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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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한 권의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그림과 관련된 책이지요. 1992년에 처음 출간된 서경식 선생의 책입니다. 개인적인 얘기 하나 할까요. 이 책이 제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참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 해 여름 저는 일년 정도의 외유를 준비하느라 좀 분주했습니다. 종로에 가서 여권이며 비행기표 등등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는데, 어느 빌딩의 한 모퉁이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전시・판매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슬쩍 다가가 곁눈질을 해보는데, 문득 눈을 확 잡아끄는 책이 하나 있더군요. 그 책이 바로 서경식 선생의 <나의 서양미술순례>라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그림’이라는 코드 때문에 그 책을 손에 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이름 ‘서경식’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대학생활을 전후하여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한창 눈을 돌리고 있을 때였고, 그러는 중에 서경식 선생의 형제들의 아픔과 역사를 알게 되었었지요. 그런 사람의 책이었으니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작은 문고판 책(첫판은 흑백도판의 문고판 이였습니다)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와서는 참 기뻤습니다. 하루를 꼬박새면서 그 책을 다 읽었습니다. 마음이 쉽게 다독여지지 않더군요.그림과 자신을 그렇게 밀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또 놀라웠습니다. 그림이라는 것이 사치도 머도 아니라, 삶의 고통을 건져내거나 치유하는 창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처음 보는 그림도 많았습니다. 처음 볼 수밖에요. 어디선가 그 그림들과 스쳤을지라도, 제게 그 그림들이 눈에 들어 왔겠나요. 기억이나 할 수 있겠나요. 아무런 고통도 읽을 수가 없는데 말이지요. 그저 한낱 위대한 작가들의 심미적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로 그림들을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선생을 통해 만난 그 그림들은 더 이상 단순한 그림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캄비세스왕의 재판>을 보며 수인이 된 두 자식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모습을, <화가 누이의 초상> 앞에서 ‘어두컴컴한 상념 속에서 혼자 서성거리고 있을 자신의 누이’를, 일그러진 <수띤의 초상>과 더불어 일생 자식과 가족의 고통을 감내하며 겪은 어머니의 회환과 슬픔을,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 앞에서 ‘숨도 못 쉬게 좁고 찌는 징벌방에서 40일간이나 쑤셔 박혀 있는 자신의 형’을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였을까요. 그림과 함께 떠오르는 무수한 연상들. 선생에게 있어서 그림보기는 피할 수 없는 ‘고행의 순례길’이였습니다. 저도 선생이 마주한 그 그림들 앞에서 같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의 독일행은 그 책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책으로 끝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보았던 그림을 따라 다녔던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눈앞에서 그 그림들과 마주한 순간, 선생의 아픔과 울림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상할 것이 없겠지요. 그 그림을 읽고 거둔 사람은 선생이지 제가 아니니깐요. 처음에는 그 점이 몹시 낯설고 야속했는데, 점차 그림들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다른 언어로, 다른 표정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 하나 마주하다가 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림들을 하나 둘씩 집어넣기 시작했지요. 결국 선생의 이 작은 책이 제게 그림에 대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림을 지식이나 정보로만 보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일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환호하고 인정하는 그림을 곁에 두는 것보다 자신만의 그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설혹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지를 알게 해 주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그림을 찾아다니던 10년 전에 비해 저는 더 많은 자신의 그림들을 마음속에 채워 넣지 못한 듯 합니다. 삶의 정체 때문에 그럴까요. 치열하지 못해서 그럴까요. 스스로가 성장하고 성찰하는 만큼 한 폭씩 쌓이는 그림들이 이제 또 다시 그립습니다. 수띤의 얼굴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선생의 책과 다시 마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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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1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와닿는 리뷰네요. 책하고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