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리영희 프리즘> 저자 행사에서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리영희 선생의 종교관? 리영희 선생을 통해, 종교 철학을 이야기 한 <리영희 프리즘> 공동저자 이찬수 선생을 만나보려고? 아니면, 무료한 토요일 저녁을 알차게 보낼 만한 적당한 교양 프로그램이라 생각해서? 
사실, 지금 생각하려니 기억이 안 난다. 모두 맞는 것 같기도 하면서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어찌됐든,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리영희 프리즘> 저자행사를 지난 토요일 저녁에 다녀왔다. 앞서 말한 복합적인 이유. 정확히 말하자면 분명한 목적의식 없는 저자행사 참관.  그러니까 '별 기대 안 하고 갔다.' 이 말인 거다.

4월의 첫째 주 토요일 저녁 7시.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들어선 홍대의 인문 숲 빌딩 4층에선 도서출판[사계절] 관계자 분들이 어색한 듯, 반갑게 <리영희 프리즘>의 독자들을 한 명 한 명 맞아 주었다. 오랫만에 참여한 문화행사에서 출판사 관계자들의 소박한 환대를 받으니 예상치 못한 기쁨이 샘솟는다. 아담한 강연 공간의 휴게실에서 쿠키와 커피를 먹으면서 나와 같은 혹은 다른 이유로 함께 자리하기 위해 속속 들어오는 오늘의 동료들을 슬쩍 훔쳐보며 나름 버퍼링~'소중한 토요일 오후 시간을 투자했으니 무조건 즐거워야 해...'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오늘의 강연자 <리영희 프리즘> 저자 중 한 명인 이찬수 선생님 입장.
작은 공간이지만 비디오 촬영도 하고 처음부터 진지한 분위기에 조심 조심 뒷자리에 앉았다.
"앞자리가 비어 있으니 조금 늦게 오시는 분들을 위해 뒤에 앉아 계신 분들은 앞으로 옮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사 담당자의 부탁에 쭈뼛거리며 맨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들어오신 이찬수 선생님의 인사로 시작한 저자행사는 이찬수 선생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존재란 무엇일까요? 용감하게 맨 앞에 앉아계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엄태형님.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언제 처음 생겼다고 생각하세요?" 
부끄러워 맨 뒷자리 앉았다가, 앞자리가 비어있어서 끌려나간 비겁한 나로서는 '용감하다'라는 의외의 칭찬에 적극적으로 대답을 했다.
"지금이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생각을 한 순간부터입니다." "오~ 인식론적 존재론이군요(^^). 그럼 생물학적인 존재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시나요?"
선방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물으신다. '이찬수 선생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으신 게로군~' 생각을 하며 다시 대답.
"아부지~ 어무니~ 생물학적으로 만나신 그 날......이요"(웃음)  
이 때 직감했다. 오늘 즐거울 거라고, 잘 왔다고 말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의 이찬수 선생은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강의를 하던 신학교에서 해직을 당했다고 한다. 근본주의적 한국 기독교의 행태보다 오히려 교회당에 다니지 않았던 리영희 선생이 그리스도적 삶의 실천가라고 말씀하시는 강연을 들으며 나는 '반가움' 이라는 말로밖에 표현 할수 없는 물질이 내 몸속에 생겨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학식과 연륜이 미천한 '나'이지만 '이찬수 선생님은 나랑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동류감을 느끼며 나는 두 시간 여의 강의를 들었다. 분명, 이찬수 선생은 강대에 있었고 나는 걸상에 앉아 듣고만 있었다. 사실적인 상황은 두 시간여의 강연을 들고 온 게 맞지만, 난 대화를 한 듯한 기분이었다.. 여러 저자행사를 쫓아 다녔는데 그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랬다. 온전한 시간이었다.
 
저자 행사 중 이찬수 선생은 교회 사역을 하시는 목회자이기도 하다는 소개를 듣고 묻고 싶은 질문이 마구 생겨버렸다.
'선생님 목회하시는 교회 어디에 있나요?'
'(현실)교회해체를 주창하시는 선생님은 전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선생님 교회도 전도를 하시나요?' (이 질문은 다른 분이 해주셔서 궁금이 풀렸음^^)  
'저는 유럽식 기독교가 우리나라 기독교의 나아갈 방향이라 생각을 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오는 질문을 하지 못한 건 여느날처럼 용감하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이  날만은 이미 용감자(者)로 인정을 받은 터였기에 질문에 앞서 했던 고민은, 묻고 싶은 여러 개의 질문 중  '어떤 질문을 해야 함께 자리한 청중들이 야무지게 질문했다고 생각할까?'(왠 의식) 하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뜸을 들이는 동안 정말 용감한 다른 분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기가 죽어 본래의 비겁자가 되어 버렸다.ㅜㅜ  다들 어찌 그리 질문이 날카롭고, 내가 묻고 싶었던 걸 다 물어봐 주시는지....정말 야무진 질문이란 어떤 건가를 확인한 자리였다.(질문 안 하기 잘했다) 

질의응답 시간 이후 생각해본 것. (질문. Q, ?)
우리는 보통 내가 몰라 답을 구하려 할 때 질문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제의 질문시간을 생각해 보건대 질문자는 스스로 답을 정해 놓고 상대방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 혹은, '어이! 똑똑한 당신. 어디 한번 맞춰봐?' 하며 테스트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찬수 선생이 이야기한 '소통의 도구'는 대화였다. 대할 대, 이야기할 화,. 對話
균형을 맞춘다는 것. 이찬수 선생이 이야기한 리영희 선생의 종교관이 그것이기도 했다.
책 속 리영희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시원하게 하늘을 나는 하늘의 새들을 보라.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의 크기와 모양과 힘이 꼭 같다. 우리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우右와 좌左는 동격이고 동등하고 평등한 것이다. 서로 보완적이고 보강적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그런 관계가 아니다. 둘이 함께 동시에 있어야 인간 사회는 안전하게 진보할 수 있다. 새는 좌와 우의 두 날개로 난다.-<리영희 프리즘>103쪽-   
   

균형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는 균형을 위한 최고의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대화 중에 균열이 생길지라도 대화는 균형을 이뤄가는 최고의, 최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권의의 눈높이를 낮췄기에 가능했던, 그로 인해 더 없이 좋았고 조금은 살벌했던 그 날의 대화.
정말이지 똑똑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자리 같았던 토요일 밤의 대화.
억지 끼워맞춤이라 할지 몰라도 나는 그게 서로 균형을 맞춰가는 노력이라 생각한다. 거창한 이념 , 종교 말고도 우리는 이웃과 친구와도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찬수 선생도, 리영희 선생도 답을 미리 알고 대중을 계몽하려는 전도자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일 뿐, 다만 그 길을 먼저 간 선배라는 것. 그러한 우리가 모이는 곳이 교회(에클레시아)라는 것을 이찬수 선생은 이야기하려 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한韓 사상
우리 말 한 이라는 글자에는 하나, 크다, 넓다, 전체, 아우르다, 라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사상의 표시 글인 韓은 한자를 차용해 표현한 임의 표기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를 일컫는 표기 이상의 의미를 읽지 못하고 있다. 문자의 틀에 갇힌 이제는 무의미해진 소중한 의미들.
'교리 속에 갇힌 한국 기독교인들도 이 같은 모습이다.' 라고 이찬수 선생은 이야기했던 것 같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임의적 규칙(율법,교리)들은 함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도구였지만 이제는 목적이 되어 버린 교리에 갇힌 한국 기독교. 극단적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현실 교회 해제라는 극단의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는 슬픈 목사 이찬수 선생.
교리 속에 갇힌 세속 교회의 눈에, 불상에 절을 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찬수 선생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당당한 종교 다원주의자를 또 한 명 알게 된 그 날의 모임에서 내가 얻어 온 것은 용기였다. 

"이찬수 선생님, 우리 그 날 대화한 거 맞지요? 그저 바라보며 묵묵히 듣기만 했지만 그 날 선생님의 말씀은 독백獨白이 아닌, 함께 소통했던 대화였던 거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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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뎀북스 2012-03-2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태형님
아트앤스타디 <리영희 프리즘> 강의 때 맨 앞에 앉아계셨던 분...
지금 얼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제 질문에 좋은 답으로 분위기를 화사하게 해주신 기억은 납니다.
다정하고 깊은 소감을 올려주셨네요.
전에도 읽었었는데, 그 때는 시간적 이유로 미처 답을 달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 오늘 유난히 저를 당시 강의장으로 데려다 주시네요.
감사한 마음에 다녀간 흔적을 남깁니다.
리영희 선생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이 늘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는지요?
연이 닿으면 언젠가 만날 때도 오겠지요.
그 때를 떠올리며...
이찬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