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의 의식 대산세계문학총서 143
이탈로 스베보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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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할까? 그리고 그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고야 마는 인간은 또 얼마나 될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봄직한, 가장 흔한 결심들을 떠올려 본다. 금연, 금주, 운동, 다이어트, 어학 공부, 저축 등등 수많은 결심들이 새해에는 이 지구 곳곳에서 무수히 꽃피었다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또 새해가 되면 다시 그 결심이라는 꽃은 한겨울에도 마구 피어난다. 곧 시들어버리고 말 덧없는 결심의 꽃.

무언가를 계획하고 작정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먼 나조차도 저 위에 언급한 결심의 꽃 가운데 몇몇 개는 시도해 보았다. 물론 물을 주지 않아서 그 꽃은 금방 시들어버리곤 했다. 하다못해 누군가에게는 무척 쉬어보이는 결심조차 지키지 못한다. 올해만 하더라도 산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새 책을 구매하지 않겠다고, 굿즈 때문에 책을 사지 않겠다고 얼마나 결심을 했던가. 그 결심은 일주일도 채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은 100년 전에도 존재했는가 보다. 왜 아니겠는가, 그 이전에도 인간은 늘 지키지 못할 계획을 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며칠, 아니면 몇 시간 동안 굳은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이 덧없음이여.

<제노의 의식>의 주인공 또한 그와 같은 인물이다. 19세기 끝 무렵부터 20세기 초를 살아갔던 이 남자를 평생 괴롭힌 결심은 바로 ‘금연’이다. 어릴 때부터 줄담배를 피워대던 제노는 거의 날마다 담배를 끊겠다고 마음먹지만 번번이 그 결심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늘 ‘마지막 담배’라는 공허한 금연 결심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담배는 언제나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제노라는 인물이 특이한 까닭은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쯤 금연을 결심했다가 그 결심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내 결심 자체를 포기하고 마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노는 정말 지독하게도 줄곧 금연을 결심하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는 한다. 그러고는 괴로워한다.

여기서 그의 또 다른 질병(광적인 흡연을 제1의 질병이라고 본다면 말이다)이 비롯된다. 그것은 강박증이다. ‘금연’을 반드시 하고 말아야 한다는 강박증. 제노는 강박증을 심각한 질병이라 여기고 자기 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의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의 주치의는 제노에게 내면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글로 써 보라고 제안한다. <제노의 의식>은 바로 그 기록이다. 사실, 지나친 흡연이나 강박증과 같은 증세는 어떤 시각에서 보면 그리 심각한 질병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제노는 자신이 깊이 병들었다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자기의 삶을 곱씹고 돌아본다.

바로 이런 설정에서 <제노의 의식>의 독특한 면모가 드러난다. 질병과 건강이라는 두 개의 대립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 외부와 내부, 겉과 속, 현재와 과거의 세계를 넘나들며 한 개인의 자아 및 삶을 성찰하고 이것은 더 나아가 인류 문명의 성찰로까지 확대된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문득,강유원의 <책과 세계> 속 한 구절,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 투영해서 보자면 병든 사람만이 생각을 한다,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건강은 자기 자신을 분석하지 않으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지도 않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병자들만이 자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 (211쪽)


제노는 그것이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병이 들었기 때문에 자기 삶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그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어릴 때 금연 결심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죽음, 첫사랑, 결혼, 불륜, 사업 등등 한 사람의 일생이 펼쳐진다. 물론 제노 그만의 일기이자 의식의 나열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판가름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온 인생이 그러했구나, 독자는 헤아릴 뿐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인생은 모두 그렇게 기록되지 않는가?


그 무렵 나는 치료가 불가능한 사소한 병을 얻었다. 아주 사소한 병이었다.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두려움이 질투의 어떤 특별한 형태에서 생겨난 거라 믿었다. 나를 죽음에 가깝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이 드는 게 두려웠다. (210쪽)

내가 건강을 향한 집요한 노력으로 시도했던 결혼이라는 극약 처방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너무나 지독하게 병들어 있었으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결혼한 남자로 남았다. (265쪽)


질병과 건강을 정의하는 제노의 의식은 조금 특별한데, 제노는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조차 병으로 인식한다. 그런 반면 결혼을 ‘건강을 향한 집요한 노력’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을 실패로 규정짓는데, 그 까닭은 그가 결혼 뒤 불륜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불륜을 대하는 태도마저 금연을 결심하던 그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번번이 금연을 결심하고 실패했던 것처럼 매번 연인의 집을 찾아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면서도 어느 순간 연인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연 때마다 느낀 죄의식을 불륜의 순간에서도 떨쳐내지 못한다. 죄의식이 줄곧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질병과 죄의식 그로 인한 자기반성 또는 성찰. 제노는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한 상태를 알고 있으며 아프기 때문에 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병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이 된다.


내 삶을 병의 한 징후로 보는 의사를 용서한다. 위기와 포기를 거쳐 진행되고, 날마다 좋아졌다 나빠지는 일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삶은 어느 정도 병과 닮았다. 질병과 다른 점은, 삶은 언제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삶은 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삶을 치료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구멍들을 상처라고 믿으면서 틀어막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치료되자마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현실의 삶은 뿌리부터 타락해 있다. 인간은 나무와 짐승들의 자리를 차지했고, 공기를 오염시켰으며 자유로운 공간을 빼앗았다. (555~556쪽)


위 구절은 이 작품의 핵심을 담고 있다. ‘삶을 치료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구멍들을 상처라고 믿으면서 틀어막고 싶어 하는 것과 같’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치료되자마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제노의 의식’에 따르면 병든 사람이야말로 진실을 보는 사람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오히려 병으로 가득 차 있어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때문에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건강해지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병을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건강’을 되찾는다.

제노는 소심하고 심약하다. 단 한 번도 그의 결심을 제대로 이룬 적이 없다. 언제나 욕망과 그것에 대한 금지. 거기서 비롯되는 좌절로 인한 죄의식 사이에서 중심을 잃고 늘 갈등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지만 그 성찰과 반성은 때로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자부심, 건강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사색하거나 성찰하지 않고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데 진력하는 대다수의 인간보다는 이 소심하고 괴팍하지만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았던 ‘병든 인간’ 제노가 어떤 면에서는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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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6-2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은 예나지금이나 세계문학을 누비고 있군요. <황금물고기>에 이 책이 등장해 궁금해 검색했더니 잠자냥님 글이 딱 걸림요. 찜했음다.^^ 라일라가 어떤 여정에 들어설지 계속 궁금해하며 읽고 있어요. 소설의 재미가 듬뿍!!!^^

잠자냥 2021-06-29 12: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제가 세계문학을 좀 많이 좋아해서요. ㅎㅎ <황금 물고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네, 이 책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