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사랑하다
쓰지 히토나리 외 지음, 양억관 외 옮김 / 동방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아아. 귀찮네요. 가끔, 아아 싫다고 생각해요. 굳이 '진정한 만남' 따위 필요 없으니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만난다니까요, 그 때마다 진짜를. '오직 사랑하라, 자연이 우리를 낳았으니.' 체호프가 「세 자매」에서 한 말입니다. 나는 확신하고 싶어요. 인간은 연애와 혁명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다자이는 「사양」의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하도록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연애에 빠지는 걸요. 이렇게 태어났으니, 애써 홀로 고독하게 태어났으니, 알고 싶지 않습니까? 둘이 어떤 것인지.'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나는 ... 그래요,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건설적이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죠. 연애는 개념의 파괴니까, 인생을 건설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랑과는 다른 것이죠. 그 점이 재미있지 않나요. 연애에 빠지면 옷깃을 여미고 끝까지 빠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랑을 지나 죽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 254, 255


에쿠니 가오리 책을 소장하기 시작하면서 이 책을 제일 먼저 소장하려고 했는데 절판되는 바람에 소장하지 못했었네요. 그 후, 한옥마을에서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이 책을 보고 맛보는 식으로 조금 읽고 나왔는데 그 후로 1년이 지난 지금.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데려왔습니다.

 

 

자기 전에 누워서 조금씩 읽었는데 한 번 읽을때마다 푹 빠져서 읽게 되어,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일찍 일어나니까 자야겠다'하며 억지로 책을 내려놓는 걸 반복했네요. 그정도로 호소력이 짙은 책입니다. 보통 이렇게 호소력이 짙은 장르는 소설인데, 자기계발 서적에 이렇게 푹 빠질 수 있다니 신기했습니다. 솔직히 이 책을 자기계발 서적으로 분류해야할지에 대한 의문이 드네요.

'연애와 사랑 사이', '섹스와 마음 사이', '순애와 불륜 사이'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 쯤 의문을 가졌을만한 남녀 관계에 대한 문제를 총 6개로 나누어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쓴 글인데 이를 자기 계발 서적으로 해야할지..(인간 관계 쪽으로 분류되어있더라구요)

 

 

더 흥미로운 사실은, 츠지 히토나리의 글은 번역가 양억관님,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번역가 김난주님이 옮겨주셨다는 건데 이 두 번역가는 부부사이 이기도 하지요. 실제로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의 다른 작품들도 각각 김난주, 양억관 번역가님이 번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끔은 이 두 작가와 번역가를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깊이 빠져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그리고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정이 식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때는 이미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질투하지 않는 관계란, 에쿠니 씨가 말하는 것처럼 참으로 외롭고 허전한 일입니다. -p, 63

 

 

'속박한다'는 거 실제로는 수동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동사 같아요. 속방 당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책임은 당하는 쪽에 있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동사란 참 재미있어요.

'상처입다'는 실질적으로 자동사일 때만 가능하죠. 물리적인 폭력은 예외지만, 연애의 정신적인 면에서 상처를 입을 수는 있어도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상처를 입는 것은 상처를 입는 쪽의 능력이지요.

내가 이렇게 상처를 입었는데, 라면서 상대방을 추궁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잃다'란 말도 마찬가지죠. 자동사만 가능해요. 나는 사랑을 잃었다, 고 한탄하는 것은 좋지만 주어는 '나'니까 자기 책임이죠. 옛날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고 아연했던 적이 있어요. 정말 슬펐죠. 이 사람, 나를 잃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p, 100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여러 작품을 먼저 접해본 후에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실제 작품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아,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작품이 나왔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거든요.

 

 

 

즉,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 먼저고, 어느 쪽이 나중인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결과로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격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애석한 일이지만 어떤 일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 사랑이 항복을 선언하고 만 것입니다. -p, 170

 

 

 

'결혼과 이혼 사이'라는 부분에선 츠지 히토나리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츠지 히토나리는 이 글을 쓸 때,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한 상태였는데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와 결혼을 한 사이네요. 이 책에서 나오는 아내와 그녀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는 자세히 검색을 해보지 않아 모르지만, 흥미로웠습니다.

 

 

말이란 참 재미있어요. '나는 이 사람을 잃어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가 아니라 '이 사람이 어딘가에 살아만 있으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실연을 하고 자살한다든가, 연애가 끝나서 상대가 떠나면 더 이상 나는 살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있었던 뜨거운 감정이 지금은 없어졌다, 물리적으로 여러 사정이 있어서 같이 살 수 없어졌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 그렇게 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 즉 연애나 사랑은 더없이 특별한 것이고 절대 잃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상대방도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야만스러운 확신!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고, 만약 나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때는 자살할지도. -p, 204, 205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륜'을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자신이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 '륜'을 거부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런 여자는 되고 싶지 않다든가, 이런 남자만큼은 되지 않겠다는. 개개인이 긋는 선 이외에 연애의 선은 없다고 생각해요. 애당초가 황무지니까.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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