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두 아이를 재우고 나니 이 시간입니다. 그토록 매섭던 추위가 잠시 가라 앉아 오늘은 조금 힘이 납니다. 웃풍이 센 집에서 아이의 여린 볼을 찬바람에 내어주며 있을 땐 미안함과 죄책감에 가슴을 쓸곤 합니다. 그래도 얼었던 창문이 녹아 열리듯 날이 풀리면 절망도 옅어집니다. 오늘은 창문이며 현관으로 얼었던 눈들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 앞 골목에선 녹은 눈이 다시 얼어붙을세라 거친 비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얼고 녹는,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 정신없이 살면서도 당신의 소설은 꼭 읽었습니다. 당신의 신작이 나오면 어김없이 샀고 천천히, 조금씩, 시간이 되는 데로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당신이 지나온 12년의 시간을 더듬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아꼈습니다. 문득 당신이 많이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단정한 문장 속에서 고요해지는 일이 좋습니다. 오롯이 나와 소설만 존재하는 시간. 어쩌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곤 유리창에 푸른 멍 자리가 생기도록 잠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서 낮엔 아이를 돌보며 꾸벅 졸기도 했지만, 이 시간이 내겐 위로이고 행복입니다. 
여러 날, 책을 펼칠 때마다 점점이 일어가는 슬픔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발이 시려 양말을 찾아 신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소설은, 새벽 3시의 시간을 닮았습니다. 짙은 어둠 속으로 흐리게 스며드는 새 아침의 기운 같은. 속으로만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에게 곧 들이닥칠 새벽은, 다 식은 난로처럼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찬기운을 뚫고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산 사람들의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며 본능이겠지요. 


상처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죽음 앞에 선뜻 두려움을 내려놓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고 적었지요. 이번 당신의 소설집 속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갖고 있고, 죽음 곁에 놓여 있었습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그 시간을 앓아 넘긴 사람도 있고, 그 시간에 갇혀야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복하는 인간>의 '그녀'는 발에 난 화상 자국을,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목숨을 위협하도록 썩어들어 갈 그 상처를 들여다보며 언니의 자리를 들여다봅니다. 사라진 존재를 향한 고통과 그리움. 실체를 알 수 없어 더 끝이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대신해 상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쳐주고 있습니다.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먹먹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아픈 이유가 거기에 있고 그래서 아플 수밖에 없다고 믿으며 상처가 아물길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언니와 좋았던 일보다 안타까웠던 일들이 불쑥 찾아와 괴롭히기를 여러 번 지나고 나면 고통은 약해지고 견딜만해 질 것입니다. 곧 새 살이 돋을 것이라는 기다림도 사라진 존재의 허전함을 채워가고, 시간은 다시 일상 속에 빠르게 섞여가겠지요. <밝아지기 전에>의 ‘나’도 은희언니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가기 전, 달라진 것 없는 일상 속에서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갑자기 죽은 동생을 보내고 장기여행자가 된 은희언니. 그녀가 떠난 곳에서 ‘나’는 죽음을 미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지요. ‘나’에겐 지켜야 할 아이도 있었으니 더 힘들고 치열했을 것입니다.  죽음이 나를 밀치고 그녀에게 간 것은 아닐까,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여행을 택했고 그곳에서 생의 마침표를 맞은 안쓰러운 사람 …… ‘나’는 은희언니와의 시간을 더듬으면서도 담담하게 아이의 밥을 챙깁니다. 아이를 돌봐 줄 동생이 올 때까지 카드놀이도 해주고요. 자신의 병이 재발하지 않게 식사도 조절해야 했습니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곁에 있는 아이를 챙기고, 편집자에게 보낼 원고를 신경 써야 하는 산, 사람이니까요. 함께 나눈 꿈 얘기가, 여행 이야기가 '나'에겐 은희언니가 존재했었다는 증거의 전부이지만 금방 거칠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기억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로 하지 않았을까요. 기억을 종이에 내려놓아 붙잡기 위해서. 그것만이 다만 지금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은희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듯 보였습니다.
 
사는 일은 참으로 신기하고 또 이상합니다. 현재를 살면서는 너무나 힘들고 벅차서 버리고 싶을 때가 여러 번인데 그 시간이 과거라는 이름을 달고 현재의 나를 찾아올 땐, (내가 찾아갔을 땐) 나를 회복하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오늘 저는 다섯 살 큰아이가 블록으로 만든 모형을 10개월 된 작은아이가 부수는 바람에 곤욕을 치웠어요. 큰아이는 소리 내어 울고 작은아이를 때렸습니다. 장난감을 부순 작은아이를 혼내야 할지, 동생을 때린 큰아이를 혼내야 할지 제가 더 울고 싶었습니다. 매일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그 때마다 큰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꾹꾹 참으며 자리를 떠나곤 합니다. 이 하루들도 먼 미래의 제게 힘이 되어줄까요? 지금은 너무나 벅차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지금이 제게 ‘훈자’와 같은 곳이 되어 줄까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낮고 따뜻한 음성으로 오늘을 열심히 잘 살았다고, 칭찬을 듣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훈자, 라고 저도 네이버의 창에 써 보았습니다. ‘세계의 걷고 싶은 길’로 ‘눈 쌓인 설산과 꽃 핀 살구나무들과 수로, 바람 계곡에 피어난 살구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길’이라 하여 아름다운 전경에 대한 극찬이 끊이지 않는 곳이더군요. 글로 만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그토록 마음에 담았던 곳.

 ‘영원히 일을 하고 가계를 꾸려가야 할 단 한 사람.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줘야 할 단 한 사람.’ 인 여자에게, 죽어 있던 고양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훈자는 그녀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이유인 듯 보였습니다. 꼭 한 번쯤, 가정을 내려놓고 그곳에 다녀올 수 있기를 바랐어요. 여자에겐 도망칠 곳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체념이었는지, 그토록 마음으로 곱씹던 훈자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과거 여자를 배려해 준 한 사람의 따뜻함과 작은 병아리, 직장 초년 생 시절 잠시 허리를 펴고 본 창가의 저녁들 …… 삶 밖으로 뛰쳐나가고픈 여자를 다시 제자리에 붙잡아 준 것은 작은 기억들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체온이었고 사랑이었어요. <노랑무늬영원>의 ‘나’는 작업실로 운전해 가는 길에 뛰어 든 개를 피하다 사고로 두 손을 못 쓰게 되었지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묵묵히 수발하던 남편도 지쳐 차가워졌고, 평생의 일이었던 그림을 잃은 ‘나’도 점점 삶의 냉소만 남아갔지요. 그러다 우연히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젊은 날 그녀의 마음을 데워주었던 한 번의 스침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남겨놓은 사진들을 보며 그 날의 따뜻했던 등, 입을 맞추고 싶었던 목덜미를 더듬었어요. 그가 죽은 건, 저도 너무 슬펐어요. 그녀도 그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신해 살아주고픈 마음을 갖는 듯 했습니다. 이제껏 다시 움직일 이유를 찾지 못했던 그녀가 무언가를 하고픈, 살고픈 마음을 꾸리고 있었어요.  친구의 아이가 보여준 노랑무늬영원의 잘려진 앞 발에 돋아난 '조그맣고 연약한, 투명한 흰 빛의 발'처럼, 작은 희망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조금 안도했지요. 죽는 날까지 하고픈 일을,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면 그건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겐 그녀가 그렇게 보였었거든요.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요.
  
그때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죽기 직전까지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림 말고 다른 것을 가져본 적 없으며, 가져보려 한 적도 없는 사람의 맹목과 자부심으로.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자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만. 내 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만. -p.258,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좋아한 <노랑무늬영원>이 2003년도 작품이어서요. 10년의 시간이 지나 내게 온 소설. 그 때의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어쩌면 소설을 읽었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시를 쓰고 싶은 게 아니라 시인이 되고 싶었던. 스스로 택한 죽음들이 아름다워보였던 시절. 아마 그 때라면 당신의 소설 어디에도 온 마음을 내려놓진 못했을 겁니다. 용기도 없고 겸손도 모르던 때. 가진 모든 것이 당연했고 끝까지 지켜질 것이라 믿었던 때.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아깝기만한 시간들입니다. 그 때도 당신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지만, 지금 당신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정들이 더 좋습니다. 내 삶이 조금은 바르게 익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두 아이가 내 삶을, 시선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당신의 소설 속 그녀들에게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시간들 때문이고, 책 읽는 시간이 행복해진 것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일이 감사한 것도 지금 이 시간들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좋았던 시간보다 아픈 시간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런 시간 속에 놓여있어 위태로운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금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에우로파>의 두 사람. 상처를 갖고 있는 그녀와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지만 그런 품을 갖지 못한 남자. 그녀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하는 남자. 그들의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이 거둬지길 기다렸지만, 끝내 그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서로의 곁에서 서성이기만 하고 다가서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으며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고, 함께 있으면서도 상처를 미리 걱정해야 하는 모습이 씁쓸했습니다. 그들이 그 마음을 뚫고 나와 서로에게 무너지길, 바랐어요. 서로의 체온으로 파고들어가 조금이나마 빛을 나눠 가졌으면 싶었습니다 '왼손'에게 삶을 송두리째 휘둘려버린 가장이며 사내였던 이의 극단적 결말도 가족이 다시 그의 곁으로 오는, 빛으로 향하는 터널이 되길 바랐습니다. 누구나의 삶이 빛 속에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고통도 삶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고통이 먼 미래의 자신을 치유해줄 수 있다는 것을. 더 늦지 않게 알게 된 것은 다행인 일인 걸까요.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읽으며 위로하고 싶고, 그들의 삶에서 희망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면서 왜 나의 삶에선 위로에 인색하고 희망보단 절망의 그림자를 쫓았는지. 모두 고만고만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혼자 유난을 떨며 아파한 것은 없는지 돌이켜 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심한 무기력증을 알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반년만에 만난 친구였습니다.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큰아이의 시간에 맞춰 일찍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그녀에게 쏟아놓은 이야기가 전부 아이 , 육아, 결혼생활에 지친 나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창피하고 서글펐습니다.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이것 뿐이구나 싶은 게, 나의 시간이 전부 아이와 집안일에 쓰여지고 있다는 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무척 가슴 아팠습니다. 작은아이가 두 돌이 될 때까지는 친구도 만나지 말자, 속으로 다짐하기도 했지요. 울고 보채며 번갈아 나를 찾는 두 아이들에게 사랑이 아닌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치워도 다시 어질러지는 방 안도 바라볼만 해졌고, 저녁 찬거리를 고민하다 저녁상을 보는 일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얼었던 일상이 또 녹는 차례가 된 모양이예요. 누구나 다, 여자의 삶 가운데를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의 글에서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것이 가장 최고라는 것도. 말하고 보니 더 부끄러워집니다.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 삶이 곤할 땐 적용할 줄을 모르는지요.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p.127, <밝아지기 전에> 중에서
 
이제는 영영 20대를 떠나왔습니다. 서른 한 살은 어떤 나이일까요. 조금은 아픔에 무뎌질 나이일까요. 그러나 이제는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할 때가 왔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해야 함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하며 살고 싶어요. 그녀는 은희언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당신도 이들의 고통을 당신의 몫으로 앓아보았기에 글로 쓸 수 있었겠지요. 알아주는 이가 없어 슬펐던 시간은 없었는지요? 그래서 꼭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잘 읽었다고. 한바탕 울고 난 뒤처럼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또, <파란 돌>을 읽으며 『바람이 분다, 가라』의 정희를 떠올릴 수 있어 반가웠다고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당신은 또 다른 소설 속의 삶을 살아내느라 아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힘들게 쓴 당신의 글을 너무 쉽게 읽어버린 것은 아닌지, 너무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집니다. 그래서 이 편지도 보낼 순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당신의 책 사이에 그 자리를 마련해두려 합니다.
 
그래도 어느 날, 우리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나이를 먹고 더 무르게 더 달게 익어갈 때, 당신의 소설이 또 나를 찾아왔을 때, 우리 삶의 반경이 잠시라도 겹쳐졌을 때, 그 때, 잠시 옷깃이 스치는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런지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그렇기에 마음데로 그려볼 수 있는 무수한 내일들 속에서 당신의 손을 반갑게 잡을 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기다리는 일은 산다는 일의 더 따뜻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 하루 한 알의 고통을 묵묵히 삼키며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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