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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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를,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아지기를, 전보다는 더 괜찮은 삶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아진다는 건 어떤 삶일까? 누군가에게는 두툼해진 월급봉투와 좀 더 넓은 집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관용구가 되어버린 저녁이 있는 삶일지도. 그리고 누군가는 어제와 같은 오늘 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변화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럭저럭, 혹은 그냥저냥 살아가는 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완전하게 나아지는 삶은 아닐까. 정이현의 소설 속 인물이 그러했다. 크게 화를 내지 않고 크게 절망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바라는 이들. 나빠지지 않고 현재를 유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은 우리 주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과 내가 가치를 두는 삶의 기준은 같지 않더라도 말이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긴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서랍 속의 집」, 184쪽)

 

 도시적인 색깔, 도시인의 삶을 포착하는 정이현은 이번에도 그들의 욕망을 다뤘다. 양로원이라는 불안정한 직장에서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욕망 아닌 소망으로 살아가는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하우스 푸어 신세를 지더라도 내 집을 장만하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삶이 돼버린 「서랍 속의 집」,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위해 감정을 위장하고 관계를 정리하며 속물적인 삶을 선택하는 「안나」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알면서도 그것을 나눌 수 없었다. 고통은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맨발로 혼자 버둥거리는 것과 비슷해서, 누가 손을 내밀면 조금 덜 어렵게 빠져나올 수 있어요.’ (「안나」, 219쪽) 결국엔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다.

 

 오늘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그것을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것이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난과 질책을 가할 수는 없다. 그들 중 하나는 우리가 위장한 얼굴이므로. 자신도 모르게 임신을 한 고등학생 딸의 출산이 반드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 하는「아무것도 아닌 것」의 나와 친부를 죽이고 유산을 나눠갖자는 이복형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우리 안의 천사」의 부부에게는 철저하게 그들만의 가면이 필요했다.

 

 그것은 일정한 거리두기로 이어진다. 거리를 두었을 때 고요하고 평온했던 풍경은 가까이 다가가 그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불편한 표정을 읽게 되니까. 적절한 거리로 서로를 관망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타인의 삶에 쉽게 개입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키려는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속 삶은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고양이 인형 샥샥과 함께 아버지의 옛 여자가 유산으로 남긴 거북이 바위와 살아가는 나에게 세상을 향한 거리는 더 멀어지고 욕망 또한 자라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

 

 ‘일요일 늦은 아침, 침대에 누워 채소 샐러드를 먹으면서 바위와 샥샥의 목덜미를 번갈아 쓰다듬고 있으면 반드시 세계와 내가 이어져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33쪽)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균형감이 잘 잡힌 안정적인 소설집이다. 감정을 배제하고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할까.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보였다. 습관적으로 웃으며 상대를 대하지만 결코 진심은 보여줄 수 없다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애쓰며 현재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삶.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해내야만 하고, 대때로 전부를 걸기도 하는 우리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치 어떤 표정을 짓든 그대로 비추는 거울 속 얼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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