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3 - 4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29년의 우리 나라 풍경을 토지13권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어디로 가든지, 특히 소도시나 소읍 같은 곳은 거의가 다 그러한데, 양과점을 위시하여 담배 가게, 이발소, 목욕탕, 대개 그런 비슷한 업종은 일본인 경영이다 (10).

조선땅은 이제 조선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고 조선 물건만 사고 파는 곳이 아니며 우리 말만 사용되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메이지 캐러멜, 모리나가 밀크, 센베이 과자, 지쿠 (머릿기름), 활동사진관.

이제 토지의 무대도 경상남도 하동 평사리 최참판가 중심에서 벗어난지 오래. 간도도 이미 지나왔다. 서희가 간도에 머물다가 조선땅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새로이 정착한 곳인 진주와 서울이 주요 등장 무대가 되고 평사리는  이제 간간히 언급되는 정도이다.

토지13권 역시 큰 사건 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인생 역정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져가는 식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 진행은 서희가 조준구로부터 재산을 되찾은 후 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결말까지 아직 일곱 권이 남아 있으니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진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길상이 감옥에 있고, 환국과 윤국이 학생 신분이다 보니 이들에게 아직 변수가 기대되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날까? 13권에도 지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토지 처음부터 등장하던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고 여기에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더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인물들이 계속 더해지니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얘기거리는 계속 공급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일본의 영향이 조선의 꽤 하부적 일상까지 넓혀져 가고 있던 시기이니 만큼 일본과 조선의 문화 비교, 비평을 담은 내용들이 자주 나올 수 밖에 없고 이 권에는 특히 많이 나오는데 물론 등장 인물들의 토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이다.

우선 임명희를 좋아했지만 결국 시동생으로 남게 된 조찬하. 그가 일본인인 오가타 지로와 만난 자리에서 조선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 비평하는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오가타 지로는 조선의 미신, 민중 심리, 개인의 일방적인 희생 등을 예로 들며 조선의 문화를 감상주의로 보았다. 그 자리에서는 정리되지 못한 생각에 다 말 못하고 나중에 혼자된 다음 되돌려 생각하는 조찬하는 자신의 생각을 비로소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혼잣말을 한다. 일본 군국주의야말로 센티멘털리즘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할복자살하는 행위, 천황에 대한 만세를 부르며 쓰러지는 병사의 행위 등 민족적 자해의식을 미담으로 꾸미고 감상이라는 설탕을 발라서 그걸 먹고 자라는 것이 당신네 일본인이라고. 조선이 로맨티스트라고 하지만 실제로 로맨시스트는 일본인이고 조선은 예로부터 리얼리스트였었다고 생각하면서 리얼리즘에 접근했다고 알려져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 <겐지모노가타리>는 조선의 <삼국유사>의 세계에도 못미친다고 본다 (192,193쪽 참고).

일상적인 대화라고 보기엔 진지한 이런 조선과 일본에 대한 비평은 뒷부분에 또 나오는데, 388쪽에서 시작하여 392쪽까지 길게 이어지는 남천택의 비교적 신랄하고 직선적인 대사 속에서도 보여진다. 그는 당시 신흥지식인들을 서양의 사조에 대해 줏대 없이 휘둘리며 유행으로서 흉내나 내는 수준이라며 비판하고, 맥을 못추는 점에서는 일본과 조선이 크게 다르게 않다고 주장한다.

조찬하와 조용하 형제 사이의 대화 장면에서는 좀 더 일상적인 소재를 비교 대상으로 삼아 얘기하는데 의상과 색채에 있어서 일본을 딱정벌레, 조선을 나비, 학으로 비유했다. 건물의 형태에 대한 비교도 덧붙인다.

작가는 이런 내용을 위해 일부러 공부를 한 것일까 아니면 비교 문화, 문화 인류학적 식견이 원래 높았던 것일까.

 

"아예 친일파가 된다면 모를까 중간지대에서 어물쩍거리다 보면 해괴한 사회잡기나 쓰게 되지. 그 대표적 인물이 이 모 (李某) 아니겠나.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발붙일 곳이 없는 게 현실이라구." (395)

임명빈이 남천택에게 향후 계획을 물으며 한 말인데, ‘이 모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짐작이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뚜렷한 소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참으로 처신이 복잡했었을 시대이다.

중국의 통일, 공산화 가능성을 초조해하고 두려워하는 (그렇게 되면 확실히 중국이 일본의 우위에 서게 될 것이므로) 일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본이 과연 전쟁을 일으킬까 타진해보는 대목도 나온다. 그러면 우리 조선은 또 어떤 운명에 휘말리게 되는 것인지.

13권을 읽는 동안은 소설로서의 소소한 에피소드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비소설적 내용으로 담은 작가의 목소리가 더 귀에 눈에 들어왔다. 정작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지 벌써 잊어버려 리뷰 쓰며 다시 들춰서 확인해야 했다.

아마 다음 권 (14) 쯤에는 길상이 출옥하지 않을까. 그래도 서희와의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이들의 아들 환국과 윤국의 행보가 차라리 더 기대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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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2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토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가깝지도 그리고 멀지도 않은 시대 같아요.
근현대사에 해당되는 그 시대는 한국사에서 외울 것들이 많은 시기였던 것이 생각나네요.
‘이 모‘는 누구였을까요?
잘읽었습니다.
hnine님, 추운 날씨 따뜻하게 보내세요.^^

hnine 2018-12-13 16:45   좋아요 1 | URL
서울 다녀왔어요. 오늘 서울은 눈이 펑펑. 제가 사는 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래도 더 북쪽은 북쪽인지 더 추워요.
토지 13권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말. 거의 백년 전이죠. 학교에서 국사 수업을 들으면서는 그 시대를 궁금해하고 상상해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문학 작품을 읽는 동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상상을 하며 읽게 돼요. 더 재미있죠.
이 모 씨는 그냥 상상만 해보는 것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