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돌아왔다. 4년에 한 번, 역일과 계절을 맞추기 위해 선물처럼 주어지는 하루. 사실 말이 좋아 선물같은 하루지,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했다. 특별한 하루, 뜻깊은 하루. 그런데 나는 4년 전의 2월 29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 역시 특별한 하루, 뜻깊은 하루라는 의미가 부여됐을 것이고 어쩌면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말랑말랑한 감성이었을테니 뭔가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억에 나지 않는 것이다. 내 나이 26에 주어졌던 그 하루는 추억도 남기지 않았고 기억 속에서도 이미 사라져 버렸다. 내가 34살이 되었을 때도 그럴 것이다. 또 사람들은 특별한 하루, 뜻깊은 하루라며 그 날에 의미를 부여할테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살며 4년 전의 이 날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며 또 나의 기억이 아닌 시대를 탓할 것이다. 시대가 각박해서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그래야 오늘을 살 수 있을테니까. 뭐 이런 개똥철학을 늘어놓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어쩌면 34살의 내가 떠올리는 30살의 2월 29일에는 추억이 된 기억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4년에 한 번 돌아 온 그 날, 내겐 즐거운 일이 생겼으니까.

     그 즐거운 일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김경주 시인에 대해 말하고 싶다. 사실 이 날 열리는 김경주 시인의 북콘서트에 나는 신청을 해 두었었다. 김경주 시인이 낸 두번째 산문집 「밀어」를 읽으며 김경주 시인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김경주 시인은 모르겠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내가 만들어 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인정해줬던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그와 내가 나누었던 대화 중 흘러나온 김경주 시인의 시와 산문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패스포트」의 여운이 다 가시기 전이었고 나는 여전히 그렇듯 한 권의 책의 여운에서 빠져나오기 전까진 그 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시보다 산문이 더 좋았다는 내 말에 그는 공감해주었고 내가 가진 문학에의 애정을 인정해 줬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경주 시인에 대한 내 애정이 더 깊어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두번째 산문집이 나왔고 어려운 사유 속에서 빛나는 문장과 단어의 수려함은 깊어졌다. 그런 텍스트를 보며 작가가 궁금했고 작가가 보고 싶었다. 북콘서트를 신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문장을 봤고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하필이면 같은 날 같은 시간.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김경주 시인의 북콘서트 신청 메시지를 삭제했다. 이럴 때보면 내 머리보다는 내 감각이 훨씬 발달되어 있는 것 같다. '김성중,' '정용준' 두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가고 싶은 이유는 확실했고 독자와 마주보고 앉다!라는 그 카피 역시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사실, 문학과 지성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며 꿈꾸는 출판사이기도 했으니 그 실체를 살짝 들여다 보고 싶은 것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젊은 작가는 내가 지킨다는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착각도 그 선택의 이면엔 존재했을 것이다.

 

      그 날이 돌아왔고 그 날은 그 날이었다. 돌아온 그 날은 4년에 한 번 오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기도 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기도 했지만, 내 평생 처음 하는 경험이 들어있는 날이기도 했다. 두개의 신청페이지에서 확인한 참석인원은 대략 15명 정도. 독자 15명에 작가 5명이라니. 이런 1:3의 비율의 낭독회에 내가 또 언제 참가해 볼 수 있을까. 이건 분명 멋진 선택이었고 멋진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문지는 내가 꿈꾸는 회사가 맞았고 작가들은 멋있었다. 소규모지만 합정, 홍대 일대에선 꽤 유명한 북카페에서 진행 된 행사는 처음부터 감동이었다. 그동안 이곳저곳의 작가와의 만남, 북콘서트 등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소규모의 인원으로 정성껏 진행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소한 먹을 거리, 글맛을 돋우는 최고의 파트너 맥주 한 잔 모든 것이 참석한 독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서효인 시인의 사회로 행사 진행은 매끄러웠다. 여성 작가 3분과 함께 하는 1부, 남성 작가 2분과 함께 하는 2부의 낭독회와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텍스트로 읽는 글맛과 작가가 직접 읽는 글맛은 역시 오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시간, 이런 분위기, 문학과 함께 주어지는 최고의 이벤트가 틀림없었다.

 

      행사가 끝이났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려는 내게 들리는 한 마디. 작가들과 함께 하는 맥주 타임 (물론 표현은 이렇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술을 잠시 멀리해야 했을 때지만 어디! 이런 기회를! 1주일 금주는 그 날 막을 내렸고, 내 앞에는 정용준 작가가 오른쪽 옆에는 임수현 작가가 앉아있었다. 아, 이런 벅참, 이런 훈남 작가들 사이의 나는 두근거려도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곧 내게 단편 하나로 큰 임펙트를 안겨주었던 김성중 작가가 옆 자리로 왔고 그녀는 정말, 그녀의 단편만큼이나 멋진 입담과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서 우아함을 뽐내며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들을 짚어주던 김선재 작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란. 윤보인 작가와는 거리도 좀 있었고 작가님이 일찍 자리를 뜨는 바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잠시의 만남에서 그녀에게 들은 궁금증은 저 여린 몸과 목소리의 어디에 그런 날카로운 글들이 숨어 있는지였다. 다음엔 꼭 알려주시길!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돌아온 그 날에 존재했다. 이러니 나의 34살 그 날에는 기억할만한 4년 전의 그 날이 있을 것이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헤어지는 순간 손을 꼭 잡아주던 김성중 작가의 작고 차갑던 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손이 있어서, 그 손으로 쓰는 글들을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어서, 한국 문학 새로운 작가들을 계속계속 기다리고 찾아보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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