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비싼 기독교 - 예수 믿는 신앙의 무한한 가치와 비싼 대가 지불
존 맥아더 지음, 이용중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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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싼 기독교, 공짜로 주어지는 이유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얻는다는 사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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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함 - 존 맥아더의
존 맥아더 지음, 정길호 옮김 / 소망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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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진리로 거룩하게 한다는 단순한 복음으로 무장한 교회가 되라는 원색적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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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 개정판
존 맥아더 지음, 황성철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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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원리에 물든 기독교를 정죄하고 오직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하라는 피의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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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흉상의 딜레마 

오늘(5월 21일) 노무현 재단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을 만들어  봉하마을에서 개막실을 했다. 제작은 전 노대통령의 묘역의 박석을 담당했던 임옥상화백이 맡았다. 흉상의 제목은 '대지의 아들 노무현'이다. 서민들과 함께하고 땅에서 살다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을 보려주려는 의도이다. 일반 동상이 사람보다 크게 만들어 올려다 보도록 만든 반면에 노 대통령의 흉상은 사람의 키높이 맞춘 '키높이 흉상'이다. 모든 사람의 높이?에 맞추려 했던 노 전대토령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기사와 사진출처 

 

 

 

 

 



 
 
그러나 이 흉상의 딜레마는 존재한다. 
첫번째, 흉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법정 스님이 자신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했지만 후손?들이 유언을 받들지 않고 더 많은 책을 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왜 그들은 기념해야 할까? 이것이 진보사상이 가진 딜레마이다. 기념은 역사의 전통을 이으려는 보수주의자들이 쓰는 방법이다. 세종로의 드높이 올라간 이순신장군상을 보라. 진보사상가들은 전통이 아니라 혁명을 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와 미래만을 말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그들의 사상을 이끌 구심점이 되어줄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세력을 모아줄 정신적인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노무현 전 태통령의 형상의 가지는 딜레마이다.  진보사상가들의 딜레마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진보사상은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려는 혁명적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정치적이고, 친공동체적이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대통령을 했고, 많은 비리들을 저질렀다.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보수적이란 뜻이고 혁명을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그러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제작은 딜레마 중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계가 무소유를 외치면서 엄청난 돈을 끌어모아 하나의 부패한 세력을 형성시키고, 기독교가 사랑을 외치면서 첨예한 대립과 권력다툼을 하는 것은 소유하지 말아야할 것을 포기하지 못한 체 소유하려하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갖으려 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를 부정하지도 않고,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산마다 수십미터 높이의 황금불상들을 보라. 저것이 무슨 불교란 말인가 신도를 끌어모으고 수많은 돈을 모으려는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모습이다. 기독교는 어떤가. 많은 프로그램, 멋진 건물, 탁월한 설교자, 높은 학벌을 자랑하는 교회는 무엇일까? 그러한 것은 교회의 형태이지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와 형태적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교회의 본질은 말씀이지 외형이 아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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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은둔사상과 기독교의 사랑의 차이를 생각하다.

다음은 조선시대 혀균이 지었다는 시문집 [성소부부고]의 부록인 [한정록]의 일부이다. 
- 김원우님이 이 책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다시 엮은 것이다. 제목은 [숨어사는 즐거움]이다. 본 글은 [숨어사는 즐거움]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영계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슴 가죽으로 지은 옷에 새끼 띠를 두르고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는데, 공자가 와서 무엇이 그리 즐거우냐고 물었다. 그러자 영계기는 세가지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첫째는 사람이 된 것이 즐겁고
둘째는 남자가 된 것이 즐겁고
셋째는 아흔 살을 산 것이 즐겁다.


육통의 자는 접여이다. 초나라 사람으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미친 체하며 벼슬을 버리고 광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초광(광야의 미치광이란 뜻)이라 불렀다. 공자가 초나라에 들러 접여를 '봉황같은 이여, 봉황 같은 이여'라고 하며 말을 붙이려 했지만 접여는 총총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 초왕은 접여의 현명함을 알기에  사자를 보내 금 일백 일과 거마 두대를 가지고 초빙해 오도록했다. 그러나 접여는 웃기만 하고 응답하지를 않았다 한다.

홍길동전을 지었던 허균의 사상 속에 유교사상을 배척하고 노장사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모든 인위적인 형식을 싫어했던 허균의 사상은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에서는 혁명적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 깊이 들어가 홀로 자연과 벗하는 사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혀균의 사상 속에는 세속을 떠나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려했던 '율도국'의 모체가 스며있다. 광해군 시절 혀균은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로 오를 정도로 혁명적 사상사였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당시의 부패한 정치를 비판하고 새로운 나라인 '율도국'을 세우려는 혀균의 진보적 공동체사상의 스며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방탕한 삶을 살았던 허균이었지만 그는 천민들과 함께했고,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면서도 천민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했다. 

 


  

 

 

 

 

 

"명나라 진해옹은 옛 학문에 몰두하여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근심이 없으니, 그 장인 오여필이 그를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31쪽)

 36쪽의 묵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묵지는 남창현에 있는데, 수죽이 그윽하고 울창하다. 왕희지가 임천군을 맡고 있을 적에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 주위를 맴돌면서 떠나지를 못했는데, 그로 인하여 묵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의 매목이 꽃나무를 심었는데 못 가운데서 꽃이 피자 이렇게 탄식했다.
"삶은 나의 괴로움이 되고 몸은 나의 질곡이 되며, 형은 나의 치욕이 되고 아내는 나의 누가 되는구나"
그리고는 드디어 아내를 버리고 홍애산으로 들어가버렸다.

허균의 사상은 불교의 무소유의 정신을 따르고 있으며 삶의 애착을 철저히 버리고 사람과의 인연을 끊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경지로 인정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 정신과 허균의 은둔사상은 본질 자체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허균은 세상을 버리고 홀로 은둔함으로 자연으로 돌아감을 주창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의 개념과 정확히 상통한다. 법정이 '무소유'에서 말하는 정신을 그대로 닮아있는 것이다. 불교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삶에 애착을 버리는 이유는 자연과 인간은 다르지 않고, 생과 사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혁명 정신이 '피'로 통하는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피의 혁명'은 당연한 것이다. 세상과의 단절, 역사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었던 그들은 불가피하게 기존의 사회를 파괴하는 존재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세상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며, 역사와 전통을 이으려는 수구세력에 더 가깝다. 

 

 

그러나 초기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세상에 대해 혁명적 공동체를 지향했으며, 기존 세력을 반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기존세력들의 자위의 몸부림이었다.

 

 아래의 책 중에서 법정의 무소유와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무소유개념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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