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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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LP를 손에 든 채 그 아이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여름날이었고,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는 일이 많아졌다. 내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고, 길었던 낮이 사라지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속상했지만, 약속한 적이 없으니, 일방적인 기다림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다시 만난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첫 문장은 그 LP를 떠올렸다. 그 아이를 좋아했던 시절, 나는 순수했고, 우연하게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가웠다. 그 여름날은 혼자만의 추억이 되었다. 
 
 살다보면 한 번쯤, ‘사랑이 전부다’ 라고 믿는 시간을 만난다. 그 시간이 찰나든, 영겁이든, 사랑은 그렇게 치명적이고 강렬하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상대를 위해 나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며, 나를 위해 상대의 모든 것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렇다 정의하지 못한다. 사랑은 공통의 감정임과 동시에 개인적인 감정이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사랑에 대해, 아니 내가 사랑했던 시간에 대해 이토록 많은 의문을 갖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사랑이 진행되던 때에도 내사랑에 대해 어떤 의심도 갖지 못했었다. 박민규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통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사랑함에 있어 아름다움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소설은 과거에서 시작해 현재로 이어진다. 1980년대 중반 백화점에서 일을 하다 만난 화자인 나와 그녀, 그리고 요셉. 그들은 스물, 그 언저리에 있었다. 자신만의 상처로 자신의 세상에 살고 있던 세 사람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은 외모를 가졌다. 하여, 세상은 그녀를 따돌렸고, 그녀는 그런 세상에 점점 익숙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친구이상의 감정을 느꼈고, 나와 그녀를 연결해주는 요셉을 통해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외모는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나를 그녀가 믿지 못함은 당연했다. 나는 곧 대학에 들어갔고, 그녀와 요셉과의 만남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 그녀는 나를 떠나버렸다. 백화점도 집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나는 알게 된다. 그녀가 보낸 한 통의 편지, 못난 외모로 나를 사랑하며 나에 대해 희망을 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엇, 두려워서 떠난다는, 그러나 사랑한다는, 장 문의 편지를 읽는 부서져 버린 그녀의 가슴을 느꼈다.

 아름다운 것은 나쁘지 않다. 심지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행복하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해서, 모두가 아름다워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하여, 주변을 어둡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청춘은 언제나 그 시기를 지나야 그 진면목을 알게 된다. 스무 살, 어른이 시작되는 나이이며, 사랑하기 좋은 나이다. 그러나, 스스로 못생겼다고 자괴감이 가득한 스무 살의 여자에게 사랑은 너무 먼 빛이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 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빛을 밝히는 거지’ p 185

 이렇게 고운 문장을  만나게 되어 행복했다. 소설은 사랑을 다룬 연애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인생을 말하고 있었다. 요셉이 특히그런 존재였다. 첩의 자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자살한 어머니, 그로 인해 상실감으로 세상을 채워가고 있던 그였다.  요셉에게 나와 그녀는 호흡을 할 수 있는 공기와 같았다. 아니, 셋은 서로에게 그랬다. 80년대와 현재를 교차하며  나와 그녀는 사랑했고, 잠시 이별했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요셉을 이야기한다.  80년대 중반의 사회상,문화,  음악은 자연스레 그 시대로 나를 이끈다.  내가 그 아이를 무작정 기다렸던 80년대. 두 가지의 결말로 마무리 되는 소설. 어떤 결말이 더 나았을까, 선택은 의미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나와 그녀가 만들어내는 결말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박민규를 단편 <근처>를 통해 처음 만났고,  박민규를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생각했다. 그가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삶이, 중심이 아닌 주변의 삶이라서, 내가 그 주변에 속해 있어서. 소설의 마지막을 만났을 때  눈이 아파왔지만, 정작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물이 난다.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워서, 따뜻해서, 연서(戀書)를 쓰듯 소설을 썼다는 박민규의 말이 떠올라서.

 그런 책이 있다. 소설의 문장을 전부 보여주고 싶은, 그 문장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전해주고 싶은 소설. 이 책이 그랬다. 감정의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차분했으나, 가슴 밑바닥에서 시작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느낌이 눈을 통해 내 가슴에도 들어왔다.  박민규
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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