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귀향 - 기독교, 이성, 낭만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적 옹호서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앙이란 주인공의 천로역정. 이런 책이 있다니, 그것도 기가막힐 정도의 감동과 탁월함으로 무장한. 모두에게 강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내 인생에서 얻은 최고의 선물 중 하나. 그에게서 듣는 기독교 변증은 따스한 마음과 풍성한 감동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찾아서
엘리자베스 A. 존슨 지음, 박총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예수는 어디 있는가?

 

단언컨대 한국교회는 예수를 잃어 버린 것이 분명하다. 교리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지만 교리의 본질이신 예수는 잃어 버렸다. 그가 무엇을 말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지 않는다. 비극이다. 예수를 잃어버린 결과는 비참하다. 부와 권력을 손에 잡고 건축에 수천억을 쏟아 붓지만, 예수가 찾아갔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없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영어 원제는 Quest for the Living God로 살아있는 신에 대한 탐구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욕쟁이 예수로 유명한 박총과 북인더갭 안병율 대표가 함께 번역했다. 제목이 그리 탐탁하진 않지만 책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한 글자가 빠져 있다. 그런을 집어 넣어야 한다. 문장을 완성해 보자. ‘신은 그런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제목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럼 신은 어디에 있는가?’ 부제에 그 답을 달았다.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찾아서’ 이 땅에 거한다.

 

저자가 말하는 낙원은 누가복음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약속한 그 ‘낙원’이 아니다. 오히려 개념화되고 철학적 사유 안에서만 정의되는 낙원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를 잃어버린 이 땅의 권력과 야합한 기독교다. 고통당하는 저자거리의 사람들에 무관심하고 아편처럼 낙원만을 약속하는 비열한 종교 지도자들의 거처로서의 낙원이다. 신은 그런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 거한다. 그들은 불쌍히 여기고 그들과 고통당하며 착취하는 권력자들에게 대항-프로테스트-한다.

 

땅에 집요할 정도로 천착(穿鑿)한다. 중세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세계를 해석했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는 것, 즉 성과 속으로 구분했다. 거룩한 장소가 있고, 거룩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 거룩한 직업이 있고, 거룩하지 않는 직업이 있다. 거룩한 사람이 있고, 거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원론적 사고는 거룩한 것은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는 것은 거루하지 않게 해도 된다는 오해를 낳았다. 교회는 거룩하니 교회에서는 거룩한 삶을 요구 받지만 교회를 떠나면 온갖 악과 부정을 저질러도 괜찮다. 결국 중세의 타락과 몰락은 일상을 잃어 버린데서 시작 된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성과 속을 구분을 깨고 일원화 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루터의 수도원에서 일상으로의 귀환, 금지된 수도사와의 결혼이 그것이다. 뒤를 이어 칼빈은 거룩한 직업과 거룩하지 않는 직업의 경계를 허물었다. 모든 직업은 거룩하다고 선언한다. 부엌 일도 거룩하고, 청소하는 일도 거룩하고, 목회도 당연히 거룩하다. 근대는 성속의 이원론적 구분을 허물고 성과 속의 일치를 이루어 낸다. 성속의 일치를 통해 치명적인 약점이 등장한다.

 

중세가 성이 속을 지배 했다면, 근대는 성이 속과 결탁한다. 철저하게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정교결탁(正校結託)이다.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기에 변명의 이유가 억지스럽다. 루터의 이신칭의나 개혁주의 하나님 주권사상은 지배계층의 교리다. 사랑과 통치의 이중성을 지표로 삼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통치를 섬김과 사랑이 아닌 물리적인 정치(政治)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철저하게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위로부터의 결탁에서 의해서 이루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근대적 종교실상의 허점을 추적하고 근본적으로 복음서의 예수로의 귀환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한다. 신은 그런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고통받고 억압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을 연민하며 긍휼히 여기신다. 그들과 함께 신분과 차별의 벽을 넘어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 오해와 편견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의미를 찾아낸다. 가난과 흑인, 여성들의 하나님을 만난다. 신비한체 내버려둔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사랑을 도출해 낸다. 재단(裁斷)하고 정죄하는 교리가 아닌 사랑하고 살려내는 교리로 치환(置換)시킨다.

 

정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의 거처를 다시 물어야 한다. 예수는 종교 지도들과 결탁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가셨다. 드높아진 교회, 수천억의 건축비용을 지불하느라 정의와 사랑을 상실한 한국 교회에 경종을 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론
FR.슐라이어마허 지음, 최신한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미숙한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다. 헤겔과 더불어 독일의 지성인으로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슐라이어마허가 하나님을 변증했다. 책의 부제는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을 위한 강연’이다. 18세기 독일은 합리주의와 이성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시기다. 종교를 미신과 그릇된 사고에서 비롯된 불합리로 무시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슐라이어마허는 변증을 위한 강연을 시작한다. 그는 종교(기독교)란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과 도덕과 구별되며, 직관과 감정이 종교의 본질이며, 무한자인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특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요일4:18 말씀을 강조하며 기독교야 말로 진정한 종교임을 천명한다.


그의 강조점은 교양인으로 자부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인식의 틀에 갇힐 수 없으며 초월하는 타자이다. 이성으로서는 신과 접촉할 수 없고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를 옹호하려했던 그의 열정은 칭찬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의 변증이 오히려 기독교를 오해하고 감정 안에 제한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합리적 사유로서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첫째 강연은 계몽주의적 종교 비판에서 종교를 옹호하고, 둘째 강연은 종교의 본질을 규명한다. 셋째 강연은 종교형성의 가능성과 교육에 대해 묻고 무한자를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강연은 종교의 외적. 사회적 현상인 교회와 성지에 대한 기술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강연은 역사 속에서 개별 종교를 분석하고 진정한 종교로서의 이상을 제시한다. 자유주의와 비평신학의 문을 연 본서를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밑줄 긋기

“종교는 자기 안에 어떠한 법전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종교는 연역이 결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은총은 무엇인가? 모든 종교적 감정은 우주를 통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한에서만 종교적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다.”

“우주는 모든 방식으로 직관되고 숭배되어야 한다. 무수한 형태의 종교가 가능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 S. 루이스 - 별난 천재, 마지못해 나선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13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게 뭐람. 이렇게 탁월한 분의 책이 단 한 편의 리뷰도 없다니. 그래도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