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7월2일, 오랜 알라디너인 그녀의 ‘동반1인’ 자격으로 웅진싱크빅 사옥 지하카페에서 진행된 <타워> 출간 기념 이벤트에 다녀왔다. 그녀는 내가 직장 밖에서도 만나는 유일한 동료이자 책을 나눠 읽는 북-메이트로, 일상에서 휴머니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활동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서 휴머니스트로 살아가기란 정말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30~35세 남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에게 이 연령대의 남성은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가 있을 뿐이었고, 결혼하지 않은 자의 경우 멀쩡한 사지, 생계유지 수단의 확보 여부, 조선일보 구독 여부, 본인(당연 비개신교도)을 제외한 직계존/비속 중 개신교도의 비율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러한 연유로 해당 남성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요컨대 그녀의 이번 이벤트 참가 목적은 ‘사지 멀쩡한 32세 남성 작가’에 대한 예비 타당성 검사였고, 물론 그녀는 이미 초등학생 딸을 둔 엄마이기 때문에, 이런 기행의 원인은 ‘나’였다.          

2.   행사시작 10분 전에 도착한 배명훈 씨는, 2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통해 막연하게 그려놓았던 ‘나의 배명훈 씨’를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너무나도 멀쩡한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 멀쩡한 남자가 <다이어트>,<초록연필>,<냉방노조 진압작전>의 저작권자라는 셈인데, 도무지 승복할 수 없었던 나는 급기야 그의 소설 <스윙바이> 마저 떠올렸다. 정말이지 그는 SF 버전으로 튜닝된 ‘스크라이버(scriber)’라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3.   간단한 소개와 함께 시작된 <작가와의 대화>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를 훌륭하게 소화해 낸 배명훈 씨의 1인2역 모노드라마였다. 약 1시간 정도 진행된 인터뷰에서 몇 가지만 정리해 본다면, 
 # 배명훈 첫 소설집 <타워> 
    지상 최대 마천루 빈스토크(Beanstalk)를 배경으로 한 6편의 연작소설 속 사람들은  모두 털면 먼지가 난다. 불의를 보면 꾹 참고 앞에서는 굽실거리다 뒤에서는 욕하고, 타인에겐 엄격하면서도 자신에겐 관대한 사람들. 한마디로 소심한 소시민들의 일상을 담고 싶었단다. 
    일상의 감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그는, 빈스토크를 굳이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한정하진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뜻이겠지만, 혹시 보신을 위한 발뺌은 아닌가, 는 혐의도 걸어본다.   
# 앗 이거 재미있잖아 
   종래의 ‘SF식 문법’과는 동떨어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사실, SF라는 자각이 없었다. 혹시나 했더니, 그 역시 SF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미있는 소설’을  목표로 한 ‘장르 파괴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제법 괜찮은 시’를 쓰기 시작해 13세 때 절필을 경험했다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그의 ‘앳된 웃음소리’ 덕분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읽어봐도 재미있다는’ 그의 소설의 성공을 정말 순수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그 매력적인 웃음소리와 아이같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모처럼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 주인공 이름이요? 아, 은경이. 
   이에 대한 대답은 <예비군 로봇>을 인용한다.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사실 별뜻 없어요. 로맨스 같은 것도 없고. 작가분들이 많이 공감하시는 문젠데 주인공 이름 짓기가 참 어렵잖아요. … 그럴 때는 미리 정해둔 이름이 하나 있으면 편하거든요.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계속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까 뭔가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좋더라구요.” 
  한편 2057년 여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무슨 작가에게 실연을 당한 그 ‘은경 씨’의 차기작을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개봉예정일은 2009년 8월 정도란다.

    # 무한한 영감의 원천, 그의 뮤즈 ‘L 씨’ 
   작가후기의 말미에서 건강을 기원한다던 ‘L 씨’는,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분이 매우 재기발랄하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차마 그의 건강까지는 바랄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특히 고마움을 전했던’ 다른 분에 대한 질문은 왠지 금기시되는 것 같았고, 다행스럽게도 나의 파트너는 작가후기 따윈 읽지 않는다는 주의라서 조용히 덮고 갈 수 있었다.

4.   <작가와의 대화>가 끝나고, 20 여명 남짓한 독자들을 위해 즉석 사인회가 진행되었는데, 참석자의 이름과 간단한 메시지를 정성스레 적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 과정에서 오타가 나버린 운 좋은 ‘내 책’은 그의 서가 어딘가에 꽂혀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책을 상대로 질투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5.   어중간한 행사시간으로 인해 저녁식사를 겸한 간단한 뒷풀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나와 내 파트너는 ‘이틀에 걸친 문화대장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둘둘치킨 옆 순대국집에 자리를 잡았다. 현 상황을 ‘파시즘 초기’라고 진단하신 리영희 선생님과 뜨거운 세상 속에서 자기자리를 찾아가는 작가 배명훈 씨의 건강과 성장을 기원하며, 우리는 한참이나 늦어진 저녁식사를 했다. 
 참고로 예비타당성 검사 결과는 한달 후, 알려주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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