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구원이란 게 없으니까, 도스또옙스키는 사기예요.”

‘도스또옙스키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연극 <루시드 드림>의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이 작품의 도스또옙스키 다시 읽기는 구원을 믿을 수 없는 현대 사회에 어울려 보인다.

작품은 도스또옙스키의 <죄와 벌>을 모방한 범죄를 일으킨 용의자와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이야기가 핵심을 이룬다.

도스또옙스키가 소설 속에서 그리는 인물에게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다. <루시드 드림> 또한 도스또옙스키의 선과 악의 경계의 모호함을 보여 준다.

나아가 이 작품은 환상과 현실의 구분마저 어렵게 만든다. 살인 용의자는 “난 변호사님의 거울이죠.”라고 말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누가 변호사이고, 누가 살인 용의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죄와 벌>의 살인자 ‘라스꼴리니코프’의 역할을 용의자와 변호사가 다 맡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는 <죄와 벌>의 문제의식을 더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죄와 벌>에서 구원의 역할을 맡는 ‘쏘냐’는? 물론 비슷한 역할이 있다. 바로 변호사의 아내다. 그러나 <루시드 드림>은 변호사의 아내에게 쏘냐와 같은 구원자의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이 작품은 오히려 구원이란 없다고 말한다.

<루시드 드림>은 도스또옙스키의 <죄와 벌>보다 우리를 더 황량한 곳으로 데려간다. 그리곤 실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만든다. ‘텅 빈 도로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신호등도, 차선도,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도로 위에서 말이다.

<루시드 드림>은 도스또옙스키의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간다. 그렇게 <루시드 드림>만의 ‘재미’를 만든다.

훌륭한 공연을 본 한 관객으로서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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