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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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린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르 귄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판타지나 SF 장르를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가란 무엇인가> 3권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는 이 작가의 작품은 언젠가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모든 말들이 인상 깊었지만, SF라는 남성 중심 세계에서 여성 작가가 된다는 주제와 관련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예로 들어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털어놓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르 귄은 글쓰기는 남자들이 규칙을 정한 분야였고, 거기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작가와의 인터뷰>, 155)다고 말한다. 그래서 글이라는 남자들의 세계에 자기 자신을 맞춘 채 남자처럼 글을 쓰며 남성의 관점으로만 표현한다. 때문에 르 귄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남자의 세계가 배경을 이루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러다 르 귄은 문학적인 페미니즘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건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문제이자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운동은 르 귄에게 이봐, 그거 알아? 당신은 여자야, 여자처럼 글을 쓸 수 있어.”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때부터 르 귄은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에게 없는 온전한 경험의 영역이 있고, 그런 글이 쓸 가치가 있고 읽을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어스시 연대기해인 시리즈처럼 르 귄의 대표작은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읽지 못했지만, 저 인터뷰 글 뒤로 간간이 읽은 르 귄의 단편들에서도 충분히 그녀가 인터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르 귄의 작품을 하나 둘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사서 모으고, 언젠가는 모두 읽어도 될, 아니 읽어야 할 작가와 작품 목록에 속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책꽂이에서 르 귄의 책들이 나를 노려본다. 사지만 말고 부디 좀 읽어달라고. 그럼에도 판타지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기는 한다. 그럴 때 바로 이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가 나왔다. 그간 읽은 르 귄의 작품은 그리 쉽지 않다.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야 해서 진도도 쉽게 나가지 않는다. 몇 번 읽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에세이집이라니,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선뜻 주문하고는 이번 설 연휴에 읽었다. 그런데, 에세이도 아주 쉽게 읽힌다고는 할 수 없다. 여러 차례 문장을 곱씹으면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제가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이 책은 르 귄이 여든을 넘어 블로그에 올린 글 가운데 40여 편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블로그라고!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블로그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책상 한 쪽에는 고양이 파드가 가릉가릉 거리면서 잠들어 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라니. 하지만 놀랍게도 르 귄은 블로그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한다. 블로그라는 말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데 마치 늪지의 흠뻑 젖은 나무 밑동처럼들린다고. 무엇보다도 블로그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는 걸 당연시 여기기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르 귄은 아주 내향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은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르 귄을 컴퓨터 앞에 앉힌 사람은 바로 주제 사라마구. 사라마구가 자신의 블로그에 여든다섯, 여든여섯에 올린 글들이 <노트북>이라는 제목으로 영문판이 발간되었고, 르 귄은 그 글을 읽으며 경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다. 문득 어디 한번 나도 해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도 블로그를 운영하게 된다. 르 귄은 자신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라마구의 글보다 훨씬 가벼우며 다소 사소하고 개인적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 실린 글들은 한편 한편이 모두 자유롭고 소소한 일상을 다룬 매력으로 빛을 발한다. 나처럼 르 귄을 조금씩 알아가고자 하는 독자는 물론, 르 귄의 팬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물인 셈이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사라마구의 글보다 훨씬 가볍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리 가볍지는 않다. 첫 째 장인 여든을 넘기며에서는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감의 의미를 꼬장꼬장하게 되짚어본다. 어느 날 문득, 하버드대학교 동창회에서 날아온 설문지에 답하면서 그 질문들이 애초부터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꼬집는다. 특히 은퇴 후 여가 시간에 무얼 하느냐는 물음에 르 귄은 정색한다. 자신은 은퇴한 사람이 아니라고, 은퇴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며 반박한다. 은퇴가 불가능한 작가에게, 글쓰기가 업인 사람에게 여가 시간에 하는 일에 체크하라면서 골프 요가 등과 함께 글쓰기가 포함된 문항을 들이밀었으니 그녀가 얼마나 발끈했을지 상상이 간다. 르 귄은 노년의 자신에게는 그 무엇도 여가 시간이 아니라며, 다음 주면 여든 하나가 된다면서 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노년의 삶, 늙어감의 대한 르 귄의 글은 내가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않았고, 심지어 멀었음에도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솔직히 말해 팔십삼 년을 사는 일이 그저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와 같은 유머러스한 문장에서는 큭큭 웃음이 터진다.

 

둘째 장으로 넘어가면 문학 산업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장이 두 번째로 흥미롭고 재미났는데, 많은 이들이 읽고 깜짝(?) 놀라게 될 르 귄과 존 스타인벡과의 일화나 문학상에 대한 르 귄의 생각, 그녀의 작품 <날고양이들>을 읽고 보낸 아이들의 편지에 얽힌 이야기 등등은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된다. 그리고 이 장에서도 버지니아 울프를 향한 르 귄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장으로 넘어가면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 자본주의의 문제, 미국의 도덕성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데, 꼬장꼬장한 비판은 날카롭기 짝이 없다. 그만큼 이 노년의 작가의 통찰력은 빼어나다. 아래 인용문장은 진심으로 공감했던 문장인데, 읽다 보면 요즘 우리 사회를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


불의에 저항할 동기를 부여하는 측면에서 화는 유용하면서도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도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를 무기라고 생각한다. 전투와 자기 방어를 위해 사용할 때만 유용한 도구. 남성 지배가 중요하고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여성의 저항, 그러니까 화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무기를 알아보고 즉각적으로 예상 가능한 역공을 한다. 인간의 권리가 남성 권리의 총합인 줄 아는 사람들은 정의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든 여성들을 낙인찍었다. 남성 혐오자, 브래지어를 태우는 여자, 참을 성 없는 입이 걸은 여자라고. 대중 매체도 그들의 관점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의미를 비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단어들을 과민증과 동일시함으로써 거의 쓸모없게 만들 정도였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렇다. (‘분노에 관하여’, 213)

 

마지막 장은 보상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마치 이 책을 거의 다 읽은 이들에게 보상이라도 해주듯 르 귄의 소소하고도 개인적인 일상이 잘 드러난 글들이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르 귄의 서신 업무를 도와준 이를 추억하는 글인 들로레스라는 사람과 어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소재를 맛깔난 이야기로 그려낸 계란 빼고등이 기억에 남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노르웨이에서 온 손님으로 표현한 트리라는 글도 내내 미소 지으면서 읽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은 아무래도 장과 장 사이에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파드 연대기이다. 르 귄은 고양이를 줄곧 키웠는데(<작가와의 인터뷰>에서도 고양이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 파드는 마지막 반려묘이다. 이 녀석을 처음 만난 순간, 그리고 파드에게 간택당한 순간, 파드를 집으로 데려와서 서로 탐색하고 적응하는 이야기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르 귄이 아니라, 고양이를 매우 사랑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파드는 내 고양이랑 아주 비슷하다. 파드의 왼쪽 뒷다리에 난 검은 점무늬는 귀여움의 종결자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내 고양이 뒷다리의 검은 반점이 떠올라 웃게 되고, 르 귄이 묘사한 파드의 눈, ‘크고 검은 동공이 초록빛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은 불그스름한 노란빛이 감쌌다는 부분을 읽다가 어쩜 눈까지 내 고양이와 아주 흡사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파드가 사냥해서 갖고 놀다가 죽어버린 불쌍한 쥐를 위해 르 귄이 쓴 망자를 위한 시를 읽노라면 이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귀여움에 또 한 번 웃게 된다. 아마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집사라면 이 파드 연대기에 모두 마음을 빼앗기리라. 이처럼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르 귄의 팬에게도, 르 귄을 잘 모르는 이에게도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을 더없이 친숙하고 생생하게 그려준다.

 



내 고양이를 위한 졸시

 

하얀 발바닥, 두 귀는 까맣지.

곁에 없으면 허전한 맘 들지.

우렁찬 골골송, 부드러운 털

언제나 꼬리는 하늘 위로 척.

편안한 발걸음, 시선은 강렬하고,

어떠한 행사든 턱시도 입고 가고.

거칠한 발가락, 분홍 코 자랑하지.

앉아서 생각하는 널 보면 기분 좋지.

품종은 길냥이, 그 이름은 파드야.

너 없음 내 삶이 힘들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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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2-12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어떤 기자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왜 당신 작품의 주인공은 전부 여자인가? 라고 물었더니, 그가 왜 사람들은 남자가 주인공인 이유는 묻지 않으면서 여자가 주인공인 이유에 대해서는 묻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그 인터뷰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지요.
나도 여자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여자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반성도 했고요.
단순히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페미니즘 소설이 되고, 없던 작품성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독자들이 사고의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을 주는 작품들이 많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P.S 고양이 키우시는군요! 저랑 제일 친한 친구가 아이보리색 긴털을 가진 고양이를 키워서 영접하러 갔는데, 너무 귀여운 한편으론 도저히 나 같은 사람은 한 생명체를 돌볼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집사들의 지극정성을 저는 절대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지극정성을 들인만큼 고양이가 나에게 위로가 되니 다들 그렇게 키우는 거겠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12 15: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인터뷰 내용 들어본 기억이 나네요.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한,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풍경들을 여성으로 대치해보면 얼마나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배제되어 왔는지 알 수 있더라고요. 남자 앵커 - 여자 아나운서 이 배치만 달리 해봐도 생경한 풍경이 되고는 하지요. (아직도 여전히...)

P.S 네, 그것도 어쩌다 보니 세 마리나 키우고 있습니다. 르 귄의 파드와 닮은 제 고양이는 둘째 고양이고요. ㅎㅎ 제 서재 메인 화면 프로필 사진을 채우고 있는 녀석이 막내 고양이랍니다. 잠자냥이라는 제 서재 닉네임도 제 고양이들이 하도 잠만 자서 또 자냥? 또 잠자냥? 이러다가 만들었답니다. (카프카 <변신>에 나온 그레고르 ‘잠자‘ + ‘냥‘ 의 의미도 있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