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새
에쿠니 가오리 지음 / 문일출판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녀석이 마시는 '차'라고 하는 건 바로 물이다. 나는 내가 마실 뜨거운 홍차를 끓이고 녀석한테 줄 컵에는 찬물을 가득 채웠다.

녀석은 물밖에 안 마시는 주제에 내가 마시는 것하고 똑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내가 커피를 마실 때면 녀석의 물은 커피가 되는 거고,

내가 와인을 마실 때면 녀석의 물은 와인이 되는 것이다. 

조용한 밤이었다. 간간이 주방 히터에서 들려오는 딱, 딱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야?"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래?"하고 말하면서 녀석은 멍하니 창 밖을 보았다.

"너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야?"

"으응"

창 밖을 바라본 채로 녀석은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녀석의 모습이었다. -p, 94

 



제 블로그를 오래 봐오신 분들이라면 제가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한다는 걸 아실텐데요,

그래서 에쿠니의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다 읽어야지 하는 소위 '전작주의'를 해보려했지만 손에 안잡히는 두 권의 책이 있었어요. 그 중 한 권이 바로 이 '나의 작은 새' 입니다. 출판된지 10년도 더 된 책이라 에쿠니의 감성이 덜해 읽고 실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런 걱정을 했던 절 비웃기라도 하듯, 이 책에서도 역시나 에쿠니의 감성이 가득가득했어요.

 

오래된 책이라 소담출판사에서 예쁜 표지와 함께 다시 책이 출판됐다고 하는데, 전 도서관에서 빌려봐서 1999년도 문일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으로 읽었답니다. 소장은 소담에서 나온 책으로 해야겠어요 :) 목요일에 서울 갈 일이 있어서 버스타고 가는 도중에 읽으려고 챙겨갔는데 (책이 얇고 가볍거든요!!) 1시간도 안되서 다읽어서 나머지 2시간은 멍때렸지요.... 그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어요.

 

겨울이 배경인 책이라 '겨울동화'같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정말 이 책과 딱 어울리는 말인 것 같아요. 겨울에 갑자기 날아온 새와 동거를 하게 되는 내용이라니, 그것도 끝말잇기를 좋아하고 가끔은 질투도하고 럼주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좋아라하는 새라니, 읽는 내내 이런 새와 겨울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네요.

 

 

딱 한 번, 녀석에게 여자 친구 험담을 한 적이 있다.

낮에 내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녀하고 싸우고 말았다. 

그리고 저녁때까지 내내 상처받은 기분으로 있었던 것이다.

"걘 좀 획일적인 구석이 있어." 내가 말했다.

"꼽사나운 노처녀의 기질이 철철 넘친다니까." 이런 말에 녀석은 한바탕 깔깔대며 웃더니, 예리한 어조로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자못 비난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입을 다물었을 때,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듯, "뭐야, 벌써 끝났어?" 하는 것이다. -p, 62

 

 

"나, 있지. 오늘 하루 종일 스케이트 연습했었어."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있는 나한테 와서 녀석이 말을 걸었다.

"꽤 탈 수 있게 된 것 같아."

"거 반가운 얘기네."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온 몸이 깨끗하고 홀가분해서 시원한 것이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근데, 연습이라니? 어떻게 연습했어?"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면서 물었더니, 

"어떻게 하긴. 머리 속에서 했지."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연습은 머리 속에서 하는 게 제일이야."

이불을 들춰 줬더니 바구니  안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가 누우면서 녀석이 말했다.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잖아."

스탠드를 켜고 나도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잘 자라, 짹짹이." 책을 펴면서 말했다. 내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좀처럼 잠을 잘 수 없다고 녀석은 이따금씩 말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읽지 않아도 꼭 책을 펴 든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몇 분이 지난 후에 희미하긴 하지만 규칙적이고 앙증맞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p, 8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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