 여물통에 부어주고 개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었다. 할머니의 상을 치른 지 삼 년이 되지 않았기에 마루 한 귀퉁이에는 상청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할머니 영정 앞에 밥과 국을 올렸던 걸 떠올린 나는 부엌의 큰 솥을 부신 뒤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설익은 밥 한 그릇과 김치 한 보시기를 상식으로 올리고 나니 더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러자 마당을 채운 어둠이 내게 와락 덤벼드는 것 같았고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숨을 죽인 채 터뜨리는 비명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자정 즈음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왔으나 우리 세 식구 가운데 누구도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 이 슬픔도 언젠가는 잊힐 것이니 굳이 반추하여 견고한 기억으로 남길 필요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도 나는 그날 밤 느꼈던 쓸쓸함과 두려움을 되풀이해서 겪어야 했고 그 탓에 기억은 견고해졌다. 그런 순간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왔다. 이를테면 어느 날 무심코 집안 구석에 버려진 낡은 목장갑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 목장갑에도 집게손가락이 없었다. 그러면 집게손가락 없는 목장갑을 끼고 다니던 아버지가 떠오르게 마련이었고 뒤이어 여지없이 그날 밤 홀로 마루 끝에 앉아 부모를 기다리던 어린 나를 보게 마련이었다. 아마 한쪽 팔을 잃은 누군가를 안다면 그이의 한쪽 소매가 없는 셔츠를 볼 때마다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농기구를 챙겨 새벽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마저 예사롭게 볼 수 없었고 아버지의 등에 새겨진 침묵을 해석하려 애써야 했다. 아버지는 이전과 분명히 다른 존재였으나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괴로웠다.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그의 시 “기억이 나를 본다”에서 이처럼 문득 찾아오는 기억을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이라고 불렀다. 내가 눈을 감아도 기억은 눈을 뜬 채 나를 따라온다. 아버지 역시 그랬던 것이리라.

 

한 번 지나간 순간은 재현할 수 없지만 앞에 놓인 무수한 시간들 안에서 그 순간은 수많은 변형태로 돌연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참혹한 순간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게 이제 그만 떼쓰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자들은 정녕 알지 못한단 말인가. 그이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일상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한 번 구겨진 그이들은 아무리 반듯이 펴도 잔금 하나 없던 매끈한 은박지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참혹했던 순간의 변주에 불과한 영원히 고통스러운 순간을 매번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책을 읽다 ‘세월’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문득 오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작가는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을 가장 아름답고, 또 명확한 언어로 건드린다. 이것이 지인이 손홍규의 칼럼을 소개하며 밝힌, 세상에 작가가 필요한 이유였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였다. 칼럼을 읽고 나자 『다정한 편견』에 실린 글들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이 책 역시 저자가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 '손홍규의 로그인'을 묶은 산문집이다.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우직하고 따뜻한 애정과 함께 부조리한 사회를 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진실한 주장을 담았다. 4.5매 내외라는 분량상의 제약 때문인지 한 꼭지의 글이 두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다. 분량이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한 꼭지마다 주는 울림이 너무 커서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고 넘어가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p.195 작가와 작품

여전히 나는 작가와 작품을 오롯이 분리해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오늘도 내 사유와 감각의 얕음보다는 나라는 인간의 됨됨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내 글이 못난 건 창작방법의 한계 때문이거나 부르주아가 아니어서가 문학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못된 녀석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작가와 작품을 오롯이 분리해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손홍규라는 사람이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에 휘둘리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행간 사이사이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특히 좋았던 점은 생경한 순우리말을 익힐 수 있었다는 것.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옆에는 핸드폰 국어사전 어플이 켜져 있었다.






p.33 싸목싸목

밥 먹는 걸 흐뭇한 얼굴로 내내 지켜보며 당신은 싸목싸목먹으라는 말을 추임새처럼 넣어주곤 했다. 싸목싸목. 지금은 이 낱말을 천천히라는 뜻으로 풀어 새기지만, 이런 뜻풀이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정서적인 무언가가 여전히 남는다. (중략) 한 생을 두고 우리가 자신의 길을 싸목싸목 가듯이 밥 한 공기 싸목싸목 뜨고 사람 사이도 그처럼 싸목싸목 두터워지는 거라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싸목싸목, 발싸심, 흠구덕, 신산스럽다, 앙구다, 버성기다, 눙치다, 드잡이질 등등소풍날 곳곳에 숨겨놓은 보물놀이 종이를 찾듯, 그의 글 속에서 심심찮게 발견하는 순우리말은 사전을 찾으며 배우는 재미가 있다.

 

작가는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을 가장 아름답고또 명확한 언어로 건드린다누군가 내게 세상에 작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조용히 이 책을 건네고 싶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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