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8
장석준 지음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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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1월 신년호

 

 

사회주의-역사 속 가능성의 퍼즐 맞추기

 

양솔규 노동당 기획조정실 국장

 

사회주의/ 장석준 / 책세상 / 201311/ 9,500

 

퍼즐을 맞춰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행의 우여곡절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선택과 실수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마는 속수무책의 과정을 반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실마리를 잡으면 순식간에 진도를 빼기도 한다. 이러한 우연한 발견의 쾌감, 그리고 잘못된 선택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정합의 실루엣이 퍼즐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퍼즐조차도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할진대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라는 저 도저한 흐름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역사의 방향은 어떤 선택과정을 통해 채택되는가? 단지 우리에게 경로의존성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조건에 구속된(것으로 상정되는) 현재의 선택을 단순하게 승인하는 역할만 부여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채택하며, 실현해야만 할까?

노동당은 지난 623일 정기당대회를 통해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 <노동당 선언>에 따르면 노동당은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소수자 운동과 결합된 사회주의를 천명하고, “평등·생태·평화 공화국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령에서 말하는 사회주의가 어떤 역사적 경험과 지적 반성을 거쳐서 도출된 개념인지, 80~90년대 수없이 외쳤던 슬로건으로서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고 같은지 짧은 당 강령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말하자면 강령 형성의 이해 수준은 울퉁불퉁하기에 복기 과정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당 강령 작성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하나인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의 지적 작업을 들여다봄으로써 당 강령 형성의 맥락에 한발 다가갈 수 있다. 장석준 부대표는 올해 여름 <적록서재>(뿌리와이파리)를 통해 자신의 지적 행보를 일별한 바 있다. 그리고 11월 마지막 날, 자신의 지적 자원을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개념을 통해 버무렸다.

그러나 개념을 정리하는 작업은 수많은 논쟁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견(異見) 없는 개념이란 없다. 언어적 개념이 지칭하는 역사적 내용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정의의 대상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해석의 대상이다. 해석에는 왕도가 없으며, 정통도 없다. ‘정통을 뒷받침하는 권위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개념을 단단한 실재로 바라보기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품은 언어적 구성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베가 받아들이는 민주화의 개념과, 이른바 386 세대가 받아들이는 민주화의 개념이 다르며, 19세기의 사회민주주의20세기 후반 사회민주주의는 다른 파장과 깊이를 간직하고 있듯이 말이다.

 

장석준은 170여 쪽에 불과한 짤막한 입문서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의 중간결산을 시도한다. 프랑스 혁명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운동으로 사회주의를 발견(?)했다. 당시의 사회주의란 E.O.라이트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회중심 사회주의였다.

당시의 사회는 그러나 자본주도의 문명이 아직 만개한 사회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문명 탐색은 자본주의 문명 이후에나 가능한 시계열적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고, ‘자본주의 문명대신에 선택 가능한 근대 문명의 또 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 사회주의의 종합을 시도한 맑스와 엥겔스의 시대는 자본주의 대승리의 시대였다. 증대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불평등의 원천이 아니라 해방의 힘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맑스, 엥겔스의 사상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정리되었고, 역사유물론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운명에 결박시켰다. 1917년 혁명을 통해 등장한 국가사회주의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궁극적 성취에 이르러야 하는 체제가 되었다.

 

물론 맑스에게 그러한 혐의를 과도하게 소급해 씌울 필요는 없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맑스에게도 사회주의에서의 사회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는 하나의 과제였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는 협동조합적 생산을 코뮌주의의 구성요소로 제시하기도 했다. 맑스 뿐만이 아니다. 레닌도 말년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제는 주민을 협동조합 결사체로 조직하는 것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람시의 평의회 운동 역시 자본을 대체할 사회적 실체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 = 사회라는 공식은 도그마일 뿐이다. 장석준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의 입을 빌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계승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 문명 전체의 치유전환그리고 새 출발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정식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실체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지구적 생태위기가 단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인류문명 자체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는 지금, ‘사회(주의)’의 목표는 경제적 성장이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합리성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멈퍼드와 일리치의 역동적 균형’(멈퍼드)다중 균형’(일리치)이 사회주의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목표에 풍부한 거름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중심) 사회주의를 실체화하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할 주체는 누구인가? 저자는 현실의 노동자 계급을 자동적으로해방의 주체로 상정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의 주체로 바라본 까닭은 기존 사회의 이해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자유’” 때문이지, 생산력 증대를 담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당한 노동자계급이 아니었다. 체제에 결박당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중들 스스로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기로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며, 결단을 실천할 주체가 없다면 발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과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쿠바혁명,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색 등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국가사회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운동들에 대한 검토, 자본주의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추구한 스웨덴 임노동자기금 모델, 영국과 프랑스 등의 구조개혁 노선에 대한 검토, 앙드레 고르, G.D.H.콜 등 수많은 현대 사회사상가들의 상상력 충만한 이론들에 대한 검토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재료였다. 사회주의 역사를 다시 반추하면서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환기하는 것, 가능성을 조각모음 해 새로운 퍼즐로 조합하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새 출발에 필수적이다.

 

개념은 무엇보다 해석의 대상이며,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개개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다양한 사유들, 검토 가능한 모든 역사적 운동들을 가지고 우리는 더 많은 사회주의 퍼즐 조합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문명의 등장에는 더 많은 자양분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당 강령도,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개념도 더 많은 해석과 논의, 그리고 실천을 필요로 한다. 도약하자! 그리고 사유하자!

 

<더 읽을만한 책>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 2009/ 38,000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생각의나무 / 앙드레 고르 / 2011/ 15,000

적록서재/ 장석준 / 뿌리와이파리 / 2013/ 1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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