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을 좋아한다. 책 만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쁘고 신기한 컵을 보면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꼭 곁에 두어야 할 정도다. 그렇다고 컵이 많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장에 책과 책 사이에 나만의 컵을 함께 나란히 두는 게 나의 작은 꿈이다. 이런 내게 박세연의 『잔』은 황홀, 그 자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잔에 대한 이야기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자신의 일상에 흐르는 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수많은 잔에 담았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단골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얼마나 달콤할까. 손님에 따라 잔을 선택하고 커피를 전하는 일은,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유명한 찻잔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어 수집가에게는 더욱 좋다. 눈을 뗄 수 없는 잔들이 가득하다. 아, 매혹적인 찻잔들...
좋은 이들과 뜨거운 차를 함께 마시는 시간은 그 온기가 식어도 여전히 뜨겁고 따뜻할 것이다. 꽃을 띄운 사진에서는 진한 꽃향기가 날 것만 같다. 사진으로 만나는 잔들도 아름답지만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태어난 잔은 더욱 특별하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바로 표지다. 표지를 벗기니 잔들이 쏟아진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잔에서 시작해 잔으로 끝나는 것이다. 책, 어디에서라도 잔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하나, 책에서 만나는 잔을 곁에 두었으면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안타깝게도 그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이토록 많은 잔이 있는데, 겹치는 잔이 하나도 없다.
에스프레소의 온도를 지키는 데미타스,
홍자의 향을 머금은 넓고 얇은 잔,
어떤 음료든 척척 담아내는 머그,
음료의 시원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유리잔,
보온을 위한 둥글고 두꺼운 잔,
누구든 이동하며 마실 수 있는 종이컵까지.
그냥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잔에는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훌륭한 맛과 향과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정성이 숨어 있다.
차가 찻잔을 통해 입으로 전달될 때까지의 모든 것을 위해
만들어진 소통의 도구이다. 443쪽
책 장을 넘기면서 나는 감탄하고 부러워한다. 그러다 나의 컵을 생각한다. 책을 읽을 때, 리뷰나 글을 쓸 때, 내 곁엔 언제나 잔이 있다. 내게로 와서 나의 일부가 된 그것들을 매만지게 만든다. 하여 특별한 나의 컵들에 담긴 사연을 불러온다. 나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온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한다. 눈을 맞추고 가벼운 포옹을 하고, 두 손을 잡고 나눈 시간이 담겼다. 잔의 아름다움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는 책이다. 당신과 나의 소중한 시간을 생각하고 미소짓게 만드는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