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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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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 파트릭 모디아노,『지평』

 

 

 

 

 모든 첫 만남은 상처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나는 여느 '좋은 소설'들을 읽었을 때와 같이 숙연해졌다. 만약 모디아노의 모든 소설이 이런 주제를 담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모든 소설을 읽게 될 것만 같았다. 나 스스로가 쉽게 회상에 빠지는 사람이라서.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선사한 근거는 이러했다.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를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기억의 예술'을 보여준 작품이라서 수상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할 것이다. 사실 '기억의 예술'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가장 많이 다루는 소재 혹은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평』이 환기시키는 몇몇 장면들은 영화 『메멘토』나 『냉정과 열정 사이』를 떠올리게 했고, 과거의 흔적을 짚어가며 회고하는 방식은 박민규의「근처」와 같은 몇몇 다른 소설이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그 뿐이다.『지평』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의존성이나 고독감, 새로운 '지평'이라는 것을 찾아 떠나는 자유로움은 독특하고 낯설다. 모디아노의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그가 동원한 '기억의 예술'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했다는 결과에 있는 것이다.

 

 소설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우연적이고 기이해서 불가해하다. 운명론을 믿고 싶지 않음에도 운명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보스망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금전을 요구한 '어머니', 마르가레트가 머무는 곳마다 나타나며 자신을 만나줄 것을 요구하는 '부아야발'.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모두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피하느라 정착하지 못한다. 잊을 만하다 싶으면 그들 앞에 나타나는 저 인물들 떄문에 그들은 결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악몽을 꾸고 불안에 떤다. 그런 그들은 서로에게 더 의지한다.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가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찾아낸다. 그는 마르가레트를 사랑하게 된다.

 

 보스망스는 운명론자로 보인다. 마르가레트와의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르가레트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보스망스는 어디에선가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말을 읽었다. 후일 마르가레트 르 코즈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그는 그 만남은 바로 그렇게, 바로 그곳 그 지하철 입구에서, 서로 맞부딪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다른 어떤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인파에 섞여 바로 그 계단을 내려갔으면서도 서로를 보지 못한 채 같은 열차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본문 25~26쪽)

 

  모든 첫 만남이 상처, 라는 말에서 상처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인용한 부분에서 나타나듯이 상처는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일깨워줄 통증을 선사한다. 그 통증 덕분에 우리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살아있음을, 눈앞에 있는 당신을 만나고 있음을, 그리고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상처를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고서 나의 모든 첫 만남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는 모디아노가 쓴 문장의 적확함에 피식 웃고 만다. 정말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 자문하면서.

 

 

마르가레트, 알 수 없는 사람

 

 

 마르가레트는 도대체 어떤 여성인가. 보스망스는 어쩌다가 40년 동안 마르가레트를 잊고 있었다가,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일까. 『지평』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보스망스가 마르가레트를 어떤 여성인지도 모르는 채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마르가레트는 만료된 여권을 지니고서 프랑스에 머문다. 그는 그녀에 대해 차츰 알아가지만, 많은 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그녀의 신분을 명확하게 보증해줄 사람 또한 없다.

 

  마르게르트는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지금 현실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보스망스는 어쩌면 그러한 점에서 마르가레트에게 매력을 느낀 지도 모른다. 둘은 많은 점에서 닮아있다. 공포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 안정적인 직업이 없다는 점,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는 점 등.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를 만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래도 그들에 관해 내게 남은 몇 안되는 기억은 퍽 생생하다. 인생의 다른 시절들에 비해 우연과 허무가 더욱 크게 작용하는 짧은 만남들. 밤기차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처럼 내일이 없는 만남들. 그가 젊었을 적 탄 밤기차에서는 승객들 사이에 일종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래, 우리는, 마르가레트와 나는 끊임없이 밤기차를 탔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그 시절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고,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무수한 짧은 장면들로 뚝뚝 끊겼다……

 

(본문 162~163쪽)

 

  과거 어느 시점을 회상할 때, 그 순간은 늘 활기차고 순수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더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어리석지만 싱그럽고 고결한 것으로 묘사된다. 모디아노의 이번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망각에 힘입어 마르가레트를 사십 년 간 잊고 살았지만, 그녀를 다시 찾으러 나서자 몇 안되는 기억이 퍽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일이 없는, 오늘의 만남들.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꼭 다시 만나고 싶은 날들.

 

 

 구성 면에서 재밌는 점은 소설 중간에 마르가레트를 위한 묘사, 배경을 할애한 점이다. 여기에서는 마르가레트가 어머니와의 연을 끊게 된 사연, 바게리안이라는 남자의 보모로 일하면서 경험했던 일들(그녀는 바게리안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 부아야발을 만나게 된 과정과 그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제시된다. 나는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보스망스도 이런 마르가레트의 배경을 알고 있을까. 왠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르가레트는 갑작스럽게 보스망스를 떠난다. 새로 보모 일을 맡은 곳에서 문제가 생기며 주인들이 경찰에 붙잡히고, 마르가레트 또한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될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이 불확실하여 경찰이 자신을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을 거라 믿는다. 상황이 안정되면 보스망스에게 다시 연락할 거라는 약속과 함께 그녀는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렇게 마르가레트의 얼굴은 '지평 너머'로 사라졌다. 연거푸 손을 흔들던 그날 밤 그녀의 모습처럼. 보스망스가 얼마나 마르가레트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려왔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편지 한 통 오지 않았고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다, 는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연상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평

 

 

  지평(L'horizon). 제목으로 붙이기에 참 괜찮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지평'이라 부르는 시공간을 갈망한다. 그래서 소설에는 지평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보스망스는 지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본문 91쪽) 

 

  모디아노 본인은 지평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혼재하는 시공간'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소설 속에서 확장되는 것 같다. 보스망스에게 지평은 단순히 혼재하는 시공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탈의 욕구가 있고 미지의 시공간을 향한 강렬한 열망이 있다. 그 욕구의 근원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존재하고 안식처의 필요가 작용한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젊은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를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대상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보스망스의 지평을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으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은 지평선(horizon)이 대양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맞닿아 있는 기묘한 시공간이다. 과거의 젊은 보스망스에게는 모든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는 미래와 같은 층위로 지평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유년기, 청소년기가 부여한 짐에서 해방되어 단번에 미래의 삶으로 뛰어오르는 영역이다. 현재의 보스망스에게 지평이란 과거의 마르가레트가 현존했던 시공간이다. '망각의 기세'를 한 꺼풀씩 벗겨내고 젊은 두 남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시기로 돌아가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세계이다.

 

 보스망스가 꿈에서 마르가레트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그녀가 사는 곳으로 추정되는 베를린을 찾아가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평으로 다가서려는 그의 열망이 만들어낸 운명이 아닌가. 그는 마르가레트가 일하고 있을 서점에 다다르자 평온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표현을 쓰면서 말이다.

 

 "어느 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184쪽)".

 

 어쩌면 보스망스에게 지평은 마르가레트라는 존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마르가레트를 통해 그는 그녀를 사랑한 젊었던 날의 자기 자신을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마르가레트와의 만남은 새로운 만남과도 같은 것이며 새로운 지평으로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다. 모든 첫 만남이 상처를 남기듯이, 60대의 보스망스는 자신의 삶에 상처가 나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와 똑같은 아픔의 크기로, 깊고 아련한 기억의 통증을 받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이 책은 어느 60대 소설가가 사십 년 전, 20대에 사랑했던 여자와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소설이다. 두 청춘이 불가해하게 만나고서 불가해하게 헤어졌고, 그러다가 사십 년 만에 불가해하게 재회하게 될 운명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지평』은 어떤 인연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새로운 만남의 시작을 암시만 해놓고 마무리지었다. 이 새로운 만남이 어떠할 지는 '새로운 지평' 너머의 영역이다. 미래의 영역이다. 작가는 우리의 상상으로 그 영역을 채울 것을 부탁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빠져들었다.

 

 나에게 있었던 모든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 역시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임을 깨달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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