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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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 토요일 아침, 엊저녁 읽었던 뉴스가 왠지 내내 겹쳐져서 마음을 긁는다. 

얼핏 읽은 뉴스는 가정폭력을 당하던 여자가 홧김에 집에 있던 수석으로 남편을 죽인 것에 4년의 징역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37년간 얻어 맞고, 정육점을 하던 남편이 죽게 패기만 한게 아니라 칼로 여자를 죽은 고기 칼질하듯 여자에게도 칼질하여 몸에 칼자국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창회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 여자를 또 쥐잡듯이 패서 여자가 집에 있던 수석으로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고. 


이 책은 흔해 빠진 여자 패는 남자 나온 이야기도 아닌데, 여자의 이야기는 뉴스에서 본 여자의 인생을 생각해보게 한다. 

제목은 딸에 대하여지만, 뒤에 해설에 나온것처럼 엄마에 대한 책이다. 30대 중반의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60대 엄마는 80대 치매 노인을 돌보고 있다.


얼마 전 제주에서 깜짝 방문한 엄마를 생각한다. 60대의 나이에 몸 상해가며 돈을 벌고 있다. 가진 재주가 있어서 내 알바 시급의 다섯배쯤 받는 것 같다. 집에 있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니 다행이지만,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하는 건 역시 돈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 요양보호사인 '나'는 집이 한 채 있어서 두 집에 세를 주고, 그 돈을 받아 병원비와 생활비를 한다고 한다.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도 있고, 월세도 받고, 월급도 받는데, 그렇게까지 힘든건가 싶긴 하다. 


딸은 동성애자이고, 애인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7년간 사귄 연인이다. 돈이 더 있었음 싶은데, 인정할 수 없는, 꼴도 보기 싫은 딸의 연인이 주는 월세 넉달치를 받고야 만다. 그리고, 그녀가 딸을 이년간 먹여살렸음을 알게 되고, 내쫓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며 괴로워한다. 


주말에 애인과 '우리의 20세기'라는 영화를 봤다. 아네트 베닝은 굉장히 쿨하고 멋진 엄마였지만,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래디컬 패미니스트인 애비가 자신의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제동을 건다. 아들에게 '너가 아직 소화하기 힘들겠지만..' 이라고 말하는데, 아들은 '여기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엄마 혼자에요' 라고 말하고 뛰쳐나간다. 


'이해'보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나 '너나 잘하세요' 혹은 '내버려두기' 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기에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까? '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는 '노년'이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60대의 엄마는 강력한 젊음이라는 망토를 두른 딸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60대와 자신이 돌보고 있는 비참한 80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알려주고 싶어 한다. 


"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경험하지 않고 말로만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 힘이 세고 단단한 젊음으로 무장한 지금의 딸애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60대가 되어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면, 분명 나는 아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 세고 단단한 젊음을 두르고 있는 것이겠지. 예전에 제주집에서 아빠가 말했다. "지금보다 10년만 젊었으면 진짜 더 많은 일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책 좀 읽는 뭣도 모르는 딸은 "아빠가 10년 있다가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라고 대꾸했다. 그 근처에 읽었던 자기계발서 같은데 나왔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빠는 그렇지.. 라고 대답하긴 했는데, 사실, 아빠는 그 나이에도 내가 시도도 못한 많은 새로운 일들을 해냈다. 허접한 딸과는 다르지. 

포기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 행복하게, 열심히,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며. 

이 책에서는 노년의 현실과 우울함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지만, 변할 수 있음을, 강력한 젊음으로 무장한 이들처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뇌당하다시피 들어 온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아이는 낳아야지' '좋은게 좋은거지'  등등으로 시작하는 많은 하나마나한 말로 주변에서쌓아 온 자신의 인생의 벽을 깨고 불편하지만 선명한 세계로 나온다.    
  

" 권 과장의 얼굴에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 한사람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

  


딸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노년에 대하여, 일에 대하여 

아버지도, 남편도, 남자친구도 빠져 있는 정말 희귀한 보통의 지금의 여자 이야기. 


이런 순간 더 이상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과 말을 섞고 나누고 어쩔 수 없이 동의하면서 나도 젊은 애들이 말하는 앞뒤가 꽉 막히고 편견으로 가득 찬, 세금만 축내는 부류의 노인이 되는 걸까. 젊은 새댁은 예예, 하지만 별 감흥이 없는 눈치다. 아직은 일이 몸에 익지 않은 탓이겠지. 죽은 성 씨가 담당하던 환자들을 맡았으니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서너 번 몸살을 앓고 난 뒤에는 서서히 적응이 될 테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 이곳을 떠난다. 끝까지 남는 건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에 끝나지 않은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탄력을 잃고 흐물흐물해진 살들이 앙상한 뼈에 겨우 매달려 있다. 덜렁거리는 살들을 치대며 비누칠을 한다. 젠의 다리가 덜덜 떨린다. 거품이 묻은 손으로 사타구니를 꼼꼼히 매만지고 시커먼 욕창 주변에 일어난 죽은 살들을 떼어 낸다. 어쩌자고 이 여자는 이렇게 오래 살아 있는 걸까.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타나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

한숨 자고 나면 아주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이 다 거짓말처럼 되어 버리면 좋겠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순조롭고 수월한 일상.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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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7-10-2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리뷰가 겁나 멋져요

하이드 2017-10-24 12: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주제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