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 번의 생사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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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모토 테루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을 떠올리면 쓸쓸하고 불운한 생이 펼쳐진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생의 고단함 같은 것 말이다. 소설집『오천 번의 생사』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어둡고 외로운 생이 있었다. 내가 만났던 이전의 소설과 다른 점은 소설 속 화자가 모두 남성이며 몇 편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있다는 점이다.

 

 아홉 개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눈썹 그리는 먹」이다. 화자인 ‘나’는 요양을 위해 어머니와 고모를 모시고 가루이자와에서 몇 달 생활하기로 한다. 그곳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어머니와 고모는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처럼 그때 자신의 심정을 들려주는 어머니. 불운했던 유년시절과 다정하지 않았던 남편과의 결혼생활,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가루이자와에서 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는다. 어머니에게 사실을 숨기며 두려워하는 아들의 표정에서 진실을 읽은 어머니는 담담하게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아들을 위로한다. 그리고 깊은 밤 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를 보며 즐거워한다. 매일 밤 하얗게 세어버린 눈썹을 어떤 의식처럼 정성스레 검은 먹으로 그리는 어머니. 요양을 온 아들의 식사를 챙겨주기 위해 따라온 여정에서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어떤 생을 살아야 죽음에 의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불꽃놀이는 돌연 끝났다가 별안간 다시 불꽃이 올랐다. 휴우 하는 소리가 난 뒤에 묵직하게 작열하는 소리가 들리면 둑이 터진 듯이 무수한 색이 피어났다. 언제까지 계속되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까만 하늘이 조용히 펼쳐져 이제 돌아갈까 하고 일어서려고 하자 다시 커다란 꽃송이가 한없이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어머니의 말이 가슴속 가득히 퍼져나갔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머니가 한 그 말을 가슴속에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눈물이 나와 불꽃이 번져 보였다. (71쪽, 「눈썹 그리는 먹」)

 

 어떤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비밀이 된다. 하얀 머리칼은 염색을 하지 않고 낮에도 흰 눈썹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밤마다 검은색으로 눈썹을 그리는 어머니처럼 이 단편집에는 조금 독특한 비밀을 간직한 이가 있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공사 현장에서 차량의 통제를 아르바이트를 하는 「토마토 이야기」속 ‘나’ 가 만난 병자는 그토록 원했던 토마토를 먹지도 않고 살포시 어루만지기만 한다. 피를 토하고 죽은 후 남긴 편지를 부탁받았지만 ‘나’는 공사 현장에서 편지를 잃어버려 그 후로 토마토를 먹지 못한다. 표제작 「오천 번의 생사」에서 생활비를 위해 아버지의 유품을 친구에게 팔려고 친구를 찾았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에 ‘나’가 만난 자전거를 타는 남자도 그러하다. 마치 귀신처럼 나타나 집으로 가는 길까지 자전거로 태워주겠는 남자는 엉뚱한 말을 계속 이어간다.

 

 “오천 번 정도가 아니야. 오만 번, 오십만 번, 아니 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죽어왔어. 맹렬하게 살고 싶어진 순간 그걸 확실히 알 수 있지. 그 대신 죽고 싶을 때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아. 수십만 번이나 다시 태어난 것을 알 수 없게 되는 거지.” (111쪽, 「오천 번의 생사」)

 

 

 

 

 

 죽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순간을 마주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죽어왔다는 말에는 절실하고 절박한 생의 의지가 담긴 건 아닐까. 추운 겨울밤, 집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는 화자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감당해야 할 빚 때문에 힘든 이에게, 공황장애를 숨기며 영업을 해야 하는 가장에게, 죽음을 앞둔 어린 시절 친구를 마주할 용기는 없는 이에게도 간절한 생의 의지. 『오천 번의 생사』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네 생은 그것들을 피할 수 없고 통과해야만 하지 않냐고 말하는 듯하다. 어둡고 깊은 밤이 지나야만 새벽이 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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