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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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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공격 이후 부시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원입대와 헌혈 대신 더 많이 소비할 것을 호소했다. 수천만 미국인들은 조기를 내걸고 조국을 위해 뭔가 하길 바랐지만, 몇 달 후 있었던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부시 대통령은 지역 봉사 활동에 매진하라고 제안했다. 

1960년대 미국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혼돈의 시대였다. 2차 대전 후 평화를 찾았지만 내부적으로 자유와 평등이 부재했고 빈민의 숫자는 늘어갔다. 당시 대통령이던 케네디의 선택은 ‘뉴 프런티어’였고 ‘평화봉사단’이 그 가치를 실천했다. ‘평화봉사단’의 대상은 빈곤에 허덕이는 민족들이었지만, 봉사단 창설은 케네디가 미국인들이 국가와 세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한 결과였다. 국가는 난관에 직면했을 때 더 이상 국민들에게 그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저자는 시민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재정과 군사 행정을 담당하며 중추적 역할을 했던 시민들은 이제 서비스를 받는 고객으로 탈바꿈했다. 행정력과 강제력 추출 능력을 제공하고 법적 권리, 연금, 투표권을 포함한 다양한 보상을 받던 시민들의 참여가 약화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 없이도 군대를 모으고 세금을 걷고 정책을 집행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의 정치 참여에 의지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미국에서는 60년 이상 투표율이 하락했다. 유권자 대중은 주변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경험은 집단적인 것이 아닌 개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어떠한 음모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미국 시민의 쇠퇴와 몰락의 책임을 물을 만한 특별히 반민주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찾기는 어렵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진행된 정치적 탈동원화의 이면에는 대개 좋은 의도, 민주적인 목적들도 있었다. 많은 경우 시민권의 쇠락은 정부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높이려는 노력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또한 정부와 경제가 더욱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만든 실천들도 시민권이 작동할 공간을 축소시켰다. 시민에 대한 정부의 의존이 약해졌다는 것이, 정부가 시민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정부는 새로운 조건에서 시민을 대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시민의 충성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으로 시작되었던 정치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대중이 필요 없게 된 새로운 시대의 정치는 어떠한가. 투표가 존재하는 한 정치의 권위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만들어진다. 과거 정치 엘리트들이 경쟁적으로 유권자들을 동원하면서, 투표율은 그 뒤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1980년대에 이르면 투표가 가능한 유권자들의 80퍼센트 정도가 대통령 선거 투표에 참여했고, 의회 중간선거 투표율도 70퍼센트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에고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조차 유권자(유권자 등록을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유권자 기준)의 절반 정도만이 간신히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한때 자기편이 되어 달라며 도움을 요청받았던 수많은 시민들은 이제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게 됐다.


오늘날에는 19세기 방식과는 달리, 어떤 정당도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는 수천만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미국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광고는 이미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 의사를 가진 중산층 미국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상정한다. 정교한 여론조사 기법은 후보자들이, 선거에 이미 관심을 가진 한정된 유권자 층을 대상으로 그들의 구미에 맞는 정치 광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투표 자격이 있는 6천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다. 엄청난 규모의 잠재적 유권자 층에 대해 정당들이 관심이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에게는 정치적으로 무력한 이들을 활성화해 정치적 균형 상태에 변화를 기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존의 유권자 층을 지키며 그들을 만족시키는 데 더욱 주력하고 있다.


최근 미국 주류 자유주의의 경향은 ‘탈물질주의’다. 이것은 특수 이익의 지저분한 난투극을 초월한 양, 허공에 붕 뜬 채로 삶의 질을 강화하는 데 시선을 둔다. 이때 많은 경우 경제적인 사안은 고려되지 않는다. 고래와 야생동물 보호에 찬성하고 동성애자 배척에는 반대한다. 나름의 고상한 명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풍족한 사람들의 명분이다. 한때 공장노동자, 빈곤층, 저학력 계층을 대변했던 민주당이 이제는 중상층의 교외 ‘사커맘’의 옹호자로 거듭나고 가난한 다수의 미국인들을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해 버리는 복지 개혁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대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정당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정치시대의 산물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선조인 제퍼슨주의자들과는 달리, 약자들을 풀뿌리 정치 운동에 참여시켜 그들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통치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시민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시민들 간의 약화된 유대와 정치 엘리트들과의 유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저자는 지금은 과녁이 너무 흩어져 있어 정확히 겨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서투른 제도적 보완 정도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사실 제도적 처방에 대한 선호 자체가 시민들을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제도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은, 공적 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개입 없이 공공복지를 제공하겠다는 식의 기계적 해결책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 편리함은 시민권의 본질적 특성을 은폐한다. 개인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필요를 정당화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집단 동원의 경험은 시민들이 공익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이해를 형성하도록 만든다. 


대중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정치적 통치의 대상에 불과했던 존재들이 공적 영역에서 정치 행위자가 되고 완전한 시민으로 진화해갔다. 공적 영역은 그들을 하나의 대중으로 만들었다. 역사에서 이런 발전이 시작된 지점이 있었듯이 끝도 있을 것임을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은 지금 눈앞에 있다. 어쩌면 대중이 조용히 정치에서 은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이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이려면 집단 동원에 의지하지 않고도 정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여전히 자신의 ‘고객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탈동원화의 과정은 중단될 수도 있다. 


개인민주주의는 그 체제를 내재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모순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마비에서 대중이 부활할 희망을 찾는 것이 그리 행복한 전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은 무력해지고 홀로 작동하는 정부가 공익에 기여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책을 마치며 남긴 그의 우려는 ‘머지않아 미국 정치에서 가장 절박하고도 걱정스러운 문제는 “알게 뭐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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