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상상마당 4층으로 고고싱! 다행히 시간에 늦지 않았습니다...친절히 안내해주시며 스크립트 나눠주시는 사계절 출판사 관계자분들 좋았구요^^ 5분쯤 지나 김명진 선생님 오셔서 강연 시작/// 

20세기 2가지 흐름으로 구분하셨습니다.  

(1) 1,2차 대전 후 1970년대까지  

(2) 1970년대 이후~ 

1. 과학 활동 규모의 양적 팽창 및 제도화  

   20세기 들어, 특히 대전 후 30년 동안 급속도로 과학이 양적 팽창합니다. (비록 우리는 지금 과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의 중심이 18세기 프랑스->19세기,20세기 초 독일->1930년대 이후 미국으로 옮겨갑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지표들에서 증가가 나타납니다> 

American Physical Society(미국 물리학회) 사진을 보면 1930년대 과학자가 소수였으나 1970년대 과학자가 대량으로 늘어납니다(물리학도 각 부분이 세분화되어 하나의 세션도 과학자 수가 많습니다).  

American Physical Review(당시 제일 유명한 물리학 학회지)에서 커버할 수 있는 연구논문의 수가 대폭 증대합니다.1970년대 학술지가 쪼개져 해당 전문 논문들만 투고하기 시작합니다. 학술지의 종류, 발간 간격, 한 부의 두께가 늘어납니다. 

연구기관의 수, 즉 과학연구만 해서 밥먹을 수 있는 일자리 수가 증가합니다. 1966년 만평을 보면 미국 인구 증가율이 3%인데 비해 매년 과학 논문 증가율이 9%로 3배 빠른 속도입니다.  Bentley Glaus(생물학자)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빈곤한 연구환경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지금 같은 연구자금 지원이 있는 연구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사회,정부,기업이 과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이전 과학은 과학자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초 기업이 과학이 쓸모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고 산하에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에서 화학회사가 세워진 이후 미국에서 General Electric(GE), Dupont, AT&T의 Bell lab가 세워집니다. 

GE는 기초연구를 지원하여 기존의 에디슨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가 특허기간만료가 임박하고 시장점유율 하락한 상태를 텅스텐-아르곤 전구를 개발하여 시장점유율을 90%까지 끌어올립니다.  듀퐁사는 나일론을 개발하였습니다.  벨 연구소는 노벨상을 10여명 배출하였고 트랜지스터를 개발하였습니다(지금은 IC형태의 칩으로 들어 있죠. 지금 트랜지스터의 수는 마치 개미 개체수 만큼이나 되지 않을까요~조크!)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마침내 국가도 과학의 유용성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차 대전은 화학자들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독일은 황제직속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의 프리츠 하버 주도로 화학연구에 몰두합니다. 연합국의 해상봉쇄로 칠레로부터의 화약원료인 초산 수입이 좌절되자 공중질소에 암모니아를 합성하여 화약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합니다. 독가스 개발과 질산염 연구도 시도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미국은 조지 헤일(천체물리학자) 주도로 잠수함 탐지기, 독가스에 대비한 방독면 제조 등을 연구합니다. 1차대전은 독가스가 대규모로 사용된 유일부이한 전쟁입니다. 

2차 대전은 물리학자들이 큰 역할을 합니다. 레이더, 원자폭탄 이 두가지로 대변됩니다.  (1)레이더는 1941년 브리튼 전투에서 독일의 영국 장악을 좌절시킵니다. 야간 상호공습과 공중전에서 영국 공군의 우수한 레이더가  독일 공군을 궤멸시킵니다. 레이더 연구에는 30억불이 투입되었습니다.  (2)원자탄은 20억불을 들여 단기간에 집중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1941년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과학연구개발국)에서 바네바 부시 주도로 4억 5천만불이 투입되어 MIT, 칼텍 등의 대학에 연구계약용역을 주었습니다.   이외에도 폭탄의 탄도 계산을 위해 컴퓨터 ENIAC이 개발 되었고 페니실린, DDT 가 연구되었습니다. 

<차이점> 

1차대전 이후에는 국가의 지원이 중단되었고 과학자들도 국가로부터 연구주제와 자금을 지원받아 구속되는 것에 불편을 느끼고 연구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다시 민간 개인의 연구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에는 지속되었습니다. 1945년 7월 종전 직전에 배포된 바네바 부시의 보고서 *과학, 그 끝없는 프론티어*는 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제공하였습니다. 과학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구이므로 후하게 지원하되 책임을 묻지 말 것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전후 과학정책의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즉 (1)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과학자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2)과학기술의 성과에 대한 낙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Office Of Naval Research(해군연구국)가 1945~1950(5년 동안) 존속하였고, 국방성, NSF(국립과학재단), NIH(국립보건원)등이 있었습니다.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면 1960년대 초반 연방정부재정지출 비중이 R&D 예산의 3분의2를 차지하였는데 그 중에 절반이 국방예산이었습니다. 1995년 연방 연구개발 지출이 704억불(70조)인데 이 중 356억불이 국방부 지출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경향입니다.   

1970년대 이전 국방부 지원의 기밀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기밀취급허가받은 교수,학생들만 이러한 top secret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2.과학활동의 양상 변화 

팽창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연구자금의 증가로 인해 과학연구의 단위(규모)가 커졌습니다. 연구팀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1930년대까지는 개인.소집단(부부,친구,사제,선후배) 연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20세기 전반을 보면 노벨상 수상도 단독수상이 많습니다. 지금은 연구단위가 극단적으로 위계화되었습니다. 연구규모가 대규모이기 때문입니다. 과학노동의 소외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첨단연구를 위해서 대형기기에 대한 의존성이 증가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거대과학(Big Science)프로젝트입니다. 거대입자가속기, 허블 우주 망원경, 아폴로 계획, 인간게놈프로젝트 등등.  

휴먼지놈프라직트는 1990년 시작되었습니다.2001년 초안이 완성되었는데 NATURE(권위 높은 과학전문잡지)에 70여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실려 있습니다. 20여개 연구센터의 500여명의 논문 저자가 공동 작성한 것으로 인명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20억불이 들었습니다. 

<입자가속기> 

고에너지 물리학의 목적은 고대 원자론자들로부터 기원했듯이 원자->양성자,중성자->수십 가지 종류의 근본입자로의 규명을 위한 것입니다. 링을 통해 기존 입자를 쪼갭니다. 빛의 속도(0.99997)까지 가속시켜 목표물에 충돌시켜 깨뜨려 다른 입자들로 분해시켜 뭐가 생기는지 바서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를 규명하기 위한 시도를 합니다.  

6백만불 가치의 구름상자를 이용해 입자의 궤적을 따라 뽀글뽀글 선이 생기는 것을 촬영하면 몇십억 개가 나옵니다. 이것을 컴퓨터 분석을 통해 몇백만 개로 줄여놓습니다. 이후에는 연구자가 일일이 봐서 분석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1~2개의 입자를 찾기 위한 단순반복작업입니다. 

1970년대 초에 완공된 국립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Tevatron은 거대한 링입니다. 둘레가 6.4km이고 2000여명을 수용합니다. 인구15만의 소도시의 사용량과 맞먹는 6만 kw의 전기를 소모합니다.  

초거대입자가속기(Superconducting Supercollider,SSC)는 1984년 제안된 둘레 85km의 초전도자석인데 이미 20억불을 쓰고도 의회에서 비용을 감당 못해 계획을 폐기했습니다. 지금도 텍사스에 텅빈 터널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실험기구에 과학자가 예속되게 되어 연구자의 소외가 옵니다. 기계에 맞춰 연구목적, 주제를 잡게 됩니다. 실헌 준비,계획,실시까지 15년이나 걸립니다. 그 사이에 입자가속의 활용방안,특성 년구 등의 기계를 연구하는 것이 되어 기계에 대한 의존성이 증대됩니다.  

<허블 망원경> 

1990년 디스커버리 호가 지구밖 610km 상공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대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관찰학 위한 목적입니다. 망원경 건조에만 24억불이 소요되었습니다. 매년 운영비용만 2억 7천만 불이 듭니다. 그러나 흐릿하게 보이는 문제가 생겨 한 차례수리까지 했습니다. 차후 태양 궤도에 망원경을 제조해서 띄울 예정입니다.  

#Epilogue# --- 20세기 후반(1970년대 이후) 과학연구 양상의 변화 

상업화가 특징입니다.기업이 이를 주도합니다. 1960년대 정부 투자가 65%(149억 달러)였고 기업이 30%(104억달러)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 지적재산권 관련 법안이 통과된 이후 1995년은 정부가 30%(627억불)였고 기업 65%(1333억불)로 역전되었습니다. 

벨 연구소가 트랜지스터를 발명했을 때 노벨상 수상 정도가 가시적 보상이었지 특허 출원해서 떼돈 버는 것은 예상 못했습니다. 즉 응용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특히 생명공학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별이 없습니다. 기초와 응용 사이 갭이 3~5년, 1~3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오늘날 지식기반산업은 승자독식이 지배합니다. 특허를 따서 시장,표준(standard>를 선점하려 합니다. 따라서 기업들이 기초연구에 투자(특히 대학에)를 시작합니다. 우리 나라도 산학교육진흥법이 통과되어 교수가 기업ceo를 겸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1999년 UC Berkley 대학 식물--미생물학과와 노바티스(신젠타)의 계약을 들 수 있습니다. 5년동안 매년 500만불씩 총 2500만불을 지원하기로 하고 모든 연구성과의 3분의 1을 노바티스가 마음대로 골라서 가져갈 수 있도록 한 계약입니다.  이에 대해 대학연구의 자율성(대학의 존재의의)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비록 이후에 유사한 계약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상업연구의 단면> 

연구결과에 대한 기업의 통제가 행해지는 현실입니다. 예전에는 노벨상 목표로 우선적 개발을 시도하고 이는 과시 목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논문발표 전에 특허를 먼저 출언하여 지적재산권화하는 돈벌이 전략을 구사합니다. 논문에 게재되면 공개된 지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허락 없이 발표 못하게 하는 비공개계약을 체결하기도 합니다. 특허 출원을 위해 발표를 지연시킵니다. 기업에 불한 결과의 발표를 장기간(5년, 10년씩)지연시키기도 합니다. 수억불의 손해배상 소송의 위협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미국에 이런 케이스가 보고됩니다.이것이 탐사보도기자의 추적에 의해 밝혀지기도 합니다.  

누가 돈을 댔는지에 따라 다른 결론을 도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약 개발시 부작용 실험시에 정부 발주인지 기업 발주인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연구 부정행위(Reserch Misconduct)의 유혹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기만 즉 자기가 보고 싶은 결과만 보는 연구를 하는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속한 생명공학 회사의 주가 상승을 예상하는 등 돈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자1-----대안 제시 요청 

<답변>  

선생님께서는 1997년에 발족한 시민과학센터에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1990년대 초 학부시절 학과(전자공학)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모색하는 동아리 활동 경력이 있으십니다.  

냉전기의 과학,조사 연구 드라이브에 반발하여 1970년대 과학자 단체가 생겨납니다. 지금에 와서는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에 일반 시민이 참여하여 토론하고 심지에 과학연구 방향에도 시민 목소리를 수용하자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낼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과학상점 모델이 있습니다. 일반 시민의 관심사(보건,환경 등)에 맞춘 연구들을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의 의견을 수용한 선구적 사례가 국내,외국에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논의를 가학기술에 접목시킬 필요도 있습니다. 사회편익, 공익적 연구 모색, 실천 동기를 만들어 가는 단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질문자2-------탈정상과학의 구체적 예를 들어 주세요 

<답변>  

가로축이 불확실성이고 세로축이 위험부담의 크기입니다. 불확실성의 예는 지구대기, 기상학을 들 수 있습니다. 전지구적 평균기온의 추이를 예상함에 불확실성은 커집니다. 지구온난화 미래를 잘못 예측하면 (해수면 상승높이 예측) 다수에게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위험부담의 크기의 예는 실험실에서의 폭발물 연구가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작다면 건물 설계시 하중 설계에 오류(토목공학)가 있어 다리가 무너지게 되는 큰 위험부담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에측 못하고 결과가 거대한 경우 즉 불확실성이 크고 위험부담도 큰 경우를 탈정상과학이라 하여 과학자들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지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의 입론입니다. 라베트, 폰츠의 얘기처럼 노름판 판돈 커질수록 결과의 위험부담 큰 것입니다. 지구온난화 대응 같은 문제는 결정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권한을 이양하여 공개적,개방적,민주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질문자3----대중들이 과학을 고마워하는 단계에서 맹신단계로 나아갔다가 지금은 불신,무관심,냉담,냉소를 보이는 단계라고 생각하는데 관계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변> 

이 역할은 언론이 맡아줘야 합니다. 즉 언론 통한 정보 전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언론보도의 문제점은 널뛰기식이라는 것입니다(한껏 띄워주다가 가시적 성과 없자 사기다,뻥이다 라는 식으로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가는 극단적 보도 자세). 예를 들어 줄기세포 실용화의 장미빛 미래 얘기하다가 5~10년 동안 결과가 안 나오면 급실망해서 무용론 제기하는 논조는 연구의 가능성 말살(연구비 지원 끊김)하는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언론이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는 양비론을 전개하는 태도도 문제입니다. 

Informed Citizen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통될 계기,기회가 있어야 과학과 대중의 관게가 쌍방향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기 작성자의 강연 코멘트&& 

`야누스의 과학`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는 강의였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門의 신 야누스가 문의 앞뒤를 알 수 없는 양면성을 가진 것처럼 오늘의 과학도 그 발전 과정에서의 20세기 전과 후의 명료한 대조, 과학의 유용성을 가치지향적으로 접근하게 될 때의 과학기술(핵과학,캄퓨터,인터넷,우주개발,생명공학)에 도전하는 새로운 문제(지구온난화,원자폭탄,유전자변이,환경호르몬)에 대한 과학기술의 새로운 지향점의 모색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로도 접근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시간과 장소 제약상 오늘의 강의는 몇 가지 주제에 한정되었으나 바라보는 관점을 배웠으니 나머지 챕터는 `야누스의 과학`을 읽으면 이해될 것으로 본다. 김명진 선생님과, 좋은 자리를 기획해 주신 사계절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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