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략 소개
“520km의 도보 여행,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나와 세상.”
삶, 그리고 걷기의 인문학
걸음마다 비우고, 한 걸음씩 채우는 삶의 심연
―서울에서 고흥까지 520km 도보 여행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어느새 은퇴라는 시간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이 낯선 시간은 작가를 황홀한 고행길로 유혹했고, 그 유혹을 은근히 즐기고 싶기에 서울에서 고흥까지 두 발로 느리게 가는 여행을 택했다. 자동차 길로 400킬로미터, 4시간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왜 걸었을까.
《걸음마다 비우다》는 서울에서 전남 고흥까지 열닷새 만에 520킬로미터를 걸어가며 기록한 여정을 담은 인문 에세이이다. 저자는 느린 걸음 속에서 만나는 자연, 역사,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책 속에 오롯이 담아 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1866)에 따르면, 한성에서 전국 팔도로 나가는 10대 간선도로가 있다. 그중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을 삼남대로 또는 삼남길이라고 한다. 삼남길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과 상당 부분 겹치고, 소설 『춘향전』에서 어사길(춘향길, 금의환향길)도 이 길을 따라간다. “우리나라에서 도보여행은 자살길이다.”이라고도 하지만, 저자는 육체적 한계를 이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선시대 삼남길보다 더 긴 520킬로미터의 고흥길을 완주했다. 또한, 저자는 심리적·정신적 한계를 이겨내며 그가 마주했던 자연과 풍경, 그가 느꼈던 감흥과 사색, 그가 만났던 역사와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한 땀 한 땀 써내려 갔다. 《걸음마다 비우다》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 하나를 채우기 위한 단순한 개인의 여행기가 아니다. 걷기를 통해 삶을 다시 정의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과정을 담은 사색과 성찰의 기록이다. 빠르게 소비되는 현대 사회의 속도에 지친 당신에게, 이 책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는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당신에게 묻는다. “걸음마다 비우고, 당신의 삶을 다시 채워볼 준비가 되었는가?”
걷기의 미학: 느림의 가치
저자는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의식으로서, 탯줄이 묻혀 있고 육체가 성장하고 정신이 태동했던 곳,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할 곳”인 고흥에 이왕 갈 것이면 “부모에게 물려받은 두 다리로 걸어가” 부모님께 무사 귀환을 알리고 싶었다 한다. 책의 첫 부분에서 작가는 걷기의 느림과 불편함이 오히려 삶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고 말한다. 하루에 평균 9시간씩, 40킬로미터 가까이 걷는 동안, 작가는 길 위의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내면과 대화한다. 그는 “속도가 느릴수록 생각은 깊어진다”고 표현하며, 걷기란 단순한 이동을 넘어 자기 성찰과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어지는 점을 강조한다.
안양천의 대나무 숲길부터 삼남대로의 옛길까지, 섬진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작가는 걷는 동안 만나는 풍경과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비행기나 고속버스, 기차를 타고서는 창가에 스치는 사물과 풍경을 소화하기에도 바쁘다. 두 발로 걷는, 보다 느리게 가는 여행일수록 자신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삶의 사색
작가는 삼남대로와 백의종군길, 유배객들의 길을 걸으며 역사를 되새긴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을 따라가며, 그는 장군의 고난과 결단을 떠올리며, 다산 정약용과 김정희 등 조선 시대의 유배객들이 걸었던 길에서 그들의 외로움과 고뇌를 공감한다. 작가는 역사적 여정을 걸으며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걷고 있는 현재의 길 또한 역사의 연장선임을 깨닫는다. 특히 전라도의 들판과 섬진강을 따라 걸을 때, 그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자신의 삶이 조화롭게 얽혀 있음을 느낀다.
길 위의 사람들
걷는 동안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여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여행길에서 만난 주민들과 나눈 짧은 대화, 길 위의 동행자들과의 우연한 만남은 작가에게 따뜻한 위로와 영감을 주었다. 특히 수원천에서 만난 한하운 시인의 시비는 저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읽으며, 저자는 소외받은 이들의 고통을 떠올리고 공감한다. 이처럼 길 위에서의 만남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다.
고흥 도착: 여정의 끝, 새로운 시작
작가는 서울 집을 나선 지 열닷새 만에 고향이자 안식처인 고흥에 도착한다. 걷기는 끝났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의 무게를 비우며, 새로운 가능성을 채운 여정이었다. 부모님 묘소를 찾아 무사히 돌아왔음을 알린다.
버선발로 뛰어나오실 것만 같은 어머니를 대신해 텅 빈 집 마당 정원에 가득한 잡초 속에서 새와 벌과 나비들만이 작가를 반긴다. 힘들었던 고난을 이겨낸 성취감과 무사히 종주를 마친 안도감, 큰 숙제를 끝낸 해방감, 그리고 기나긴 여정이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한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견한 삶의 새로운 면모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 지혜는 독자에게 ‘귀향’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걸음마다 비우다》는 우리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길 위에서 자신과 대면하며 얻을 수 있는 깊은 감동을 전해 준다.
걸음마다 피어나는 사색, 길 위에서 깨닫는 비움의 자유
―삼남대로, 백의종군길, 암행어사길에 이어 고흥길을 완성하다
서울을 떠나는 첫걸음은 설렘과 긴장이 섞인 특별한 순간이다. 안양천 대나무 숲길에서 시작된 여정은 저자에게 자연과의 첫 교감이자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임을 알린다. 곧이어 수원천에서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 앞에서, 저자는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떠올리며 사회적 소외와 아픔에 공감한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과 삼남대로를 따라 걸으면서는 조선시대를 살아간 역사적 인물들과 자신이 걸었던 길을 연결하는가 하면, 섬진강의 물소리와 주변 풍경 속에서 자연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경험하기도 한다.
여행 중 저자는 마곡사에서 하룻밤 템플스테이를 하는데, 사찰의 고요함 속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내면을 비우는 시간을 갖는다. 논산훈련소 앞을 지나며 저자는 군대 시절이라는 삶의 한 챕터를 떠올리며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본다.
섬진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 순천 낙안읍성에서 조선시대의 삶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여행의 역사적 의미를, 벌교의 전통 시장에서 만난 시장 상인들과의 대화를 나누며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과 활기를 느낀다. 걷기는 단순히 개인적 여정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와 사람들과의 연결임을 말해 준다.
저자가 영혼의 안식처라고 표현한 고향인 고흥에 도착하는 여정은, 이 여행의 절정이자 결말, 그리고 시작이다. 여정의 마지막,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린다. 고향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 비유를 구체화하는 행위, 몸과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구현함으로써 세상의 지형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라고 리베카 솔닛이 말했듯, 작가도 일종의 순례 여행에서 한 걸음씩 힘들게 몸을 움직여 목적지에 닿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고된 여정을 통해 목적지에 닿은 작가에게 어떤 변화가 있고 무엇을 얻었는가? 정신적 차원의 변화가 있었을까?
이 책에서의 여정은 단순히 고향으로의 물리적 이동을 넘어, 자기 성찰과 존재의 이유를 되새기는 심리적 여정으로 확장된다.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루소의 『고백록』)라고 했듯이, 걷기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사색의 도구이자 목적이 된다. 저자는 삼남대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 그리고 조선시대 유배객들의 길을 포함한 역사적인 경로를 선택하며 과거의 발자취를 되새긴다. 이렇듯, 길 위에서의 만남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고향이란 단순히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마음의 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귀향은 외적 여행이 아닌, 내면의 쉼터와 안식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