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 땅에서 엄연히 인기(?) 작가가 된 줄리언 반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1년 전이다. 그때도 딱히 빠르게 안 편은 아니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당시에도 유명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 역사>가 아니라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이라는 작품으로,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된 한 남자가 질투와 망상에 시달리는 내용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또 다른 작품을 빌려 읽게 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내 말 좀 들어봐>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그대로 반스의 팬이 되고 말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때문에 ‘이 사람의 작품은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럴 정도로 이 책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그 무렵 나는 책 읽기 슬럼프 시기였는데, 반스 때문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린책들에서 속속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나는 그 책들을 하나씩 사 모으면서 기뻐했다. 이제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반스의 작품들도 거의 절판 또는 품절이니, 세월이 또 그만큼 흐른 셈이다. 요즘은 열린책들 대신 다산책방에서 반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열린책들에서 발간했던 그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내 말 좀 들어봐>나 그 후속작이었던 <사랑, 그리고>도 그중 하나이다. 줄리언 반스는 예술 작품이나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비틀어 쓰는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그만의 글쓰기 스타일이 독자를 살짝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봐>나 <사랑, 그리고>는 반스의 작품 가운데 그 ‘비틀어 쓰기’가 좀 덜 한, 그래서 가장 읽기 수월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두 작품은 ‘사랑’이야기이며, 그것도 삼각관계, ‘불륜’ 이야기다. 그런데다가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참 수다스럽게도 풀어놓는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세 사람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털어놓고 있으니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내 말 좀 들어봐>를 읽을 때,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스튜어트’에 심하게 감정 이입을 할 것이다. ‘올리버’는 ‘스튜어트’와 ‘질리언’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사랑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참 사랑에 빠진 이들이 올리버를 좋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왜 질리언이 그 충직한 스튜어트대신 조금은 얍삽해 보이는 올리버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면 질리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더욱이 내가 기억하기로 스튜어트와 올리버의 가장 다른 점은 질리언의 '머리빗'을 대하는 태도였다. 올리버는 질리언이 그림 복원 작업을 하면서 종종 빗어 넘기던 그 이빨 빠진 머리빗을 보면서, 그 빗을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빗이 몹시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문제의 스튜어트는 그 빗대신 다른 빗을 사다 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이게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들은 보통 이런 두 가지 면을 보이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그게 이빨 빠진 머리빗일지라도) 사랑스럽고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경우와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물건이나 행동 가운데 자신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새로 사주던가 해서라도 바꾸길 바라는 경우 등등. 당신이라면 어떤 사람에게 더 애정이 가겠는가? 아마도 질리언은 자신의 이빨 빠진 빗마저 사랑한 올리버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내 말 좀 들어봐>는 이렇게 ‘사랑’의 여러 모습을 세 화자 모두에게 공감이 가게끔,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해되게끔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내 말 좀 들어봐>를 읽고 나서 줄리언 반스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 정보를 찾다 보니, 후속편도 있는 게 아닌가! 주인공들의 10년 뒤 이야기라는데, 아 정말 궁금한 거다. 그때 당시, 번역본은 아직 안 나오고 영어판과 불어판만 판매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또 참지 못하고 열린책들 홈페이지를 찾아가서는 내 생애 처음으로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독자가 편집장에게’를 클릭하고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안녕하세요.
    귀사에서 줄리언 반스 작품을 계속 번역해서 출간하고 있기에 문의해봅니다.
    줄리언 반스 <내 말 좀 들어봐>의 후속 작인 <love, etc.>의 출간 계획은 없으신가요?
    꼭 읽어보고 싶어서 문의해봅니다.
    수고하세요;


그리고 놀랍게도, 거의 즉각적으로 답장이 왔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은 앞으로 두 권이 더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중 <사랑, 그리고>는 올해 안, 가을 무렵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줄리언 반스와 열린책들에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메일을 주고받은 게 2007년 7월이니 거의 10년 전이다. 문제의 <사랑, 그리고>는 2009년 1월에 출간된 것으로 기억한다.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서 샀던 나. <사랑, 그리고>는 조용한 밤, 혼자 살며시 펼쳐 읽어야만 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이유는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내게만 자신들의 은밀한 속내를 고해성사 해오기 때문이다.

<내 말 좀 들어봐>에서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자 악다구니를 쓰던 세 사람,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돌아온 것이다. 첫 등장부터 재미있다. “이봐! 오랜만이야. 10년 만이군! 많이 변했다고? 당신도 많이 변했다.”라며 아주 오래 전에 만났던 친구와 해후를 하듯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정말로 이 작품을 10년이 흘러 다시 읽은 사람이라면 감회가 새로웠을 듯하다. 스튜어트의 말처럼 변한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많이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랑이나 결혼, 인생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었던 전작처럼 속편인 <사랑, 그리고> 또한 단순한 ‘삼각관계 러브스토리’로 읽어버리기엔 그 깊이가 무척 깊다. 10년이 흘렀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1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책장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하다. 책을 읽으면 이들이 늙었구나 하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데 그저 흰머리나 불어난 체중 등 외모의 변화에 대한 묘사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런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도록 표현하고 있는 반스의 글솜씨에 감탄이 나온다. 물론 올리버는 여전히 속사포처럼 얄미울 정도로 현학적인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스튜어트는 변함없이 어딘가 꽉 막힌 답답한 느낌이고, 질리언은? 전보다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여자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올리버의 모습을 보면서 살짝 두려워지기도 한다. 올리버는 여전히 낭만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질리언이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 ‘Love, etc’에서 ‘etc’가 아닌 ‘Love’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그런 삶.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온(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스튜어트가 10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루어온 ‘etc’적인 삶(세속적인 성공)에 비해 올리버의 삶은 초라하고 볼품없다. 때문에 질리언의 재기 발랄함은 올리버의 낭만주의자적 삶 속에서 빛바래진다.

이쯤에서 ‘어, 그렇다면 이 이야기 너무 뻔한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연애와 달리 결혼은 현실이어서, 현실적이기 보다는 낭만적인 남편 올리버를 택해 살던 질리언이 결국 돈에 굴복해 불행하게 되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전히 10년 전에 그랬듯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며,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셋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첫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첫사랑의 배신에 상처를 받고 오랜 세월 삶을 그저 버텨온 남자 스튜어트, ‘가능한 한 많이 하는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세상의 우선순위는 오로지 사랑이라는 무일푼의 낭만주의자 올리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자신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을 뿐이라는 질리언. 이렇게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너무나도 다른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러브스토리가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의 고백이?

더 흥미로운 사실은 <사랑, 그리고>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도 어쩐지 끝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내 말 좀 들어봐 Talking It Over>를 1991년 발표한 뒤 2000년에 <사랑, 그리고 Love,etc>를 발표한 줄리언 반스. 2010년은 그냥 지나갔지만 혹시 2020년 최후의 속편 발표를 목표로 지금 열심히 쓰고 있는 거 아닐까? 어쩐지 반스는 스튜어트와 올리버, 그리고 질리언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아마존: 이제 이들 세 인물에 대해 끝을 냈다고 생각하나요?
반스: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끝냈다고 생각하고 나서 8년 뒤에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었거든요.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 그 인물들은 지금의 인생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 그들에게 적어도 10년은 더 주어야 할 겁니다! (영국 아마존과의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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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0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출판사는 반스의 책을 절판시켰다... ^^;;

국내에 반스의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을 때 열린책들 출판사가 재출간할 거로 믿었어요. 열린책들 문학전집 특별판 만들지 말고, 절판된 반스의 책을 다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잠자냥 2017-12-06 13:33   좋아요 1 | URL
네... 재주는 열린책들이 넘고 돈은 다산책방이 주워담는 형국이랄까요... ㅎㅎ 열린책들이 절판 안 시켰다면 요즘 반스 덕분에 재미 좀 봤을 텐데 말이지요. ㅎㅎ

cyrus 2017-12-06 13:34   좋아요 0 | URL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열린책들 의문의 1패..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