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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참 오랜만에 읽었다. 아니, 소설
자체를 읽은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 동안은 삶이 고달퍼서 소설 속으로 삶을 계속 도피하고 있는 내가 싫어서 소설을 읽지 못 했었다. 그런데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고 나니, 이제 소설을 좀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제일 먼저 다시 택한 작품은 언제나 믿을 수 있었고, 내
마음에 작은 떨림을 주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이었다. 우선은 책의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도대체 막다른 골목 앞에서 나는 어떤 추억을 떠
올릴까? 혹은, 막다른 골목에서는 어떤 추억이 있었을까? 제목을 앞에 두고, 책을 펼치기 전까지 참 많은 생각을 했더랬다. 그래, 이제는
현실에서 조금 멈춰서서, 추억을 생각해도 괜찮을 시간이 나에게 찾아왔구나라는 안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5개의 단편 소설의 묶음으로
이루어져있다. 1. <유령의 집> 2. <엄마!> 3. <따뜻하지 않아> 4. <도모 짱의 행복>
5. <막다른 골목의 추억> 어떤 작품부터 읽을까 고민하다가 차례대로 읽으면서 음미하기로 했다.
< 유령의 집 >
이 작품은 대학시절 친구사이로 지내던 두 남녀가 8년만에 다시 만나서 결혼을 하는 이야기이다. 서로에게 가장 익숙했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고,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 떠나고 싶었지만, 삶은 결국 익숙한 것을 위해서 다시금 돌아오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엿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장례식장에는
할머니가 만든 갖가지 음식을 먹고 때로 의논거리를 들고 오기도 했던, 당시에는 젊었던 할아버지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줄줄이 나타났다. 그리고
가게에서 데이트를 했던 얘기, 실연하고서 가게를 찾아와 할머니가 만든 새우튀김을 먹었다는 추억담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는 돌아갔다.
그렇게
타인의 인생에 진정한 의미의 배경이 된다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26p.
"돌아갈
집이 있는데도, 사랑받고 있는데도 외로운 게, 그게 젊은인지도 모르지.”-40p.
어쩌면
그 맛을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도 모르지. -54p.
뭘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 인생에 넌더리를 낸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게 나라고 나는 몇 번이나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도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58p.
내가
만든 음식이 누구에게나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60p.
<
엄마! >
나에게 익숙함에 존재는 엄마다. 흡사 공기와 같은 존재여서 평상시
나의 모든 것에 엄마의 손길이 닿아있지만 나는 그 존재를 자꾸 망각한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느 날, 회사 식당에서 주문해서 먹은 카레에
다량의 감기약이 투여 되어 그 자리에서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만다. 그 감기약을 투여한 사람은 얼마 전 회사를 짤린 한 사원이고, 이 일로
인해서 그녀는 일대 스타가 되어 버린다. 그 전까지 아주 평범하게 되도록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던 그녀에게 새롭게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안위에 대해서 묻고, 또 속속들이 그녀에 대해서 알려고 한다. 그 순간 그녀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에게 학대 받았던 기억을 떠 올리게 된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자신의 인생에서 없었던 존재였는데, 정말 힘든 절망의
순간에 머리 속에서 가시지 않는 엄마의 기억. 우리는 흔히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격려와 도움으로 그녀는 이
순간을 지혜롭게 극복해 나아간다. 이 작품은 일상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를 소소하게 끌어가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능력에
나는 또 한 번 매료되었다.
< 따뜻하지 않아 >
어린 시절 정말 친했던 남자 친구의 죽음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던
한 여자의 기억. 이 소설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그렇다. 누구나 살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나쯤은 간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생의 한
순간을 함께 하면서 찬란하게 사랑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작은 쉼표 하나라도 찍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혼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어떤 이도 언제 어디선가 같은 기분으로 이 풍경을 보았다는 것만은 알고 있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전혀 모른다. 다만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느낄 뿐. -132p.
< 도모짱의 행복 >
이 소설의 시점은 소설가이다. 그러다가 도모짱이라는
여자의 삶으로 소설가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아무리 힘들게 삶을 살아가도 그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소설가가
신의 명령을 받고 현실의 모든 부분들을 세세하게 표현학 있기 때문에 조금의 위안을 삼으라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 같다. 하긴, 가끔 우리가
살아가다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내 삶을 누군가가 글로 써 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다. 그 삶이 누군가가
봤을 때는 아주 평범하고, 유치한 것이라 할지라도.
< 막다른 골목의 추억 >
다섯 편의 작품 중에 가장 현실에서 일어 날 확률이 적을
것 같지만, 가장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오랜시간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 그리고 그 이별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세상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남자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무기로 삼아야지. 이미 갖고 있는 거니까. 너는 돌아가서, 또 언젠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행복하게
결혼하고, 어머니 아버지와 틈틈이 교류도 하고, 여동생과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네가 있는 자리에서 큰 원을 만들어 나가면 되는 거야. 너에게는
그럴 힘이 있고 그게 너의 인생이니까,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상대가 너의
인생에서 뛰쳐나갔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202p.
인간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힘을 보태 가며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거기까지 생각이 확대되었을 때, 나는
어째서인지, 인도의 길모퉁이에서 개똥과 함께 사는 사람, 닥치는 대로 대출을 받고는 한밤중에 도망친 사람, 누군가가 술을 끊지 못해 붕괴된
가정, 짜증스러워 자식을 학대한 싱글맘, 사이 나쁜 시어머니를 죽여 버린 며느리, 그런 얘기들이 그저 무겁고 싫고 흉측하기만 하다고는 생각지
않게 되었다. -21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