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공간이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추억을 간직할 때 그러하다. 매일 지나치면서 마주하는 꽃집, 카페, 슈퍼가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장미 한 송이를 사러 간 꽃집에서 주인과 나눈 작은 대화로 기분이 좋아졌을 때 세상의 모든 꽃집이 아닌 그 꽃집에서 나의 꽃 이야기는 시작된다. 카페도 마찬가지다. 업무상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카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한다면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충만할까. 나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카페, 그리고 하나의 테이블만이 들을 수 있는 사연들. 김종관의 『더 테이블』을 읽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 카페를 상상한다. 누군가는 영화로 만났을 이야기.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오롯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테이블에서 마주한 네 커플. 서로에 대한 감정을 서툴게 말하며 서로에게 대해 다가가는 예쁜 커플(경진, 민호), 유명 여배우와 예전 남자친구의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남녀(유진, 창석), 상견례 대행을 부탁하는 자리로 만난 가짜 모녀(은희, 숙자),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커플(혜경, 운철)의 사연을 차례로 들여주는 이야기. 순간순간 나는 테이블이 된다. 상대가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다스리는 감정을 읽는다. 에피소드 중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알려주는 은희와 자신의 딸이 결혼했던 날짜와 같다며 웃는 숙자. 가짜 모녀 사이를 연기하는 이들이지만 어느덧 진짜처럼 마음을 전하고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는 먹먹하면서도 따뜻하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하면서 서로를 선택하지 못하는 혜경와 운절의 대화가 맴돈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아픈 이별인데도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한 컷 한 컷 찍었을 것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의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감각적이면서도 섬세한 연출로 담아냈을 인물의 내면. 그리고 테이블에서 벗어난 그들의 다른 이야기는 어땠을까. 그런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어딘가에서 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감각의 글들이다. 영화 「더 테이블」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 감독 김종관의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김종관 감독의 팬이라면 이 책을 통해 더욱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텅 빈 공간에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도, 창밖 거리에도, 내가 보았던 것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203쪽)

 

 인생의 중요한 일은 그곳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어느 테이블 어느 의장에 앉은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206쪽)

 

 아주 짧게 머문 그 공간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을 그들. 어쩌면 그 공간이었기에 가능했을 마음은 아니었을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순간을 담아두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단 하루 동안 그 테이블에서 벌어진 일들, 단 하루 동안 그 테이블이 듣고 느꼈을 감정들. 만남 혹은 헤어짐이 있는 공간, 더 테이블이다. 따뜻한 온도가 필요한 시기, 당신과 마주하고 싶은 공간, 더 테이블이다. 

 

 그런 공간을 생각하자니 저절로 추억에 빠져든다. 한 바퀴를 도는 게 정말 힘들었던 학교 운동장은 이제 너무 작은 놀이터로 변해버렸다. 시험 때마다 자리를 잡겠다고 줄을 섰던 대학 도서관에서 빈둥거리던 시절도 그립다. 그 도서관은 학교가 이전했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공간과 후배가 아는 공간은 다른 것이다. 봄이면 벚꽃이 예뻐서 사진 찍으러 오는 외부인이 정말 많았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언제나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소중하고 아름답다. 윤대녕의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속 공간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라진 공간과 여전히 우리 곁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의 추억도 들려주고 싶다. 카페과 같은 역할을 했겠지만,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다방, 그리운 주황색 공중전화기, 한때 열심히 다녔던 노래방, 말만 들어도 괜히 설레는 공항과 말하는 것으로도 마음이 아픈 병원. 김종관의 책에서 만난 이들과 달리 윤대녕의 책에서 마주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과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이라서 그런지 공간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기억하고 묘사하는 공간은 왜 이리 멋지고 매력적이란 말인가.

 

 어둠이 내리면 도서관 내부는 조용히 웅성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만의 자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즈음이 바로 유령들이 깨어나는 시각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돌연 긴장한 상태가 되어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거역하기 힘든 호기심에 이끌려 어두운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말해 무엇하랴만 도서관은 죽은 말들의 세계였고 그러므로 밤마다 유령들이 출몰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실상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혹은 저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글쓰기를 마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유물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205쪽)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할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온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그냥 밥 한 끼가 아니었던 식당, 수많은 사람들의 들고나는 보통의 영화관이 아니었던 그 공간, 우리들의 약속 장소였던 그 카페.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 그곳에서 매만졌던 커피 잔.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만의 더 테이블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