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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출간 전부터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이 내게 특별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80년 5월 광주'라는 소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 문학사에서 희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 작가들이 저마다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역사적 증언에 힘을 보탰고, 그 행위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깊은 울림을 가진 메시지로 전달되어 왔을 테니 말이다. <소년이 온다>를 기대한 이유는 순전히 한강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품 전부를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어본 그녀의 장편 단편 소설, 시집 등을 떠올렸을 때 이상하게도 그녀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한강 소설가는 내게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의 영역에 깊이 침투해 감각적이고 섬세한 문장으로 표현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강 소설가라면 먼저 5월 광주에 쓴 작가들처럼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를 수집한 후 신중하게 글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실적 글쓰기와 감각적 재능을 어떤 식으로 분배하여 한강만의 작품으로 소화시킬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얇은 종이 사이로 선연하게 그녀의 슬픈 표정이 비치는 것만 같았는데, 이번 소설에서도 그러할까?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소설이 역사적 진실을 담아낼 때는 더욱 그러하다. 모니터 속 하얀 페이지가 작가 자신의 상상력과 예술적 역량을 맘껏 펼치는 곳이 되기 이전에 사건 인식과 판단의 문제, 진실에 대한 추구, 집요함 등 의식적인 부분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학은 궁극적으로 언어 예술이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소년이 온다>의 몇 장은 작가의 문장은 전 작품들 보다 훨씬 물기 없이 단단해진 느낌을 받는다. "나의 목소리를 되도록이면 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생각날 정도로, 작가는 주관적인 감상을 배제시켰다. 사건과 인물에 깊이를 담고, 실제 일어난 일들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직접' 생각하고 '느끼도록' 유도했다. 어떤 부분은 심연을 떠도는 것처럼 불투명하고 감정적인 카오스를 마주하는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불쑥 틈입하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문장들 (잔혹한 고문과 폭행의 장면 등)
때문에 이것이 '허구'가 아닌 '진실'임을 환기시킨다. 적확한 문장들, 그 아름다움에 목이 메는 것은 독자인 우리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평온한 시기가 오기 이전, 누군가는 삶을 송두리째 도둑 맞았음을 말이다.
소설은 단지 '집단'만을 탓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들에게 죄를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본다. 도대체 이 세계, 이 세계를 장악하는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근본은 대체 무엇이길래 80년 광주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왜 이 비극은 끝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인간은, 근복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p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의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4
그들이 원래부터 '대단한 존재'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완벽하게 여문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하여 가해자의 위치에 서고, 침묵하는 존재들과는 다른 '예외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양심'을 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그 외침 안에서 당당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학살의 주범의 역할을 도맡은 인간이 있는 반면에, 똑같은 상황이 주어졌어도 전혀 다른 행동으로 가슴 속 '깨끗한 무엇'을 발현시킨 인간 또한 존재했다는 희망 말이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막연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끊임없이 벌어지는 세계의 다양한 비극 앞에서 인간에 대한 증오와 회의를 더욱 견고하게 다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고, 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더 이상 낙관적인 바보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우리는 이 무력 앞에서 거짓의 단어가 된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 가야 할 것이다. 잊지 않는 것이 시작이 될 것이다. 소설은 말하고 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