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화요일

맑고 쌀쌀

 

안방 벽에 걸린 농협 달력에 내일이 4.3 항쟁 추모기념일이라고 쓰여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던 일이다. 더디지만 봄이 오듯 힘들지만 한 발짝 내딛는 역사의 걸음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숙연해진다. 안 그래도 4월 독서회는 4.3 항쟁을 주제로 선정했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10여년 만에 다시 읽었다. 소설가 현기영이 올해 4.3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나보다. 강의 자료를 준비하면서 여순 항쟁도 그렇지만 제주 항쟁에서도 정말 무서운 건 ‘손가락 총’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운동장이나 광장에 집결시켜 군경이나 서북청년단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들은 즉석재판으로 죽임을 당한 모습을 상상하면 소름 돋는다. 손가락질은 정신의 혐오를 몸으로 표현하는 모욕적인 행위다. 손가락 총이 진짜 총으로 변했듯이 손가락질은 정신을 죽이는 짓이다. 손가락 총 한 방으로 생사가 결정되던 엄혹한 압살의 시대를 지금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태극기나 미국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애국을 외치는 노인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다.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지만 많이 바뀌었다는 기준은 100년 전과 비교할만한 이야기다. 몇 십 년 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다. 이를테면, 그 노인들이 나 같은 사람을 일컬어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양정철이 쓴 (이 분이 쓴 책을 읽고 인용했으나 나는 노통이나 문통 지지자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에 보면 빨갱이 어원 역사가 손을 뻗치면 닿을 거리감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왔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본래 당원이나 유격대원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에서 빨치산과 빨갱이가 연유한다고 한다.

 

사상을 상징하는 언어로 ‘빨갱이’가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 이승만 때였음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공간은 부모님이 들려주셨던 말씀처럼 숨쉬기조차 가빴던 혼란정국이었던 것 같다. ‘빨갱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 반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이었다. 친일파 청산이나 외세 배격을 주장해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김구 선생도 빨갱이로 몰렸다니 말해 다 뭣하랴. 한국역사 DB사이트에서 확인한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자 사설은 심각한 빨갱이 타령을 개탄하고 있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고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빨갱이라고 부르는 노인이 (있다면) 나와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온 역사, 그들의 희생, 그들과 맺은 관계까지 부정하지 않겠다. 그들이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는 이 분들의 역사를 주류 역사에서 너무 소홀하게 대해 왔다. 피해자 역사 못지 않게 책임 규명을 위해 가해자를 조명하고, 나아가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에 그늘을 드리운 분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제주 4.3 항쟁 추모 기념일이 보수색채가 짙은 농협 달력에 찍히기까지 그 질곡한 시간을 더듬으면서 몇 자 적바림한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라산의 눈물 -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제주의 역사 4.3 사건
이규희 지음, 윤문영 그림 / 내인생의책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한라산의 눈물』소개

아동문학가 이규희가 지은 이 작품은 제주 4.3 항쟁을 다룬 역사 동화이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제주의 역사 4.3 사건」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4.3 항쟁은 참혹한 역사라는 구실로 오랫동안 어린이 문학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이 작품은 그림을 곁들이고 제주 방언을 각주로 달아 읽는 부담이 없다.

 

중산간[1] 마을에 사는 제주 북촌 초등학교 4학년 김미루는 새 학기를 맞아 고무신을 사러 아버지와 읍내에 간다. 때마침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미루는 아버지와 함께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남한 단독 선거 반대와 미군 퇴진 구호를 외친 시위대에 떠밀려 합류한다. 가두시위에서 아이 한 명이 기마경찰 말에 치여 다치면서 참극이 시작된다.

 

제주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발생한 4.3항쟁은 이념 대립을 골자로 한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남한 단독 선거를 추진해 정치 입지 선점에 혈안이었던 이승만 정권은 미루 고모부처럼 남·북한 단일 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구상한 사회주의 계열인 무장대를 제거해야 했다. 어린이 문학임에도 이 작품은 이념갈등, 주민분열, 주민학살 묘사가 뛰어나다. 초토화 작전[2], 서북청년단[3] 개입, 북촌리 대학살[4]은 동족상잔의 잔혹함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작가는 죽음의 공포 가운데 아이들이 보여준 순진무구한 행동을 반사한다. 사심 없이 현상을 왜곡하지 않고 응대하는 동심이야말로 모든 희망의 자산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삐라로 딱지를 치고, 봉홧불을 불놀이로 여기고, 학살을 피해 동굴에 피신 중에도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던 어린 원혼들을 가리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은 어른들이 저지른 폭력에 희생된 아이들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진혼곡이다”

 

■ 4.3 항쟁 개요

4.3항쟁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동안 지속됐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 구경하러 나온 아이를 기마경찰이 치고 달아났다. 경찰은 사과를 요구하는 도민을 향해 발포했고 여섯 명이 희생된다. 은행·회사·우체국·학교 등 공공기관과 사업장은 파업을 단행해 경찰에 항의했다. 경찰은 군인과 합세해 파업주동자 체포 명분으로 한 달 만에 도민 5백여 명을 무단 체포했다. 시위대 체포를 구실로 경찰이 1년 동안 체포하고 구금한 도민은 2천 5백여 명이다.

 

이승만 정권은 육지에서 경찰과 군인을 증원해 공수한 것도 모자라 미군정 묵인 하에 서북청년단까지 제주도에 증파했다. 이들은 치안유지와 빨갱이 색출을 빌미로 도민의 재산을 강탈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빈번한 성폭행이 자행되는 바람에 딸이 있는 집에서는 육지 출신 경찰에게 딸을 첩실로 보내 수모를 피하는 사례까지 생겼다. 마침내 토벌대 만행에 맞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지부 당원들과 주민은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한다.

 

1948년 5.10 남한 단독 선거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과 이승만을 앞세워 남한정부를 지배하려는 미국은 제주도 진압을 밀어붙인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우정의 악수를 나눌 때 도민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채 죽었다. 4.3 항쟁은 군인 2천 6백여 명, 경찰 1천 7백여 명, 비공식 테러단체 서북청년단까지 가세한 참혹한 이념 전쟁이다. 이 작품에서 간략하게 등장한 주민출신 정부 지원단체인 민보단원 5만여 명까지 합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설마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겠소”

미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초토화 작전이 개시되자 동굴로 피신한다. 할아버지를 구하고자 마을로 내려가는 미루 아버지를 사람들이 말리자 미루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설마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겠소.” 4.3 항쟁 희생자들은 바다에서 물질하고, 들에서 농사짓고, 산에서 버섯 따던 사람들이다. 일 하다가, 밥 먹다가, 잠자다가 죽었다. 총 맞아 죽고, 죽창에 찔려 죽고, 불에 타 죽고, 매 맞아 죽었다. 입산한 남편 대신 아내가 죽고, 도망친 오빠 대신 여동생이 죽었다. 토벌대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게 하고,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죽이게 했다. 도민들 머리를 잘라 효수했고 심지어 어떤 경찰은 잘린 머리통을 허리춤에 매달고 읍내를 활보했다.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빨갱이 낙인이 찍혔다. 이 거대한 학살은 ‘국가를 위해서 빨갱이를 소탕하자’는 호명 하에 치러졌다. 따라서 작가가 말한 “제주 4.3 사건”을 두고 우리는 ‘사건’과 ‘항쟁’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식 집계 희생자만 3만여 명이나 되는 참극이다.




-주 석-

[1] 중산간 : 산 중간 기슭

[2] 초토화 작전 : 정부가 제주도 주민 봉기를 조기 진압하고자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해안선 5킬로미터 밖 마을을 소거한다는 작전

[3] 서북청년단 :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청년단체. 해방이후 북한에서 김일성 정권에게 탄압을 받거나 소외된 기독교계 계열로 월남해서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 정권의 지원을 받고 대공투쟁 현장에 투입돼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민간 테러 단체

[4] 북촌리 대학살 :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에서 무장대가 경찰 두 명을 사살하자 군부대 2연대 3대대가 북촌리에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지르고 북촌초등학교에 주민을 집결시켜 3백여 명이 넘는 주민을 학살했다.





1. 광천공공도서관에 기고한 ‘4월의 책’ 소개이다.

2. 4월에는 제주 4.3 항쟁이 일어난 달로 도서관 이용자 가운데 어린이를 대상으로 선정했다.

3. 이 책은 어린이 역사 동화이면서도 비교적 사실에 기반해 창작을 한 점이 눈에 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여덟 살 이덕무
이덕무 지음, 정민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이덕무 연구자를 자임해 온 한양대 정민 교수가 《열여덟 살 이덕무》를 엮었다. 이 책은 18세기 문예 부흥기 실학자이자 문장가 이덕무가 쓴 산문 105편에 짧은 해설을 아담하게 곁들였다. 한자 원문을 담백한 문장으로 재정비해서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책만 읽는 바보 간서치(看書癡)로 회자되는 이덕무는 방대한 잡학지식을 절제 있게 쓴 문장가로 알려졌다. 4부로 구성된 이 책도 짧은 문장에 함축된 비유와 지식이 응축됐다. 여러 고사 성어와 고전을 인용하면서 격언을 전달한다. 공부하는 자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 쾌적한 삶을 위한 단계, 여동생 두 명에게 전하는 글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기수양을 가리킨다.

 

이덕무가 열여덟 살부터 스물세 살 무렵까지 지은 이 책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진지하게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집중한 이덕무는 생애 전체 책과 함께했다. 책에 밝힌 것처럼 비싼 수업료를 치룰 스승을 모시지 못한 가난한 환경이 이덕무에게 사색하는 문장가로 대성할 토양이 되어준 셈이다. 이덕무는 당대 지식인이 즐긴 음풍농월(吟風弄月)보다 생활 밀착형 문장가다. 서얼출신으로 사회제약에 얽매인 처지였으나 삶의 가치를 생활에서 뽑아 올린 글을 많이 남겼다.

 

이 책에서 확인 하듯 한탄과 울분 대신 소박한 자족으로 다독이면서 이덕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공부이다. 엄격한 신분질서에 얽매인 당대에 이덕무가 생각한 지식이란 곧 마음공부와 결합되어야 결실을 보는 진리였던 듯싶다. 마음·말·생각·정신·행동과 같은 자기단련을 가리키는 낱말에 천착했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말도 조용조용하다”, “마음을 언제나 한 일(一)자 위에 둬야 한다”, “가난을 편히 여기면 가난을 말하지 않게 된다”, “겸양하는 사람은 매번 부족함을 탄식하면서 넉넉한 데로 나아간다”.

 

불우한 현실을 검박하게 순응한 이덕무가 가장 아끼는 말은 “맑고 밝음”이라고 한다. “잡다함을 멀리하여 정신을 기쁜 상태로 유지”하려는 태도는 현실 도피가 아닌 조응하는 모습이다. 이 책 주제어로 꼽을 “마음”에 집착한 모습만 봐도 사회장벽 앞에서 이덕무는 부정적 좌절대신 자기위안을 모색했다. 적극적으로 난제를 타개하는 호기보다 내면을 거울처럼 비춰보는 수양을 통해 문장을 연마하며 부드럽고 섬세한 자존감을 유지했다.

 

책에 따르면 이덕무는 열두 살 때부터 올바른 삶을 고민했다고 한다. 재능 있는 서얼이 봉건시대 제약을 뚫고 나가는 방법은 많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부딪친 시대와의 불화는 어린 이덕무에게 일찌감치 어떻게 살 것인가 문제를 화두처럼 던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친구가 지은 ‘적언찬병서(適言讚幷序)’라는 글을 읽고 “삶을 즐기고, 분수에 편안하다”고 남긴 평에서 안빈과 겸손을 지향한 이덕무 인생관이 농축되었다.




1. 농민신문사 발행 월간잡지 《전원생활》 4월호에 기고한 신간안내이다.

2. 잡지 지면에는 책 생김새를 비판하지 못했으나 이덕무 마니아 입장에서 아쉬운 책이다.

3. 정민 선생이 곁들인 짧은 해석은 불필요하다.

4. 이덕무 소품집을 무성의하게 출간한 민음사는 이덕무와 정민 두 명의 인지도만 바라보고

독자의 눈은 고려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5. 정민 선생은 더 이상 이런 소품집에 몇 자 덧붙여 재탕하듯 출간하시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책하는 마음 - 어슬렁거리는 삶의 즐거움에 관하여
박지원 지음 / 사이드웨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체장애가 없는 이상 걷는 일은 가장 쉽고 흔한 일이다. 산책은 건강, 취미, 기분전환, 관찰, 생각정리로 예찬되고 묘사된다. 출판인이자 작가가 펴낸 《산책하는 마음》에서는 여기에 “세계를 조용히 관조하는 습관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지멸있는 관찰과 신중한 모습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출판단지가 몰려있는 파주 둘레를 2년 동안 걸으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한 기록물인 이 책은 풍경과 일상을 꼼꼼한 사유로 직조했다. 문학·철학·인문학을 버무려 작가와 배우를 풍성하게 편성했다. 천상병, 소동파, 무라카미 하루키, 칼 구스타프 융, 요한 볼프강 괴테, 빅토르 위고 등 저명한 인물들이 풍요로운 지적 풍경을 연출한다. 경쾌하면서 지적이고 침착하면서 진지하다.

 

산책은 거창한 명분이나 도구를 동원할 필요 없다.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간만 있으면 된다. 저자도 일하는 틈틈이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사람을 보고 꽃과 나무를 보고 고양이를 본다. 산책이 끝나는 즈음에는 정돈된 자기 마음을 만난다. 산책을 하면서 얻은 자기만의 철학과 신념을 차분하게 전개한 이 책에서 저자는 “산책은 정갈하게 쌓이는 ‘시간의 힘’을 믿는 소박한 취미”로 규정한다.

 

저자가 산책을 가리켜 ‘시간의 힘’이라고 부른 이유는 생활반경을 반복해서 걸으면서 쌓인 생각의 근육을 말한다. 생각이 확대되는 일은 신체를 움직이면서 시야가 확장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일이 꼬였거나 마음이 어수선할 때, 또는 몸이 가뿐하지 않을 때 걸어본 사람은 안다.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던 사고가 산책을 하는 동안 개방적이고 능동적 사고로 전환된다. 이처럼 산책은 저자가 밝힌 것처럼 “자신의 삶과 세계를 가로지르는 쾌활한 리듬을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상에 펼쳐진 풍경 앞에 나서는 일은 옥죄인 마음을 무장해제 시킨다. 익숙하고 낯익은 편안함 때문이다. 그러나 고층 건물로 채워진 도시 풍경은 여러 질문을 던진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어디를 가나 비슷한 카페, 식당, 모텔과 같은 도시 풍경은 입체감을 잃었다.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고유한 문화는 획일화되고 골목마다 길마다 새겨진 이야기가 사라졌다. 여기서 다른 질문을 해보자. 웬만한 시골에는 대규모 작물재배와 농공단지와 지역개발 사업이 호황중이다. 한적함과 대비되는 이질적인 이런 풍경은 가슴을 건드려줄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시종일관 “마음의 무늬”를 주시하는데 그 배경에는 우리 마음에 빛이 들어오는 그곳이 있다. 산책의 기승전결에서 결에 해당하는 이 말은 일상의 풍경 속을 거닐며 즐기고 감동하고 행복하고 씁쓸한 산책의 의미를 압축했다. 결국 저자가 말한 산책이란 외면적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내면을 되짚는 행위인 듯싶다.





1. 농민신문사 발행 월간잡지 《전원생활》 2019년 3월호에 기고한 신간안내이다.

2. 규모는 가볍지만 내용은 리베카 솔닛이 쓴 《걷기의 인문학》한국판으로 봐도 무방하다.

3. 책을 읽으면서 하루에 10km씩 걷던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4. 언젠가 정리한 산책론을 쓰려고 마음만 먹다보니 다른 저자들이 다 쓰고 있다.

게으른 사람은 다른 저자들 책을 읽으면서 대리만족해야 하는건가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감했던 홍성사람들
이번영 지음 / 글을읽다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홍성군의 근현대사를 밝힌 《용감했던 홍성사람들》은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홍성의 역사를 지멸있게 정리했다. 정치인 관련 선거 약사를 생략한 본 원고는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저항 역사를 중심에 톺았다.

 

■ 일제강점기 홍성지방 항일운동

동학군이 가세한 홍주성 전투는 1894년 음력 10월 28일 오후 4시부터 29일 오후 5시까지 발생했다. 공식기록으로 3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전한다. 짚단을 성벽에 쌓아놓고 성을 공략하던 농민군에게 관군은 대포를 쐈다. 농민군 2백여 명이 전사했으나 홍주성 전투는 일제강점기 저항 운동 불씨가 됐다.

 

서울에서 지식인이 주체가 된 3·1 운동과 다르게 홍성에서는 농민군이 3·1 운동 주축이었다고 한다. 홍동면에서 횃불을 올리면서 시작한 운동은 갈산, 금마, 구항, 장곡, 결성, 은하로 확대됐다. 책에 따르면 홍성은 조선후기 남당리에서 싹튼 호학(湖學)사상이 의병항쟁과 항일운동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대부터 시작한 일제 문화말살정책에 저항하고자 무공회, 홍성청년회, 신간회 홍성지부, 가야동지회 등 지식인 운동 그룹도 출현했다. 국권침탈을 겪으면서 유산자 계급 친목단체가 사회단체로 연대하게 된 셈이다. 지식인 단체는 계몽과 교양을 고취해 민족 자긍심을 확장했다. 이 영향에 힘입어 1930년대 엄혹한 압살 시기에 광산노동자와 소작농들도 노동자투쟁과 소작쟁의를 일으킨다. 민중 운동은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서 토지균등분배와 공평한 쌀 분배를 주장하는 운동으로 계승했다.

 

일제수탈에 맞선 홍성 사람들은 해방이 되면서 가야동지회를 계승한 홍성자치위원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토착사회주의 계열이었던 단체들은 농민조합과 청년동맹 조직을 갖춰 홍성 민중운동을 주도했다. 이승만 정권 치하 자유당이 집권하고 친일경찰 출신과 부역자들은 민중운동 단체를 탄압하고 내부분열을 획책했다. 민중운동 단체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와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독재정권이 만든 홍성의 상처

한국은 1948년 국가보안법이 공포되면서 일제강점기와는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이념정쟁 시발점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오랜 색깔논쟁을 상기시킨다. 이승만 정권의 정권유지 명목으로 만든 좌익세력 포섭 단체 보도연맹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마수를 드러냈다. 용봉산 기슭, 결성초등학교 교정, 오관리 붉은 고개(홍성여고 입구), 광천읍 담산리 등에서 주민이 총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들 대개는 공산당과 관계가 없고 이념에 무관심했다. 이장이나 경찰 할당 몫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힘든 일을 할 때 ‘골로 간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영문도 모르고 무장경찰이나 군인에 체포돼 트럭에 실려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한 유래가 서려있다. 전쟁 중에 자국 국민을 학살한 이승만 정권의 추악한 진실을 밝히고자 2005년 정부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발족했다. 유골을 발굴해 원혼을 달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최초의 시도였다.

 

■ 홍성의 언론

이념으로 얼룩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홍성은 약진했다. 1988년에는 〈주간홍성〉을 전신으로 삼은 한국 최초 지역신문인 〈홍성신문〉이 창간됐다. 1995년 지자체단체장 선거에서 군수 후보자를 낱낱이 분석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홍성신문〉은 2개월 발행정지를 당한다. 투명한 후보자 검증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무시한 정치해석이었다.

 

지방언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1980년대 홍동면 풀무소비자협동조합에서 발행한 〈홍동소식〉은 1978년 박정희 정권에서 치룬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홍성읍 투표율이 112.3% 나온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폐간됐다. 홍성지방 언론탄압은 역설적으로 전국 지역신문에 정치기사 게재 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에 힘입어 홍성청소년신문 〈TONE〉이 창간되면서 홍성은 전국 지방언론에서 진일보한 선구자 역할을 다했다.

 

■ 홍성의 역사를 직조한 사람들

《용감했던 홍성사람들》3번째 장에서 다룬 인물 11명은 일제강점기에 출신과 직업과 이념을 떠나 한 뜻으로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분투했음을 엿보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낱말 “풀뿌리(민중)”가 홍성의 역사 씨줄이라면, 홍성지방 출신 항일운동가, 성리학자, 과학자, 예술가는 홍성의 역사 날줄이다. 어느 누구 한명 허투루 여길 수 없이 홍성의 역사는 씨줄과 날줄로 직조한 힘찬 맥을 이어왔다. 사상과 가치관이 달라 끝내 다른 행보를 했어도 홍성의 꿋꿋한 역사가 부정될 수 없다. 우리 고장 면면에 흐르는 선조들의 숭고한 삶을 살피고 정신적 유산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1. 광천공공도서관에 기고한 3월 ‘이달의 책’ 소개이다.

2. 2019년 3·1절 100주년을 맞이해 지역 운동사를 조명했다.

3. 《용감했던 홍성사람들》을 읽다보니 홍성군은 저항의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4. 그럼에도 지자체 분권이 된 이래 정치 성향은 진보와 반대로 흘렀다.

그 이유를 책에서는 김종필, 이완구와 같은 정치인 행보가 보인 지역패권주의로 꼽는다.

5. 저항정신이 도저히 흘렀던 홍성은 이제 일자리 부족과 문화 빈약, 구태연한 정책 탈피가 과제인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