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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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스물세 살에 쓴 소설 《썩은 잎》은 과거와 현재를 왕복하는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156쪽의 짧은 작품이지만 딴 짓 없이 내리 읽어야 전개를 알 수 있는 이 소설은 만연체가 돋보인다. 자칫 지겨워 중단하기에는 소설의 기본 개념인 ‘이야기’가 시침 뚝 떼고 뻥을 친다는데 망설여진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 상징인 ‘마술적 사실주의’ 특징은 이처럼 인과법칙이 맞지 않고 신화와 현실이 뒤섞인 기이한 서사구조로 이뤄졌다.

 

《썩은 잎》얼개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하다. 1928년 9월 12일 오후 두시 삼십분부터 세시까지 목을 매달고 자살한 마을 의사 장례식을 준비한다. 소설 속 화자(話者)는 세 명으로 노인과 딸과 어린 손자로 이들은 삼십분 동안 의자에 앉아 각자 과거와 현재를 상기한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원주민 일꾼 네 명과 매장 허가서를 들고 방문한 읍장이 나오지만 이 인물들은 작품에서 큰 의미가 없다. 시신을 관에 담고 매장 허가서를 받고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까지 삼십분 동안 노인과 딸의 회고에서 복선이 드러난다.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앞서 언급한 ‘마술적 사실주의’와 작가의 작품세계, 작품 배경을 톺지 않을 수 없다. ‘마술적 사실주의’ 대표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1982년 장편소설《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 집안 내력에 콜롬비아 현대사를 결합해 직조한 《백 년 동안의 고독》 배경인 가상 마을 ‘마콘도’는 《썩은 잎》에서 같은 공간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두 작품 주역인 퇴역 군인 ‘아우렐리아 부엔디아 대령’도 마르케스 작품 단골 출연자이다.

 

자유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퇴역군인 외할아버지 집에서 성장한 마르케스는 카리브 연안 국가가 미국 거대 자본에 잠식당한 역사를 작품 속에 녹였다. 《썩은 잎》과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온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 Company)’는 라틴 아메리카를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으로 전락시킨 다국적 기업이다. 미국에 기반을 둔 다국적 기업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라틴 아메리카에 바나나회사를 차리고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해서 큰 차익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자연환경 파괴와 노동자 착취, 현지주민 생활터전 수탈이 지적된다.

 

심지어 콜롬비아에서는 1928년 10월 6일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미국 회사 사주를 받은 콜롬비아 정부군 발포로 콜롬비아 국민 3천여 명이 희생됐다. ‘바나나 학살(Banana Massacre)’로 불리는 이 참사는 미국 자본이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한 야만성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래서 마르케스 작품은 대개 인간의 자유의지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회참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상처 받은 사람들의 깊은 고독을 다룬다.

 

《썩은 잎》이 삼십분 가량 세 인물이 각자 생각하는 독백 서술이지만 이해 층위가 복잡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은 콜롬비아 역사와 맞물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지속된 ‘천일전쟁’과 철도부설 작업, 바나나 회사, 내전, 피난민, 노동자 시위, 이방인과 원주민 대립 등 복잡하고 극적인 사건이 밑절미에 깔렸다. 표면적으로는 차분한 전개이지만 어수선한 배경을 둔 《썩은 잎》에서 독자가 가장 궁금해 하는 건 제목이 가리키는 뜻일 것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썩은 잎’은 수확이 끝난 다음 수북이 쌓여 썩어가는 잎을 가리킨다고 한다.

 

“‘바나나 붐’은 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일 만큼 엄청난 번영을 가져왔지만 그 번영은 덧없고 무상했다. 그곳으로 와서 새로운 부에 편승한 신흥부자들과 그들을 따라온 노동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마콘도에서 살아온 거주자들의 분노를 샀다.”

 

바나나회사는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는데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이치와 같다. 안빈낙도 가운데 행복했던 사람들은 우후죽순 생겨난 유흥업소와 온갖 장사꾼과 사기꾼과 뒤섞이면서 고유문화가 붕괴되고 터전이 위협받는다. 배금주의가 삶에 깊이 개입될 때 다른 삶의 방식을 원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거부하면서 소외되거나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한다. ‘마콘도’는 주인공 부엔디아 대령이 약속의 땅처럼 여긴 새 터전이었으나 마침내 저주의 땅으로 전락한다.

 

자본에 예속된 인간 군상을 조명한 《썩은 잎》은 개발도상국 실정과 겹친다. 경제근대화라는 명분에 시골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서 다시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지역개발에 사활을 건 지자체 정책으로 문전옥답을 넘긴 사람들, 한 큐 성공에 들떠 부나방처럼 돈을 좇는 물신들이 떠오른다. 격정적인 역사를 찬찬히 톺은 이 작품은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짝패이다.




 -주 석-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 콜롬비아 태생 소설가 (1927년 3월 6일~2014년 4월 17일)

2.《썩은 잎》: 마르케스가 23세인 1950년 쓴 첫 번째 소설로 1955년 발표

3.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 라틴 아메리카에서 태동한 문학사조로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들이 소설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지만 소설 등장인물들은 당연하게 여긴다. 신화와 현실을 혼재한 구도가 경계를 불분명하게 한다.

4.《백 년 동안의 고독》 :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겪어야했던 역사를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과 함께 들려주는 작품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에 선정됐다.

5. 천일전쟁 : 1899년 10월 17일부터 1902년 11월 21일까지 지속된 콜롬비아 내전이다. 정부군과 훈련을 받지 못한 자유당 게릴라군 사이의 비정규전으로 ‘네에를란디아’ 바나나 농장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만 계속 전투하다가 파나마 만에 정박한 미군함에서 최종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6. 톺다 : 샅샅이 살피다.





1. 광천공공도서관에 기고한 6월의 서평이다.

2.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던 때문인지 매우 금방 이해한 소설이었다.

3.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숨막히는 이야기꾼’이다.

4. 성의를 다한 옮긴이 해설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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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황홀한 블랙 - 세속과 신성의 두 얼굴, 검은색에 대하여
존 하비 지음, 윤영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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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지옥을 떠올렸던 과거와 다르게 오늘날 검은색은 고급·세련·침착성을 가리킨다. 검은색 역사를 톺은 《이토록 황홀한 블랙》에서는 검은색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 배경에 예술과 학문 연구와 산업화, 그리고 이념 변화에 있다고 말한다. “죽음·공포·부정을 의미하던 검은색은 차츰 신념·예술·사회적 삶의 구조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검은 옷 역사를 정리하던 저자가 검은색 역사로 외연을 넓힌 이 책은 풍성한 박람강기(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가 돋보인다. 고대문명·이슬람과 가톨릭 문화·인도의 다양한 신·아프리카·현대미술·생리학·식물학·지리학·역사학·회화·종교를 넘나든다. 인류가 검은색을 사용한 건 기원전으로 거스른다. 기원전 2000년 무렵 파라오 왕궁에서는 검은 가발을 쓰고 검은색 눈 화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은 잉크와 물감을 사용해 옷과 꽃병, 묘지석, 그림 등을 장식했다고 한다. 세련되고 고급스런 이미지였으나 죽음을 묘사할 때는 예외 없이 검은색을 썼다.


그러나 검은색이 죽음만 가리킨 것은 아니다. 책에 따르면 아즈텍 신화와 이탈리아 토속신앙, 일본 신화, 티베트 불교에서는 검은색 형상의 신은 치유와 지혜와 자애로움을 상징한다. 인도에서는 잘린 사람 머리를 몸에 주렁주렁 단 검은 피부를 가진 칼리가 빈곤층에게 숭배 받는다. 난폭한 신(神)일지언정 칼리가 휘두른 칼이 고통을 해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세 교회는 검소와 속죄 의미로 수도사에게 검은 옷을 입혔다. 인도와 다르게 절제가 개입된 것이다. 중세에서 검은색은 죽음, 금욕과 함께 권위와 품위를 상징했다. 런던에서 집 전면 기둥을 검게 칠하고 상류층에서는 검은 옷이 유행했다고 한다. 책에 수록한 것처럼 화가 루벤스를 비롯한 당대 화가들이 그린 검은색 회화는 검은색이 더 이상 죽음이나 죄, 지옥에 한정된 색이 아님을 뜻한다.


자연과학에서 검은색 물질이 지닌 무한한 효용은 검은색 역사를 새로 썼다. 수메르 시대 이전부터 역청, 송진, 옻을 사용한 인류는 철의 시대를 지나면서 건축과 무기에 검은색을 입히고 마침내 석탄과 석유 개발로 산업화시대 포문을 열었다. 신을 흠모하며 제의로 썼던 검은색은 종교와 미술과 패션과 산업을 거쳐 인종 개념에까지 적용됐다.


저자는 검은색이 오염, 저주, 죽음과 같은 부정적으로 썼던 일을 떠올리면 검은색 인종이라는 관념은 차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검은색은 현대에 여전히 애용된다. 빛과 어둠이라는 흑백대비 탁월함에 기인하지만 저자 관점은 철학적 명제를 열어둔다. “기독교 우주론에서 신은 번쩍이는 빛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숭고한 어둠의 심장 한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속과 신성의 두 얼굴’을 가졌다는 검은색에 신과 인간을 조명하는 불가사의한 뜻이 깃들었는지 새삼 다시 보인다.





1. 농민신문사 발행 월간잡지 《전원생활》6월호에 기고한 신간안내 글이다.

2. 지면에는  〈세속과 신성, 두 얼굴을 가진 검은색 역사를 톺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3. 이 책과 묶어서 미셸 파스투로가 쓴 《파랑의 역사》도 관심도서로 도서관에 구독희망 신청해뒀다.

4. 둘째와 셋째 문단 괄호안 문장은 편지부에서 첨언했다.

5. 볼만한 도판과 저자 입담이 어우러진 인상 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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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책을 좋아할만한 몇몇 독자를 알고 있는데
    from 뻥 Magazine 2017-05-30 14:19 
    5월 2일 화요일맑고 미세먼지 나쁨 3일째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이렇게 공기가 나쁘다가는 5년 후 호흡기질환자 사망률이 훅 높아질 것 같다. 외출을 못한다고 투덜대면서 책상 위에 늘어놓은 책 정리나 했다. 운동을 하고 저녁부터 엊그제 받은《이토록 황홀한 블랙》을 읽고 있다. 검은색을 매우 좋아해서 검은색 역사가 궁금했다. ‘black’ 어원을 적바림한다.“‘black’ 은 특정한 색깔을 일컫기보다는 밝음과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던






5월 24일 수요일

맑음

 

4대강 사업 재조사 발표를 보면서 떠오르는 일이 있다. 차윤정 산림학자가 쓴 《신갈나무 투쟁기》 서평을 나의 첫 번째 책에 실었었는데 어용학자가 쓴 책을 상찬한 서평가라고 어떤 독자에게 욕을 먹었다. 지금도 그 글이 그 분 블로그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어느 순간 댓글이 지워져 있었다. 이런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라고 읊조리는 일뿐이다.


《신갈나무 투쟁기》는 1999년과 2009년 5월에 출간했다. 2009년 6월 즈음 이 책을 읽었고 서평이 실린 나의 책은 2009년 11월에 나왔다. 그리고 차 교수가 4대강 사업추진본부 부본부장에 임명된 때는 2010년 5월 14일이다. 시기가 이렇게 다르다. 그 후 ‘EBS 교재 사업본부’와 ‘지학사’ 두 곳에서 《신갈나무 투쟁기》서평을 사용했다. ‘EBS 교재 사업본부’에서는 방송교재에, ‘지학사’에서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었다. 내가 받은 사용료는 두 곳에서 합쳐 30여만 원 정도이다. 교재와 교과서는 일반도서와 달라 ‘인세’ 대신 ‘사용료’를 지급한다. 저작권과 사용료는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에서 관리한다. 


추정하자면 4대강 사업 홍보 차원에서 교재와 교과서에 내가 쓴 서평을 사용한 셈인데 내가 동의하기 전에 이미 실행된 일이다. 교재와 교과서는 저자에게 미리 동의를 얻지 않는다. 법적으로 그렇다. 불합리한 부분이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나는 본의 아니게 차 교수 책을 홍보하고 만 모양새가 되었다. 차 교수가 쓴 책 가운데 《신갈나무 투쟁기》를 비롯해《나무의 죽음》, 《숲의 생활사》,《다시 걷고 싶은 우리 숲》을 읽었다. 진솔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감동을 준 책들이다. 


책과 사람을 함께 묶어 판단할 것인가, 따로 해석할 것인가 앞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맹목과 일원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 교수 책은 뜻 깊게 읽었고 차 교수가 선택한 행동은 비판한다. 지금이라도 22조원 혈세가 사라진 4대강 사업에 차 교수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혹자에게 설명하는 일기를 쓰고 말았다. 귀찮은 일이다. 이게 다 4대강 사업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내가 무슨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 이런 일기나 쓰면서 아몬드를 오도독 씹어 먹는 일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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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목요일

맑고 오존 지수 높음

 

 

문재인 대통령이 “5·18 정신을 헌법에 계승”하겠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고 적잖이 감동했다. 이번 선거에서 지지하지 않았던 대통령이지만 이점은 지지한다. 여기서 말하는 ‘5·18 정신’이란 불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가리킨다. 안 그래도 오늘 받은《애도의 정치학》에서 정명중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교수가 쓴〈인식되지 못한 자들 혹은 유령들-5월 소설과 룸펜〉이라는 글을 읽었다. 다른 필자들 글에 앞서 정교수 글부터 읽은 건 오늘이 5·18 항쟁일이라는 특별한 기억이 작동한 때문이다.

 

부제에서 보듯 이 글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게다가 최후의 항전에서 죽었던 자들 대부분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점에 주목해서 몇몇 ‘5월 소설’ 속에 나타난 룸펜의 양상을 검토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르크스가 말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5월 항쟁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해석되는 지점이 다르다. “생계수단도 모호하고 출신성분도 모호한 난잡스러운 방탕아들”, “뿔뿔이 흩어져 부초처럼 떠다니는 불확실한 대중”, “폐물, 쓰레기, 찌꺼기”라고 규정한 마르크스는 그래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생계수단이 생산과정 외부에 있기 때문에 폭도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정교수는 마르크스가 정의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기생”에 불과하다고 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크스가 말한 룸펜을 살피면 일베 회원이나 자칭 보수라고 하는 세력들이 주로 사용하는 괴랄한 뉘앙스가 강하다. 심지어 “폭도”라는 단어는 전두환 일당과 추종자들이 지난 37년 동안 써 온 말이다. 사회지위가 없고 무산자였던 시부랑탕들이 시민군을 결성해서 싸운 셈인데 왜 이들은 죽을 작정하고 저항했던 것일까에 방점을 찍는 게 이 글의 취지이다. 물론 정 교수 글은 한국문학에서 ‘5월 문학’으로 불린, 특별한 상찬을 받으며 ‘살아남은 자’들의 회고록 같은 몇몇 소설을 찬찬히 해부하고 있다. 학출과 룸펜을 굳이 대립관계로 볼 필요는 없지만 룸펜을 들여다보려면 저항 구도 과정을 훑을 수밖에 없다.

 

정교수는 5월 문학에서 재현된 이 과정을 톺고 “룸펜 문제에 대한 서사적 관심은 빈곤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위험하고 불확실한 계급인 룸펜이 역사의 주체로 호명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작용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낭중에 광주사람들 야그 들어봉께 살벌했다등만. 첨엔 학생들이 시작했는디, 뒤에 갸들은 다 내빼고 때밀이,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운전수, 공돌이, 구멍가게 주인 같은 야들이 총을 잡고 광주를 지킨다고 싸웠다등만 뭐. 니기미 뒤져 부린 놈만 불쌍하지 누가 알아주나.”

“때밀이 겉은 야들이 왜 죽기 살기루다 싸운지 아냐. 학생들은 배운 게 있어농께 그거 안 해도 지 목구녁은 채울 수 있응께 발라버린 것이고, 갸들은 못 가진 한도 있고 데모 하나 안 하나 때밀이는 때밀이고 공돌이는 공돌잉께 싸우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갸들이 의리 하나는 끝내중께”-정도상 《십오방 이야기》

 

밑바닥 인생들이 죽음을 작정하고 저항한 이야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난잡스러운 방탕아들”, “쓰레기”, “기생”인 룸펜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찌그러진 인생에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심정으로 총을 든 것이 아니었을까. 임철우가 쓴《봄날》에서도 실제상황에 나약한 지식인 몰골을 드러내면서 시민군은 학출이나 지식인 엘리트들과 달리 계엄군에 맞서 싸운다. 정 교수는 비겁한 지식인과 용감한 시민들이라는 이분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용산에서 지난 주 형규씨와 이 주제로 담론했던 것처럼 내 생각은 투쟁 이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보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정치적 진보 스탠스를 취하는 지식인 엘리트들이 정작 자기가 속한 대학 비리나 학사문제에 대해선 비겁한 침묵을 일삼는 짓과 같다. 사교육 광풍을 일으켜놓고, 부동산 투기로 자산을 늘려놓고, 탈세와 편법으로 홀딩스를 인수하고 오늘날 스스로 엄지 척 하며 유세하는 몇몇 386 출신 인물들이 떠오른다. 언론에 나와 정의와 평등을 입술에 올리는 그들이 투쟁에서 학습한 건 때밀이나 공돌이와 같은 룸펜 또는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선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룸펜이 역사의 주체로 호명되는 거부감”을 넘어 지금은 꽤 지명도 있는 인물이 된 자기들이 민주항쟁 주체였던 것처럼 호들갑 떠는 이런 세속에서 “5·18 정신을 헌법에 계승”하겠다는 의지에 때밀이나 공순이·공돌이나 운전수나 동네 양아치 이름이 들어갈 때만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룸펜들이 왜 격렬하게 저항했는지 그 절박함을 헤아릴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서 가려졌거나 배제된 계급 존재를 밝히는 조명탄이 되며 유령에서 실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일기를 쓰고 있자니 소쩍새가 몇번 우는 게 들린다. 하물며 저윽하니 우짖는 저 새도 하고 싶은 말이 저리 많다. 고즈넉한 밤에 향을 한개 피우고 바나나라도 음복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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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지우-화엄광주-공선옥
    from 뻥 Magazine 2017-05-18 22:24 
    5월 18일 월요일야야 살랑살랑 바람 불고저녁에 카스 한 캔을 마시면서 황지우 시집《게 눈 속의 연꽃》을 읽었다. 잊었다가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펼치는 시집, 당신에게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유치한 단물 건네자니 너무 뻔해서 빤빤하기에는 시 ‘華嚴光州’는 붉은 구덩이처럼 참혹하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뭐라 주절주절 옹알옹알 또박또박 떠들지 못하겠다. 웅얼웅얼 입 안에서만 혼잣말처럼 맴돌다 고자누룩해진다.“나는 여러 군데서 여러 번 이렇게 들었네화엄도






5월 6일 토요일

맑고 미세먼지 매우 나쁨

 

황사와 미세먼지가 마을을 희뿌연 융단처럼 ‘뒤’덮었다. 복순이를 집안으로 들이고 종일 뒹굴 댔다. 오후에는 물을 데워 복순이 목욕을 시켰다. 저녁을 먹고《전문가들의 사회》를 읽기 시작했다. 머리말에서 내가 그동안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이 언급된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가졌던 세 가지 궁금증(의구심으로 발전했다)은 ‘네임드’는 신뢰할만한가, 전문가는 ‘이타성’에 기인해 정보(지식)를 제공하는가, 왜 지식전달이라고 하지 않고 ‘서비스’라고 부르는가 하는 물음이다.

 

내가 내린 1차 결론은 ‘네임드’는 신뢰할만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명성은 내용보다 인맥, 출신학교, 사회지위, 여론, 맹신에 의해 작동된다. 두 번째 의문인 ‘이타성’은 전문가들에게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이반 일리치가 말한 ‘자유 전문가’가 아닌 ‘직업 전문가’들은 이타성을 공언하면서 경제 이익을 챙긴다. 자본주의 사회를 이유로 든다면 ‘이타성’을 언급하는 일은 염치없다. 돈을 받고 정보(또는 지식, 의견)를 제공하거나 적어도 명성을 이용해 활동하면서 마치 공공이익에 무료봉사하는 듯한 ‘서비스’는 괴리가 있다.

 

또 하나, 전문가 의견은 어디까지 전문가 의존도를 키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피트니스 트레이너, 웨딩플래너, 식이조절 상담사, 건강관리사, 인생 상담사, 커리어 코치, 취업 컨설턴트...이런 직업들도 전문가라고 부른다. 교수, 종교인, 의사, 연예인, 심지어 작가(주로 자기계발서 작가)도 전문가로 불린다. 이반 일리치가 가리키는 ‘필요가치’에 적용하자면 현대의 전문가란 전문가가 되지 못하(했)지만 전문가를 동경하는 사람들에 의한 환상은 아닐까 싶은데 안 그래도 일리치가 환상을 언급한다. 이런 환상이 클수록 전문가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자기결정권을 상실하는 불구가 된다는 게 일리치 논리이며,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전문가들에게 의존도를 높이는 내용을 읽다가 자기 책임에 대한 체념은 아닌지 또 곁가지 생각이 뻗어 나간다. 그러고 보니《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에서 체념을 가리켜 “삶이 부여한 요구들에 무의식적 항복”이라고 정리한 말이 생각났다. 이 부분을 나는 서평에서 “자기 결정에 따른 책임을 미루고 타인에게 나를 맡기는 일은 개인에게 삶의 무의미를 상징한다. 그런데 개인과 가정의 체념이 사회로 확산되면………공적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는 곳에서 체념이 만연하면 사회는 퇴행구조로 전락한다”고 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품사가 어색한 곳이 있으나 맥락은 대체로 유지된 것 같다.

 

그리고 “역생산성(counter-productivity)”에서 가리킨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오히려 결핍을 심화시키는” 현상은 앙드레 고르가《에콜로지카》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과잉 욕망을 선동하는 것이 자본주의 임무”라던 말과 닿으며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의복이 아니라 유행 혹은 체면을 구입해 오고 있다”는 말과 통한다. 대량생산은 과잉욕망과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어디에 종속되지 않는 삶은 거의 불가능한 시대이다. 이런 책은 읽고 나면 제법 우울하다. 그래서 압축된 독서 무게를 달래고자 작은 기쁨들, 이를테면 보슬보슬 피어나는 작약이나 열두 폭 비단 치마 같은 모란을 보는 기쁨에 초여름을 아슴아슴 녹인다. 내일은 도서관 가는 길에 그 옆 동네 옅은 갈색 벽 앞에 핀 작약을 보러 갈 예정이다. 노동에 도드라진 삶에서 한 발짝 벗어나지 못한 채 자극적 소비 악순환에 치인 모습들-나의 형제들, 친구들, 지인들의 생활은 나와 비교할 수 없지만-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이 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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