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번역본의 제목은 너무 과격하다. 거의 사지 않을 제목의 책인데, 이 책이 집에 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책표지에 나온 원제는 Men's Search for Meaning :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의미 찾기 : 로고테라피의 소개. 정도이다. 사는 것도 팍팍한데, '수용소' 이야기 읽으면서 더 어두컴컴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은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미리 이야기해둔다.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의 창시자로 정신분석학자이고,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자' 이다.

저자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 들어온 수감자들을 통해서 건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본인의 경험이 진하게 묻어 있으니 완벽하게 객관적이기 힘들지만, 이것은 경험하지 않은 정신분석학자가 다루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문제이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저자의 말은 좀 놀랍다. 그 자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로 살아돌아온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을 뒤로 남긴채.. 당시의 수용소에서는 대략 스물여덟명 중에 한 명이 살아 돌아왔고, 누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상황이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강제 수용소', '죽음의 수용소'에 들어가서부터 해방후까지의 수감자들의 단계적 반응이고, 로고테라피에 대한 소개가 후에 덧붙여졌다. 독일어 원서 2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정신분석, 심리치료 기법을 몇십페이지로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알게 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공포'로 시작되는 수감자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은 극한상황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본성과 그럴수록 더욱 추구해야 하는 '의미' 를 이야기하고 있다. 리뷰에서는 그 과정을 일일히 적지는 않겠다. 워낙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심플하고 건조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요약이나 인용보다는 책을 읽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1부에서 이야기하는 극한 상황, 수용소에서의 수감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 찾기' 라 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의 중심이론이다. '로고테라피'의 로고스logos는 그리스어로 '의미'를 뜻한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2부에서는 로고테라피의 소개와 실례, 치료방법 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이 곧 '왜 사나'를어보는 것이고, 그 물음은 누구에게라도 가장 단순하고 어려운 문제인지라 이것은 심리치료보다 철학에 가까워보이기까지 한다.

워낙 개략적인 내용소개라 공부가 더 필요하겠지만, 이 소개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어떤 사건을 보는 패러다임을 전환함으로써 부정적 요소를 가지고 있던 '사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 정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다. 책에 나온 예를 하나 들어보면, 한 노신사가 아내가 죽은 후 삶이 너무 괴로와서 매일을 죽고 싶은 마음으로 보낸다며 찾아왔다. 노신사에게 묻기를 ' 아내가 먼저 죽었다면 어땠겠습니까?' '지금 제가 괴로워하는만큼 괴로워하고 있었겠군요.' ' 그러니, 아내를 보내고 남은 시간을 기쁘게 애도하며 보내십시요' 말은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이런식.

20세기(저자는 20세기라고 했지만, 21세기에도 변함없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대병인 실존적 공허는 인간이 겪은 두가지 손실에서 비롯된다. '동물적인 본능의 일면'과 근래에 겪고 있는 '전통의 와해'로 인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그런 의미에서 '실존적 공허'는 알게모르게 더욱 강화되어 개개인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없어도 상관없는 톱니바퀴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고,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마다 다르고, 로고테라피에서 어떻게 이 치료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예시로 든 몇가지 상담케이스만으로는 알기 힘들지만, 로고테라피에서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 를 찾는 일이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여기서 1번은 일을 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고, 2번에는 선善,진리,예술 등을 접하는 것이나 '경험'에 의해서, 그리고 사람을 만남으로써, 즉, 사랑을 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나는 드라마에서 '엄마랑 동생이랑 잘되는게 꿈이에요' 라는 신데렐라타입 소녀가장들을 볼 때마다 약간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누군가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도 '나'의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3번은 가장 어려운 일인데, 극한 상황에서도 비극에 슬퍼하고만 있고, 나가떨어지지 않고,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부분에 독자는 다시 1장에서 저자가 겪었던 '강제수용소' 에서의 시련을 떠올릴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수감자들의 심리를 관찰하였고(보통 사람이 겪기 힘든 극한의 시련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자식이 수용소에서 죽고, 정신적 자식으로 수용소에 품고 온 저작물마저 빼앗겼을 때 거의 삶의 의미를 잃을뻔했다고 하는데, 그 저작물을 다시 되새기면서 살아갈 의지를,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3번은 수용소같은 극한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고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 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누구라도 예의 1번,2번,3번을 적극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다.  

그리고, 3번에서 결정적으로 오늘날의 정신건강철학(혹은 미국의 심리학)과 유럽에서 만들어진 로고테라피의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고인이 된 조지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이디쓰 와이스코프 조웰슨은 로고테라피에 관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온 것이다."  
또 다른 논문에서 그녀는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고 하면서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시련에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있는 미국 문화의 잘못된 풍토를 바로 잡는 데에 로고테라피가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다.  

최근 크리스토퍼 레인의 <만들어진 우울증>이란 책을 읽었는데, 정상적인(정상적이었던)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병'의 딱지를 붙인 정신분석학회의 무리들과 얼씨구나 동조했던 언론과 제약회사들. 그들이 파는건 약이 아니라 돈이고, 거짓된 행복의 이미지이다. '모두가 늘 행복해야 하'는건 아니다. 거짓행복은 더욱 깊은 우울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로고테라피는 각종 알약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행복강박증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삶의 의미', '살아갈 의지'를 적극적으로 찾아나가게 하는 답이 아닌가 싶다.  

하루는 너무 길고, 일주일, 한달은 후딱 지나가는 것 같은 '변형된 시간감각'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태에서 수감자들이 느끼게 되는 증상 중에 하나라고 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이와 같은 실존적 공허에 빠져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괴로움을(혹은 무감각을) 느끼고 있다면, '왜 사는지' 원초적 질문을 자신에게 한 번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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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3-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읽었을 때 빅터 프랑클 아내의 생일날 수용소에서 그가 울었던 대목이 생각나네요. 제 기억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떠올릴 수 있다는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은 정말 와닿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