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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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미야코 씨가 존스 씨 눈에는 굉장히 신선해 보였습니다.

누구의 여자도 아닌, 한없이 자유로운 한 여성으로. 미야코 씨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일단 세상 밖으로 나와버리자 섹스는 어디까지나 건전하고 자유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물론 미야코 씨도 깨닫고는 있었습니다.

세상 안쪽에 있는 사람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을. 불륜녀일 테지. -p, 220

 

 

 

 

 

 

 

 

책을 처음 받아본 순간 제일 먼저 파격적인 제목과 표지를 보고 깜짝 놀라는 한편, 빨리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사진만 보면 로맨틱한 이야기인가? 싶지만 제목까지 생각하면서 보니 이 사진, 불온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지요?

지금까지 출판된 에쿠니의 책 중에서 이렇게 실제 인물 사진이 표지로 등장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에쿠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에선 불륜이 주로 다뤄지곤 하지요. 그럼에도 신기한 점은 이 불륜이 순수하게. 마치 소녀스러운 감성으로 다가온다는 거에요.

위험한 발언이지만 에쿠니의 소설을 읽다보면 '불륜.. 해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랍니다.

 

 

 

하지만 지금, 강사 대기실 구석에 앉은 존슨 씨는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멋진 관계와 허전함은 한참 동떨어진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된다는 것이 존스 씨의 평소 생각이고, 상대가 미야코 씨여도이상한 외국인으로 비쳐질 위험을 알면서도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여성을 보러 가는 일에 공포를 느낀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공포?

존스 씨는 자문합니다. 대체 무엇에 대한 공포일까, 하고.

생각나는 것이라면 헤어질 때의 상황입니다. 정말 즐거웠어요. 미야코 씨는 그렇게 말하고, 존스 씨 눈앞에서 대문을 탁 닫았습니다.

계단을 사뿐사뿐 뛰어 올라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더니, 순식간에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그곳은 미야코 씨 집이므로 이도 저도 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존스 씨는 그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야코 씨가 갑자기 사라진 것과 자신이 어쩔 도리 없이 그녀를 보내버린 것 중 어느 쪽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지,

그 점은 존스 씨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습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존스 씨는 그때, 부당하게도 갑자기 미야코 씨를 빼앗겼다고 느꼈으며,

두 번 다시 같은 꼴을 당하고는 못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p, 58-59

 

 

그건 그렇고, 존스 씨 눈에는 오늘 미야코 씨가 유난히 생기 있어 보였습니다. 마치 동남아시아의 식물 같은 생기였다고 존스 씨는 생각합니다.

구애됨 없이 자유롭고 선명하고. 존스 씨에게는 자신 옆에서 행복해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설령 그 여자가 자기 사람이 아니라해도. -p, 99-100

 

 

9월 둘째 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초인종이 울렸을 때, 미야코 씨는 존스 씨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전날에도 그 전전날에도 완벽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미야코 씨 본인은 그렇게 여겼습니다. 존스 씨를 만나면 이 얘기도 하고 저 얘기도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구로히메에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런 준비는 아무 쓸모도 없는혹은 준비 따위 처음부터 되어 있지 않았던것이었음을.

계단 아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생생히 살아 숨쉬는 존스 씨가 서 있습니다. 미야코 씨는 움직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미야코 씨 자신이 나중에 생각한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기대 이상의 기쁨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바로 믿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p, 132

 

 

보고 싶었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눈앞에 있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확인했냐 하면, 우선 존스 씨 이외의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자신의 손이라든지,

카운터 위의 사이펀이라든지, 벽에 걸린 그림이라든지, 스툴 위의 검은 고양이 따위입니다, 존스 씨에게 시선을 되돌리는 겁니다.

볕에 조금 그을린, 건강해 보이는, 모스그린색 폴로셔츠를 입은, 머리숱 많은, 좋은 냄새가 나는 존스 씨에게로. 지금 내 눈앞에 있다’.

미야코 씨는 기쁜 마음으로 몇 번이고 그리 생각합니다특별한 시간이 되돌아온 겁니다. -p, 138

 

 

물론 미야코 씨는 히로시 씨가 좋았습니다. 적어도 그것이 맨 처음 떠오른 대답입니다. 하지만 어디가? 그렇게 자문해버리는 바람에 확신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남편이니까라는 것이 미야코 씨의 솔직한 심정이고, ‘하지만 서로 좋아서 아내와 남편이 됐으면서, 남편이라서 좋다는 건 이상해라는 것이

미야코 씨의 이른바 자기비판이었습니다. -p, 162

 

 

미야코 씨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버린 오코노미야키를 바라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건 냉동시켜두면 되니까.”

존스 씨는 말을 마치고 부엌으로 가서 그 일을 실행했습니다.

방 안의 불을 켜버리면, 갑자기 맛이 없어지거든요.”

부엌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둠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불을 밝히면 그 녀석들이 달아나버리기 때문이지 싶어요.”

미야코 씨는 미간을 좁혔습니다. -p, 184

 

 

 

 

한편으로는,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었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미야코 씨가 존스 씨에게 끌린 이유도 남편이 보여주지 않은 관심을 존스 씨가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여주고 맞장구 쳐주고 하는 걸 미야코 씨는 바랐던 거지요.

 

하지만 서로 좋아서 아내와 남편이 됐으면서, 남편이라서 좋다는 건 이상해’ 라는 미야코 씨 말에서

단지 부부 사이 뿐만 아니라 연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모습을 미야코 씨 부부에게서 볼 수 있었는데요,

우린 처음엔 서로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그만큼 관심을 줍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그렇게 서로가 좋아지지만 '이제 당신한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줄거야.'하는 생각에 서서히 관심을 끄게 됩니다.

미야코 씨의 남편도 처음엔 미야코 씨와 만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부부가 되고 나선 설렁설렁 대하지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느끼셨듯이 이 책의 결말은 '어? 안돼!'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씁쓸합니다.

 

 

 

게다가, 묘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미야코 씨는 존스 씨 눈에 더 이상 작은 새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조용한 오후입니다.

어둑어둑한 방에는 그윽한 먹물 냄새가 흐르고 있습니다. -p, 243

 

 

정말 유감스럽게도, 존스 씨도 미야코 씨에게 서서히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뒤에 미야코 씨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굉장히 궁금해지는 소설이에요. (부디, 굳세게 다시 일어나서 멋진 인생을 살아가길!)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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