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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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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호떡, 그리고 김치볶음밥 


  달달한 향내 풍기는 호떡, 길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느리게 만들며 결국은 노릇노릇 예쁜 모습으로 그들의 손에 들리게 되는, 고마운 호떡이 생각난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날들.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던 때, 우연히 코를 자극하던 호떡에게 이끌려 한 입 베어 먹고는 참말로 달콤한 잠을 자게 되었다. 수면제가 아니라 호떡, 거창한 메뉴가 아니라 호떡, 그래서 더 고마웠다.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입이 잠시 즐겁자는 마음으로 베어 물었던 호떡이었기에 고마웠다. 나에게 ‘분홍 리본의 시절’은 그런 호떡 같은 소설집이다.

 

  ‘분홍 리본’이라는 고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꽃 그림의 표지를 가진 책. 신간 도서 한 켠에서 달달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분홍이라는 글자가 풍기는 감정도, 권여선이라는 작가도 낯선 존재들이었으나 이미 그 달달한 향내와 노릇노릇 예쁜 모습은 내 손에 있었고 기대 이상의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했다. 책 속에서 손이 나와 ‘너는 그대로 괜찮으니, 힘을 내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7개의 단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결핍되고 어딘가 모자란 이들이었다. 보통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전형성을 가지거나 특출한 개성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과 평범한 외모, 혹은 건강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가진 그들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어떤 건강하지 못한 부분들을 닮아 있었다. 

 

  ‘가을이 오면’의 로라는 상상력과 독창력이 부족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엄마의 의지로 우아함을 가장하며 살고 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그 옷에 대한 거부감이 가득하다. 우연히 나타난 남자의 사랑으로도 그녀의 콤플렉스는 치유되지 못한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어떤 이에게 다가갔다가 ‘학을 떼겠’던 경험이, 나에게 다가섰다 스스륵 물러났던 어떤 이의 기억이 로라의 존재를 가깝게 여기게 해주었다. 어쩌면 로라처럼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상처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가 유난히 가슴을 후벼 파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로라와 비슷한 우리가 보이지 않는가? 

 

 ‘분홍 리본의 시절’을 살고 있는 주인공은 벗을 고르는 데 까다롭다.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지내는 바엔 혼자 지내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그런 그에게 생긴 벗은 선배와 선배의 부인. 그들과 함께 보내는 부르주아적 생활, 색깔로 치면 곱고 매력적인 분홍이라 하겠다. 그녀에게 있어 참 좋은 날인 것 같았다. 그러나 선배도, 선배의 부인도 껍데기를 벗기니 공허하고 외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에 붙어 즐거웠던 그녀가 가장 공허한 존재이리라. 웃고 있다고, 대화하고 있다고, 별 볼일 있어 보인다고 모두 알찬 것이 아닌 삶, 그래서 아무리 비루한 인간이라도, 잘난 인간이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절을 묶은 분홍 리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리본이 묶고 있는 시절이다.

 

  ‘약콩이 끓는 동안’ 죽어 간 윤 양이 바라 본 교수와 가정부와 교수의 아들들이야 말로 인간 기저에 흐르고 있는 지저분한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죽은 듯 살고 있는 교수의 히스테리, 그 교수에게 붙어 무엇이라도 얻어 가려는 아들 둘,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살까, 싶은 가정부. 참, ‘인간이란 동물의 일종이었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연민이 생기는 존재들이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어찌 이리 비루한가, 소설이 한낱 소설이 아니다. 

 

  ‘반죽의 형상’은 같은 반죽으로 나누어 만든 두 개의 형상처럼 하나는 살찌고, 하나는 말라 가는 친구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굉장히 소중하고 가까우면서도 늘 질투심의 대상이 되는 친구가 있게 마련이다. 가깝고 소중하기에 나를 포기하고, 그러기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는 사람. 그가 늘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만 잘 되면 어떡하나를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거리 설정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안 순간부터 인간이 멸망하는 날까지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문상’을 가야 하는 우정미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머릿속을 보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우정미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고민했다.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부끄럼 없이 궁금한 것들을 쏟아 내고 부담 없이 친근함을 표시하는 우정미라는 여자.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누구든 우정미가 될 수 있다. 주인공의 머릿속에 우정미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존재지만, 그런 속내를 보이지 않고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그녀는 그를 다른 어떤 것으로 오해하기 충분하잖은가. 진저리남을 표현할 수 없는 인간과 자신의 진저리남에 대해 모르는 인간, 그래서 또 비루한, 또 미워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쫄깃한 놈도 있고 아삭한 놈도 있으니까 더 맛있지?”

  ‘가을이 오면’의 남자가 로라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주며 했던 말이다. 처음에 김치를 반만 볶고 나중에 남은 반을 볶는 이유이기도 했다. 책을 읽은 후 한 동안 머릿속에 저 말이 맴돌았다. 쫄깃한 놈, 아삭한 놈이 함께 들어 간 김치볶음밥이 더 맛있듯 다양한 인간이 모여 살아야 더 좋은 세상이 아닐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다 갖춘 사람이 더욱 멋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작가는 각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가진 모습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쫄깃하고 아삭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이 꼭꼭 숨기고 있는 어떤 비루한 모습을 끄집어냈다. 그 결과 어려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했다. 달달한 향내 풍기는 분홍 리본으로 싸인 책을 펼치는 순간 그 비루함에 마음 아플 것이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위로를 선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인간이 없듯이 완전 문제인 인간도 없다고, 그러니 당신은 괜찮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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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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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이상 문학상 수상작 작품집 제일 마지막에 실렸던 글이다. 대상에 대한 찬사가 가득했고, 대상을 받은 작가의 말도 감격스럽게 올라와 있었지만 나를 울린 것은 [침이 고인다]였다. 학원 강사를 하는 주인공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엄마에게 버림 받은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찬란한 청춘이라는 슬픈 이십대를 보내고 있는 가엾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제 몫을 하기는 어려워진 세상, 그리고 버림 받는 것에 익숙해진 젊음. 김애란의 글에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안타까운 젊음에 대한 그림이 있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만큼 자세하고 진실한 심리의 묘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서울 주변부에서 '지나가는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간절한 하나의 공간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펑펑 울어버리면 꿋꿋이 견디고 있는 저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지만 마음이 자꾸 아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고였다.

이런 위로, 저런 격려보다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훨씬 고마울 때가 있다. 김애란의 글은 언제나 담담히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비춘다. 슬픔을 슬픔 같지 않게, 그래서 더 많은 눈물이 고이도록. 그래서 나는 김애란의 글이 좋다. 앞으로도 따뜻한 시선과 정갈한 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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