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목요일

매우 맑음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을 본 하루다. 머위 잎도 한 번 더 뜯어야 하고 강의 원고도 마무리해야 하는데 통 손에 안 잡혔다. 마당 의자에 앉아 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셨다. 사이렌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밀랍으로 귀를 막은 오디세우스 심정인양 놀러 나갈 유혹을 뿌리치며 그늘로 의자를 옮겼다. 좀 더 늙어서는 미스 마플처럼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살인범을 잡는 추리를 하는 거였지만 거의 이뤄지지 않을 것 같기에《당나라에 간 고양이》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작가 프로필에 ‘과지라(瓜幾拉)’ 한명만 소개된 게 의아했다. 각 장 시작할 때 설명하는 ‘자료글’에서는 글쓴이가 달랐다. ‘천애단홍(天涯斷鴻)’이 1·2·3·5장을 썼고, 4장인〈당나라의 절세미인(唐宮雪月花時)〉편은 ‘가루라화익(迦樓羅火翼)’이 썼다. 이러면 공동저자로 출판사 보도 자료에 소개해야 하는데 책이나 알라딘 서지정보에서나 저자는 ‘과지라(瓜幾拉)’ 한명만 소개됐다. 아무래도 한국에 생소한 작가이다 보니 정보가 부족해서 누락한 것인지 궁금해서 달과소에 전화했다. 출판사에서는 출간 작업을 할 때 ‘과지라(瓜幾拉)’측에 문의한 결과, ‘천애단홍(天涯斷鴻)’과 ‘가루라화익(迦樓羅火翼)’은 중국 문화·역사를 다루는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세 명이 저작권에 합의했는지 모르지만(합의했으니까 저자 프로필에 소개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를 제공한 ‘천애단홍(天涯斷鴻)’과 ‘가루라화익(迦樓羅火翼)’은 그림을 그리고 본문을 쓴 ‘과지라(瓜幾拉)’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지라(瓜幾拉)’라는 한자 이름도 특이한데 저자 소개에 “‘시과西瓜’ 는 우리말로 ‘수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라는 말이 재미있다. ‘천애단홍(天涯斷鴻)’과 ‘가루라화익(迦樓羅火翼)’도 이름이 평범하지 않다. 사람 이름에는 잘 안 쓰는 斷, 迦, 樓, 火와 같은 글자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닉네임으로 추정된다. ‘천애단홍(天涯斷鴻)’에서 ‘天涯’는 ‘하늘 끝 물가’라는 뜻으로 중국 시에서 가끔 봤다. 이름 끝에 붙은 ‘鴻’은 ‘큰기러기’를 뜻하는데 중국에서는 하늘과 지상을 왕래하는 신의 사자로 여겼다고 한다. ‘천애단홍(天涯斷鴻)’을 우리말로 풀면 ‘하늘 끝 물가가 끊어진 곳을 나는 기러기’ 쯤이 된다. 왁달박달한 인간 세계를 떠나 고요하고 무심한 지경을 큰 날개를 펄럭이면서 나는 기러기라니 하, 낭만적이다.

 

4장〈당나라의 절세미인(唐宮雪月花時)〉은 백거이가〈장한가〉에 쓴 시를 연상시킨다. “눈 내릴 때, 달 밝을 때, 꽃이 필 때, 그대가 가장 그립다.”  현종이 양귀비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시에서 눈(雪), 달(月), 꽃(花)은 중국 시서화에 전해오는 닭살 돋는 연모 멘트다. 뜬금없이 “백합 같은 내 동무야”라는 가사가 생각나서〈동무 생각〉을 불렀다. 뒤에 가사를 잊어서 유튜브에 들어갔다가 “북한 노래에요?” 라고 묻는 댓글에 빵 터졌다. 아마 ‘동무’라는 말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젊은 세대에서는 우리말 ‘동무’를 북한 말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동무....동무론, 김영민 선생 신작은 언제나 나올런지. 이것도 뜬금없는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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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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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널리스트 헨미 요는 《먹는 인간》에서 “오감에 의존해 ‘먹다’ 라는 인간의 필수 불가결한 영역에 숨어들다 보면 도대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그 광경을 그린 것이 이 책이다”라고 말한다. 1992년 말부터 1994년까지 세계를 다니며 먹은 음식을 기록한 이 책은 미식에 기반을 둔 성찬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15개국에서 맛본 음식은 “분노의 맛, 증오의 맛, 슬픔의 맛”이었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필리핀과 같이 가난한 아시아부터 분쟁 고통을 겪은 독일, 폴란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를 거쳐 빈곤한 대륙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소말리아 참상을 정직하게 전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처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체제나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상흔 짙은 목격담은 먹는 행위와 사는 의미를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게 한다.

 기자 재직 당시 저자는 고급 음식을 먹고 다녔다. 그러나 혀가 까다로워질수록 무엇을 위해 먹고 사는 것인지 잊었다고 한다. 그래서 “식(食)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세계여행을 시작한다.


부잣집 음식찌꺼기를 먹는 방글라데시 빈민들, 흙바닥에서 찐 빵 한 조각을 온 식구가 뜯어 먹는 미얀마 로힝야족 난민들, 돈을 더 벌려고 쌀국수 한 그릇조차 느긋이 앉아서 못 먹는 베트남 사람들, 화산분출을 피해 산 아래에 내려왔다가 인스턴트커피 맛에 빠진 필리핀 원주민들 사례에서 보듯 동남아시아 음식은 자본과 밀접한 관계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빈곤층에게 먹는 행위란 절박한 연명 수단이다. 이 책에서 다룬 음식은 대개 비위생적이며 형편없는 맛이거나 끼니를 채우기에는 모자라다.

 물론 노루나 원숭이 대신 필리핀 농민을 잡아먹은 패전 일본군과 인어고기를 진미로 먹는 필리핀 원주민 사례에서 미각과 본능은 혼란스럽다. 금기를 깬 이 문제는 음식 윤리 문제를 제시한다. 음식은 자본·체제·이념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전쟁·식민지와 같은 얼굴로 억압한다. 터키 이민자 케밥 유행으로 인한 네오나치 대두, 세르비아 공격으로 망가진 폐촌에 혼자 남아 3년 된 밀로 빵을 굽는 크로아티아 노부인, 부족한 식량 부정 유출로 신병을 죽인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에서 보는 것처럼 저자가 취재한 음식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경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울며 밥을 먹는 저자의 모습에서 밥은 치유이자 존재 의미임을 발견한다. 고난과 고통 앞에서도 먹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정직한 모습이자 살기 위한 숭고한 행위임을 증언한 책이다.






1. 농민신문사 발행 월간잡지 《전원생활》5월호에 기고한 신간안내 글이다.

2. 지면에는 편집부에서 〈세계를 다니며 먹는 행위와 사는 의미를 고찰한〉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3.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인어 고기’ 내용을 읽으며

다카하시 루미코가 쓴 《인어 시리즈》(1권 인어의 숲, 2권 인어의 상처, 3권 야차의 눈동자) 가 떠올랐다.

내가 가진 책은 연두색 박스에 담긴 3권 시리즈물로

일본에서 불생불사, 불로장생으로 전해진 인어 전설을 다룬 만화책으로 으스스하면서도 흥미롭게 읽었다.

 90년대에 일본 출장 길에 만난 일본 회사 직원이 들려준 이야기와 거의 같아서 놀랬다.

일본은 섬나라 지형이므로 인어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4.《전원생활》5월호에는 곽재구 시인이 쓴 목포 기행기가 나온다.

스물한 살 여름 방학 때 서울역에서 완행 열차를 타고 부산을 갔다가

 미량, 벌교, 순천을 거쳐 목포에 갔었다. 유달산, 삼학도, 철도길, 목포항 인근 찻집 겨울 나그네가 생각난다.

기찻칸에서 나에게 연락처를 적어준 수방사 군인도.

그러고 보면 인간은 밥 뿐만 아니라 추억을 먹고 살다가

죽으면 ‘숟가락 놨다’고 한다.

5. 특히 이번호에는 귀농·귀촌 희망자들이 궁금해할 집짓기가 여러 지면에 걸쳐 실렸다.

4천 4백원, 늘 느끼지만 책값이 정말 착하다.

6. 《먹는 인간》 서평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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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먹는 입을 갖고 태어난 쌉쌀한 운명
    from 뻥 Magazine 2017-04-27 15:04 
    4월 21일 금요일맑고 미세먼지 많음 인터넷에서 인종청소를 검색하다가 제노사이드 논쟁이 시작된 미얀마 로힝야족 기사를 봤다. 그동안 심각한 인권유린을 접했던 터라 처음 알았을 때만큼 충격은 적지만 차별과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아웅산 수치 행보를 보면 노벨평화상 수여에 회의가 든다. 4월 11일 자 연합신문 기사에는 미얀마 서부에 있는 로힝야족 난민수용소를 폐쇄하기로 했다고 한다. 로힝야족 참극을 처음 알게 된 2012년 유혈사태 보다 더 나빠진

4월 26일 수요일

맑고 푸른 하늘

 

어제 시장에서 사온 청양고추, 가지, 방울토마토, 상추 모종을 저녁나절에 심었다. 상추 씨앗을 모판에 뿌렸는데 대체 언제 나올 기미인지 싹이 안 보여서 별수 없이 모종 반판에 2천원 주고 샀다. 실한 마늘을 자랑하는 다른 집 텃밭을 보니 부실한 내 마늘밭에 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아주 망하지 않는 거 보면 신기하다. 낮에는 오랜만에 고사리 꺾으러 산에 갔는데 벌써 한차례 손길이 닿았는지 신통찮아서 후딱 내려왔다. 고사리는 꺾고, 쑥은 뜯고, 냉이는 캔다. 이걸 내가 시골구석에서 살지 않았으면 뭔 말인지 몰랐을 게다. 이상하게 몸이 나른해져서 오늘은 책을 두 권이나 받았지만 한 줄도 읽지 못하겠다. 골치 아픈 생각은 일체 사절. 멍 때리면서 겨울 밤바다 안개맛 같은 박하사탕이나 빨아먹다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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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먹는 존엄성






4월 21일 금요일

맑고 미세먼지 많음

 

인터넷에서 인종청소를 검색하다가 제노사이드 논쟁이 시작된 미얀마 로힝야족 기사를 봤다. 그동안 심각한 인권유린을 접했던 터라 처음 알았을 때만큼 충격은 적지만 차별과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아웅산 수치 행보를 보면 노벨평화상 수여에 회의가 든다. 4월 11일 자 연합신문 기사에는 미얀마 서부에 있는 로힝야족 난민수용소를 폐쇄하기로 했다고 한다. 로힝야족 참극을 처음 알게 된 2012년 유혈사태 보다 더 나빠진 것 같다.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을 불교도가 장악한 미얀마 정부가 차별하면서 촉발된 이 사태에서 군인과 경찰이 로힝야족 여성을 성폭행하고 집을 불태웠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사살한 다음 불을 질러 시신을 훼손한 일이 발각되었는데 차별과 학살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수치는 버마 군부정권을 미얀마 민주정부라고 이름만 바꿔 계승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40여 년 전 군부독재가 로힝야족을 ‘벵갈리’라고 비하하면서 차별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수치는 이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수치가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오랫동안 가택연금 당했다고는 하나 대체 미얀마 인민을 위해 어떤 공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후광 외에는 본인이 만든 게 없는 박근혜처럼 아웅산 딸이라는 정체성이 추종에 작동한 건 아닌지 의심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말마따나 각 대륙마다 그들만의 종교가 필요했듯이 사람들은 그들만의 우상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2012년부터 방글라데시로 피난 간 로힝야족은 공식집계에 잡힌 숫자만 7만여 명이 라고 하니 북아프리카와 아랍인들이 죽음의 보트를 타고 유럽 난민 길에 오르는 것만큼 참혹하다.

 

난민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굶주림과 질병일 것이다. 얼마 전 읽은《먹는 인간》에 나온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족 난민촌 사례와 2차 대전 당시 필리핀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먹은 인육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이 말은 호모 호미니 루푸스(라틴어: Homo homini lupus)는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희극 아시나리아(기원전 195년)에서 “lupus est homo homini”라고 한 것으로 위키 백과에 쓰여 있다-라고 한 토머스 홉스 말에 반론을 걸 수 없는 이야기다. 4·3 항쟁 때 서북청년단과 민보단이 주민들에게 한 짓도 똑같다. 로힝야족이 박해를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 왔을 때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과 선의가 원조기관이 난민에게 많은 식량을 배급하자 태도가 돌변한 것을 보면 친절과 선의란 내가 상대방보다 더 많이 가졌을 때나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인 듯싶다.

 

오만이나 악의 문제가 아니라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태도 이면에 어떤 우월의식이나 열패감이 뒤섞인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가끔 기분을 어둡게 만드는 이야기들-나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던 동창이 돈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나 부자로 살거나, 또는 책 한 권 읽지 않음에도 사회적 명성을 얻고 돈까지 잘 버는 지인, 나를 괴롭혔던 직장 상사가 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모습 등등,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라고 자위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쯤은 익히 알만함에도 말이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닥칠지는 뻔하다.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에서 원주민의 삶을 불편하게 한 건 사실이다. 땔감이 줄고 물고기가 줄었으니 방글라데시 원주민 입장에서 로힝야족 난민은 터전을 차지한 불청객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로힝야족을 탄압한 미얀마 기득권층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현실은 약자끼리 투쟁한다. 약자는 대항하는데 부담스런 강자보다 만만한 약자를 공격하면서 서열을 정비한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사회면 뉴스를 차지하는 대개가 약자끼리의 전투장임을 확인하는 일이 그렇다. 큰 가해자는 밀쳐두고 약자끼리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 괴기함.

 

피카소 작품〈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총을 겨누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늘 궁금했다. 피카소가 공산당 당원이었으므로 가해자가 미군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은《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를 읽고 나의 선입관이었음을 알았다. 피카소는 이 그림 때문에 많은 의혹을 샀지만 인터뷰를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가해자를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그린 의도를 보면 이 그림에는 특정하지 않은 가해자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받은 피해와 상처에 집중하지 자기가 남에게 준 상처와 피해를 헤아리는 일에는 인색하다.(아, 진부해) ‘이타성’은 인간의 자기중심 성향, 즉 에고에 따른 성찰 결과로 나온 말이지 않나. 피카소는 미노타우로스를 분신처럼 그렸으므로 폭력 주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살인자 파란여우를 닉네임으로 쓰는 내가 알게 모르게 저지른 패악을 잘 인지하고 있을까? 로힝야족에게 선의를 행사하다가 배척으로 돌아선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한국에서의 학살〉에 그린 감정 없는 가해자에 나를 대입해본다. 이럴 땐 또 먹거나 마셔야 한다.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넣은 프리타타 한 접시를 다 먹었고 부른 배를 진정시키며 일기를 썼다. 오늘도 굶주린 로힝야족이 있고, 흙바닥에서 작은 빵 한 조각을 구워 온 식구가 먹은 방글라데시 주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배부름을 말한다.《먹는 인간》에 나온 “인간이 타고난 애처로운 맛의 상극”이 입안에서 맴돈다. 먹는 입을 갖고 태어난 운명이란 쌉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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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목요일

맑고 바람 많음

 

이불 빨래를 두 번 하고 종일 빈둥댔다. 저녁에 화인이 박사 논문을 마저 읽었다. 훌륭하다, 잘썼다를 떠나 공부하면서 고생한 과정이 떠올라 대견했다. 무엇보다 말미에 행정 정책은 비용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수행 해야 한다는 문장에 감동했다. 캠프에서 연일 야근하느라 바쁜 까닭에 선거 끝나면 근사한 밥을 먹을 예정이다. 어디엔가 자랑을 기록하고 싶어 일기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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