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공연제목 :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ㅁ 공연일자 : 2011년 03월 05일 Sat 오후 3시 다소 쌀쌀했으나 돌아다니기 좋음
ㅁ 공연장소 : 혜화 대학로극장
ㅁ 캐스팅 : 노인役정재진 청년役박상협
초등학교 시절, 놀이방에 가득 꽂혀 있는 책 중에는 항상 '세계명작전집'이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만하고 똑똑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마냥 놀고 있던 다른 친구들이라는 것을 '다르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세계명작전집을 하나씩 빼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세계명작이란 것은 그때, 가장 '빨리 섭렵해야할 똑똑함의 증거'였을 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빛의 속도로 읽어간 그 책은 나에게 지루함과 다소 '어이없는 결말'로 이루어진 소설이었을 뿐이었다. 기억나는 건 마지막의 '사자꿈'뿐. 그것도 왠 사자꿈?! 뭐 이런 애매한 결말이 다 있어! 하고 책을 덮었던 기억뿐.
십년도 훨씬 지난 지금, 또 그 '명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오만함'과 작은 호기심으로 연극을 보게 되었다. 지금 이 연극을 본다는 것은 새 책을 보는 것이랑 똑같은 느낌이었다. <노인과 바다>에 대해 완전히 비워져버린 머리로, 나는 대학로극장을 향했다.
< 노인과 바다 티켓과 홍보책자, 그리고 브로마이드 / 디자인이 너무 맘에 든 :) >
이 이야기 속에는 두명의 인물만이 나온다. 이야기가 너무 가벼워지지 않도록 중심축을 꽉 누르고 있는 노인,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주고,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보조역의 청년. 청년은,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는 노인을 보며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해대는 노인을 제대로 바라봐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오는 노인의 어깨는 여전히 굳건하다. 돛을 정리하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엔, 사람들의 비난의 무게도,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어떤 자책감의 무게도 얹혀 있지 않다. 그저 그는, "내일 고기를 잡지 못하면 85일째군. 하지만 85는 좋은 숫자야."라고 되뇌인다. 그 대사를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자기최면을 거는 그런 억지스러운 결의라거나, 혹은 스스로를 비웃는 자조의 음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내일의 일을 준비하며, 오늘의 일과를 마치는 한명의 인간'이 있을 뿐. 그렇게 노인의 하루가 지난다.
다음날도 노인은 묵묵히 돛을 정리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청년의 전송을 받으며 먼 바다로 나아간다. 정어리를 꿰어 바다 먼 곳으로 던진 노인은 갈매기와 스스로에게 말을 하며 시간과 싸운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끝도 없이 흘러간다.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그저 무자비할 뿐인 바다에 둘러싸여서, 그는 물통 하나로 시간을 버틴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고기가 그의 미끼를 문 것이다. 노인은 몇시간동안 그 고기와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고기는 노인에게 쉽게 져주려 하지 않는다. 아주 거대한 물고기다! 노인은 수십년 동안의 경험으로 직감한다. 고기는 노인에게 끌려오지 않고, 오히려 노인을 끌고 더 먼 바다로 나아간다. 하지만 노인도 고기를 놓지 않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밤이 지나고, 이틀밤이 지난다. 그리고 노인의 배 주위를 빙빙돌던 그 거대한 물고기는 드디어 수면 위로 펄쩍, 뛰어오른다. 노련한 노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짧고, 투박한 작살로 그는 고기에게 급소를 찌르고, 그의 작은 배만한 거대한 청새치를 바라보며 기뻐한다. "지난 84일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던 것은, 이 고기를 잡기 위해서였던거야!" 그의 인고의 노력이 드디어 보상받았던 것이다. 그는 돛을 매달고 자신의 마을로 순풍순풍 나아간다.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그 고기의 냄새를 맡은 포악한 상어 한마리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의 인고의 노력을 가차없이 물어뜯는다.
상어는 가까스로 물리쳤지만, 그의 전리품은 이미 손상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손상된 전리품의 달콤한 향기를 맡은 약탈자들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노력은 그렇게, 헛되이 무無로 돌아가버린다. 노인은 탄식한다. 85일, 아니 87일의 노력이 다시 또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는 고개를 든다. 그리고 형형한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스스로 절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에 패배당하는 것이지. 하지만 난 절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먼 항해를 마친 그는, 여느때나 그랬던 것처럼 돛을 소중하게 접어 두 어깨에 걸고, 언제나 그랬듯 단단한 두 어깨로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른다. 오르는 길에 몇번이나 무릎을 꿇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돛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지친몸을 누이고 잠에 든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의 젊은 시절 보았었던 아프리카의 사자 꿈을 꾼다.
< 노인의 배, 그리고 그의 승리의 흔적 >
+ 청새치의 피를 표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진을 가만히 보고있자니 노인의 승리를 축하하며 선물한 헌화獻花란 느낌이 든다.
연극이 중반부로 치달으면서야 알게되었다. 아아, 내가 그때 이걸 읽고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거였구나. 난 그때 '본능에 충실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인생에서의 실패라든가, 오랫동안 공들인 것에 대한 결과와 그 좌절에 대해서 알기엔 너무 어렸다. 그러고나니 '세계명작전집'이라는 것이 과연,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인가에 대한 의심을 들기 시작했다. 이 책을 '세계명작'으로 추천한 사람들은 분명 '어른'들일 것이었다. 인생에서 쓰디쓴 패배에 좌절한, 그리고 극복한 수많은 어른들이 이 '위대한 인간의 의지'에 찬사를 보낸 것일 게다. 어른을 위한 소설. 도대체 누가 이런걸 아무것도 모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거야!
그리고 인생의 단맛쓴맛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 이 나이에야, 노인의 '의지'에 대한 위대함과 '아프리카 사자 꿈'을 통한 전율을 온 몸으로 느꼈 수 있었다. 왜 굳이 마지믹 장면이 '아프리카 사자 꿈'이었는지. 왜 아프리카 사자꿈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그 흔들림없는 완결성에 대한 전율. 그리고 곧, 삼일 밤낮의 전리품을 놓치고 나서도 흐트러진 모습 없이 묵묵히 돛을 정리하고 집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씩씩하고 굳건한 두 어깨에서 온몸으로 오르는 감동으로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숨을 참아야 했다. 그가 너무나 무력한 늙은이었기에, 정말 그 거대한 바다 앞에선 작고 무력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더욱 위대해보였다.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통한 인간의 위대함'의 역설을 온몸으로 체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내린 후, 팔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면서, '패배'라는 어떤 개념이 내 마음 속에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패배'라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눌려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저 '패배'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패배감'이라는 순간적인 감정에서 '진'것일 뿐이었구나. 난 왜이렇게 어리석었을까. 그렇게 잠시 되씹고 나니, 결국 그 노인은 세번이나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거대한 물고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승리는 '패배감'와의 싸움속에서 얻은 승리였던 것이다.
그 세계명작을, 왜 세계명작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 극단 앙상블에 감사한다. 뚝심있게 중심축을 잡고 묵묵히 지키며, 정말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해주신 노인역의 정재진님과, 극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인의 주위를 맴돌며, 관객들을 웃게 해 주신, 그리고 온 몸을 던지며 열연해주신 청년역의 박상협 님께도 감사드린다. (박상협님 상어와 노인과의 사투와 소용돌이 씬 찍을 때 너무 안타까웠어요ㅠㅠ 무대연출이나 각색은 훌륭한데 너무 온몸을 던져서 나중에 말을 못이으실때 너무ㅠㅠ) 그리고 각색과 연출을 하신 김진만님, 너무 대단하신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 지루한 책을 이렇게 생동감있고 재밋게 만드실 수가 있어요! 앞으로의 행보가 너무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무대 시작하기 전, 그리고 무대를 진행하면서 날라다니셨을 모든 스태프분들. 여기 관객 하나 엄청난 감동 얻고 갑니다. 너무 감사드려요 짝짝짝!
+ 뱀발
약간 아쉬운 게 있다면, 고기를 잡는 순간의 조명이다. 이건 보러 가기 전에 다른 분의 블로그에서도 본 건데,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그 한 부분이 너무 심하게 튕겨져 나왔달까. 야광등이 켜지고 청년이 청새치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모습까지는 훌륭했는데, 잡는 순간의 격동적인 모습을 조명으로 표현하려고 하려고 한 것 같긴 한데 아쉬웠다. 온 신경으로 한명과 한마리의 싸움에 집중했다가, 화면이 적나라하게 밝아지는 순간, 한마리와 '그것을 들고 있는 한명'과 그리고 한명의 싸움의 되어버린 느낌, 그리고 나니 집중이 순간 확 분산되는 느낌이었다. 이 부분만 개선한다면 내가 보기엔 거의 완벽한 극이 될듯^^ 앞으로도 롱런하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훌륭한 메시지를 끝없이 전해줄 수 있는 전도극(?)이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