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산다는 건 가면을 쓰고 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감정을 자제하고 숨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우리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살아내야 하니까, 도미노처럼 몰려오는 삶의 거친 파도 앞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글프다. 그런 줄 알면서도 서글프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내몰려도 나를 대신 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아프다. 한강의 소설은 그것을 한 번 더 각인시킨다. 잔인하게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깊게 베인 상처를 가만히 지켜보고 어루만진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렸던 손길이라는 걸 우리는 금세 알아차린다.

  

 「회복하는 인간」은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다친 발목을 치료하다 입은 화상을 방치한 주인공 이야기다. 그녀가 화상을 입은 건 복숭아뼈 만이 아니었다. 지난 시절 언니와의 관계에서 조금식 데인 부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모님과 남편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언니는 그녀의 상처를 보여주기도 전에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얼마나 힘든 날들을 버티며 살아왔는지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회복하는 인간」, 32쪽>

 

 그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삶은, 그녀의 발목처럼 깊은 상처를 안은 채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남편 대신 가계와 아이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훈자」속 주인공이나 이제까지 살았던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길을 떠나는「밝아지기 전에」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다. 안간힘을 쓰며 살지만 산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지친 그녀가 견디다 못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고 믿었던 「 왼손」의 남자처럼 말이다. 평범한 직장인 주인공은 언제부터인지 아내와 말을 나누는 시간이 줄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 되버렸다. 어느 날 왼손이 통제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 남자의 왼손은 그동안 감췄던 욕망을 분출하듯 과격하게 행동한다. 그로 인해 직장에서는 해고되고 오랜 만에 만난 첫사랑과도 불편한 사이가 된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왼손은, 감춰진 울분이었을까.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건, 그저 자신을 그대로 바라봐 주는 단 한 사람의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서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눈빛을 기다리고 바라는 건 여전히 우리의 생을 사랑하고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숨기고 살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내는 「에로우파」와 「파란 돌」의 화자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모든 걸 잃은 「노랑무늬영원」의 현영이 차마 꺼내놓지 못한 바람도 그것이었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현영에게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림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두 손은 사라졌고 남편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두 손만이 남았다. 절망의 그녀에게 삶을 보여준 건 친구 소진의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이었다. 앞발을 잃은 도마뱀의 앞발이 다시 돋아나듯 그녀의 생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노랑무늬영원」, 296쪽>

 

 소설에서 마주하는 삶들은 잊고 있었다고 여겼던, 그리하여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믿었던 나의 이야기이며 당신의 이야기다. 소설 속 그녀(그)를 부서지게 만든 건 대단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무던하게 믿었던 미련함이나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균열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기에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한강의 소설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발견하지 못하는 그 작은 틈새를 발견하고 메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틈새는 한 번에 메워지기도 할 것이고 어떤 틈새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을 버티고 견디는 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힘내라는 그녀의 작지만 강한 목소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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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무가 될 수밖에 없었어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6-04-29 17:37 
    자신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어디서든 뛰어나올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외부의 공격뿐 아니라 내부의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결정한 건 영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영혜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충분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해받지 않아도 상관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