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하고 있는것 사랑인가?’ 에 대한 강렬한 의문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하루는 나의 연인.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그의 부모님을 내가 만나게 되어 “너는 내 아들을 왜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어찌 대답할거냐 물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액면 그대로 “저기..잘 모르겠어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라고 한다면 결코 내 얕지 않은 사랑을 의심할테고, “마음이 따뜻하고, 저를 현명하게 만들며, 어쩌구..” 대답하기엔 다수의 연인들 모습에 나 또한 평범하게 묻힐 것 같아 괜히 싫었다. 이도저도 개운하지 않다 싶어 대답을 망설이던 기억이 난다.


그 질문의 대답이 스스로도 무척 궁색하던 차에, 특유의 향을 풍기는 책제목이 바람되어 나를 흔들었다. ‘왜 사랑하느냐?’ ‘사랑은 하느냐?’.. 그렇게 나를 흔들어댔다. 책 첫머리에 나오는 아래의 글을 접하며, 이것이 심상치 않은 책임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저자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사랑의 과정에 있는 인간의 심리를 얼음장처럼 차분하게, 타지는 않을만큼만 뜨겁게, 그렇게 부드럽게 잘도 묘사해나간다. 어릴적 색색깔 실을 가지고 놀다 몽땅 얽혀버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껌이 머리에 눌러붙어 울상을 지어본 적도 있을거다. 대부분의 경우 그저 실을 방구석에 던져두거나, 껌이 붙은 부분을 가위로 싹둑 자르고 말았을텐데. 이 저자는 ‘사물’과 ‘현상의 미세함’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삶’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얼마나 진득한지, 밤이 새는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 앉아 그 멋대로 엉킨 실을 한올한올 정리해내고, 수백개의 머리카락을 껌과 분리해내고야 만다. 그런 태도로 사랑을 슥슥 찢어내어 한조각한조각 우리에게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이제껏 정리되지 않고 엉켜 있던 나의 여럿 사랑놀음들이 한줄로 죽 늘어서 나에게 한들한들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켜켜이 먼지 쌓인 내 마음을 청소한 것 마냥 잔뜩 시원해지는 것이다.


저자나이 스물다섯 즈음 이 책을 썼다 하니, 그 전에 최소한 한번의 불같은 사랑은 해봤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철학공부만으로 ‘사랑의 깊은 이해’를 얻어낸 저자에게 짝짝짝 박수쳐주고 싶다. 주인공이 클로이와 연애 전,중,후에 하는 생각들을 저자는 똑똑한 수다쟁이처럼 가지런히 한권의 책에 뿌려놓았다. 한두번 사랑해보고 나면 ‘사랑은 **다’라고 정의내리길 좋아하게 되고, 무언가 명확해지는 것 같지만, 사랑이 수어 번을 넘어서게 되면 오히려 정의내리길 꺼리고 그제서야 사랑의 애매함 속에서 헤멘다. 처음에는 ‘너? 잘생겨서. 너? 똑똑해서. 너? 착하잖아’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이유를 쉽게 들이댈 수 있지만, 막상 사랑의 깊은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하면 사랑의 이유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여자에게 몸무게를 물어보는것, 대화상대에게 무턱대고 재산이 얼마냐 물어보는 것 실례이듯이, 연인에게 ‘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실례가 되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스스로에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쉽게 툭 던질수 없게 된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라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것이고, 사랑의 이유라면 결국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둘의 첫만남 자체로 우.연.히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우연’에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억지로 짜 낸다면 ‘너를 만나서 우연히’가 되겠다. 조금 씁쓸한가? ㅎㅎ 너가 태어났고 내 앞에 나타났고. 그렇게 우연히 나는 너를..


이 책은 새로 사랑을 시작할때는 에피타이저, 사랑을 끝낸후에는 디저트, 사랑진행중에는 메인요리에 뿌려진 금가루가 될 수 있을만큼, ‘사랑’의 의미를 절묘하게 요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피타이저, 디저트, 금가루 없어도 배를 채울수 있지만 뭔가 허전하다. 사랑을 끝낸 사람들, 사랑 진행중인 사람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많이 허전할것 같다. '사랑이라면 나도 왠만큼 해봐서, 사랑 알것도 같다'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가슴 시리게 공감할만한 책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ine 2005-03-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재밌죠? 사랑하는 연인들의 심리를 어쩌면 그렇게 콕 집어내 주는지... 이 사람이 쓴 또다른 사랑 이야기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도 읽어 보세요 이번에는 여자 입장에서 쓴 거랍니다 이야기의 화자가 상대방을 더 좋아한다는 점은 똑같구요

진진 2005-03-0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콕콕 집어내더라구요...앗..그 책도 읽어봐야겠네요..요 정도 책을 썼으면 다른건 어떨까 ...

rainjini 2005-08-3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넘 맘에 들어요. 깨끗한 문체로 입안에서 맴돌던 느낌을 꼭 꼭 집어내주는것 같아요. ^^. 정말 이책은 얽힌 실타래를 풀어주는것 같은 느낌이죠. 저같이 성질급하고 단순한 사람은 실타래를 풀기도 전에 도망갈듯.ㅎㅎ.

진진 2005-08-3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정말 반한 책입니다. @_@ 처음 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