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혁명, 개인의 자유를 외치다!
막스 슈티르너의 통찰이 담긴
급진적 반박의 목소리를 만나다.

 막스 슈티르너의 슈티르너 비평가들(Recensenten Stirner’s)이 국내 최초로 독일어 원전에서 번역되었다이는 슈티르너의 대표작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비판을 직접 반박하는 그의 사상적 핵심을 담고 있다이 책은 19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에세이로 손꼽히며 슈티르너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논쟁의 지평을 확장하는 혁신적인 에세이이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20세기에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실존주의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뿌리가 되었다그는 19세기 당시에는 헤겔 사상에 대한 우파와 좌파 모두의 해석을 무너뜨렸고자유주의의 철학적 기반도 지적으로 무너뜨렸다또한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제시했다.
19세기 초반아직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이론적 지반이 형성되기 전에 출현했던 문제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당시 독일 사상가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1부의 2/3가량을 슈티르너를 비판하는 데에 할애했고스첼리가포이어바흐헤스와 같은 저명한 사상가들은 그의 책에 신랄한 논평을 가했다주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 ‘자기중심적 사람’,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이라는 문구들에 대해서였다슈티르너는 이미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방대한 저서를 통해 이를 주장했음에도그의 책에 가한 논평과 논적들에 대적하여그의 유일자’ 개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따라서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당대 주요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담아냄으로써그의 철학적 입장을 더욱 깊이 탐구하고자 한 시도이다슈티르너는 무엇보다도 보편적 인간의 개념을 부정하고, ‘개인의 독창성과 자기 주체성을 강조했다슈티르너의 비판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부터 실존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사조를 예고했으며, 21세기에도 주목받고 있는 철학적 원천이다.
 
 

막스 슈티르너, 철학의 해체와 창조를 외친 사상가

 막스 슈티르너(1806-1856)는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나 헤겔의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으며 철학적 기초를 다졌다그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자기 소유를 주장하며 기존 철학과 사상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그의 철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유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비판하며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실존주의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토대를 마련했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다슈티르너는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헤스스첼리가의 비판에 응답하며, ‘유일자라는 개념의 진의를 밝히고자 했다그가 말하는 유일자는 그저 공허한 단어가 아니라각 개인의 독립적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유일자는 단지 이름일 뿐이다그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개념을 통해인간이 스스로를 추상적 개념이나 이상적 범주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로 살아야 하며보편적 가치나 도덕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슈티르너를 비판했던 포이어바흐스첼리가헤스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적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며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유일자’의 개념

슈티르너는 유일자를 모든 개인을 지칭하는 단순한 이름으로 정의하며이는 개인의 고유성과 자유를 강조한다그는 포이어바흐헤스스첼리가 등 동시대 비평가들이 유일자를 내용 없는 공허한 단어라 비판한 것에 대해유일자는 특정 개념이 아닌 개별적 존재를 지칭하는 비()개념적 이름이라고 응수했다유일자는 고정된 속성을 지니지 않으며오직 개인의 행위와 자각을 통해 규정된다그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종교적 관념이나 보편적 인간 개념이 개인의 독창성을 억압한다고 주장했다.
 

’그대‘가 유일자의 내용이다

슈티르너는 유일자가 그대는 그대라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이는 개인이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고유하며특정 속성이나 보편적 개념에 의해 정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포이어바흐가 주장한 보편적 인간 본질에 반대하며그는 인간의 개별성이야말로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그는 모든 사람의 고유한 본질은 개념화될 수 없으며개인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실재적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자기중심적 사람’은 세계의 중심이자 자기소유자이면서 신성모독자이다

슈티르너는 자기중심적 사람을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정의하며그들이 외부의 신성한 가치나 이상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이익과 관심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그는 기존 사회와 철학이 개인의 자기중심적 성향을 억압하며이를 죄악이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해 왔다고 비판했다신성한 양심과 같은 외부의 강제적 가치에 맞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관심과 욕망을 지키며이를 통해 자기소유자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은 자기관심, 자기향유, 자기성취, 상호의존, 호혜주의이다

슈티르너는 개인들이 상호의존과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자발적 연합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 연합은 사회나 국가처럼 강제적 의무가 아닌각 개인의 자기 이익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관계로 구성된다그는 연합이 고정된 체제가 되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연합은 자유롭게 형성되고 해체될 수 있는 관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와 ‘창조가 깃든 무’

슈티르너는 개인을 창조가 깃든 무로 정의하며인간은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존재라고 보았다그는 인간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며, “나는 나이다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선언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는 외부의 관념이나 개념이 아닌오직 개인의 경험과 자기 자각에서 비롯된다.
 
슈티르너는 개인의 독창성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며보편적 개념종교적 관념사회적 이상이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한다고 비판했다그는 유일자와 자기중심적 사람’ 개념을 통해각 개인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고 창조하며자발적 연합 속에서 타인과 관계 맺기를 통해 자기 이익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이러한 철학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실존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친 선구적 사유로 평가받는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단순히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 아니다이 책은 기존의 관념을 해체하고각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슈티르너의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사유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주며철학적 자유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막스 슈티르너가 남긴 두 저작

 
슈티르너의 방대한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철학적 주장과 체계를 제시한 텍스트라면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이에 대한 구체적 반응을 분석하고 논박하는 실천적 논쟁 텍스트이다자신의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설명하는가 하면그에 대해 쏟아진 비판에 대한 견고한 방어 논리를 구축한다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전작에서 생략된 설명이나 모호했던 부분을 구체화하기도 했다특히특정 비판자들의 논지를 직접 인용하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재차 강조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와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슈티르너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저작들이다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철학적 출발점이라면슈티르너 비평가들은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슈티르너 사상을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두 저작은 서로를 보완하며슈티르너의 사상을 비판적 맥락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슈티르너 비평가들』과 막스 슈티르너에 관한 코멘트
자기중심성이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
“슈티르너가 포이어바흐의 ‘인간’, 또는 적어도 『기독교의 본질』에 나오는 ‘인간’을 거부한 것은 옳다. (……) 그러나 만약 개인이 우리의 ‘인간’을 위한 진정한 토대이자 출발점이라면, 자기중심성이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이며,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움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 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카를 마르크스에게, 1844년 11월 19일

역사상 가장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책들 중 하나
“막스 슈티르너의 1844년 걸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역사상 가장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며, 따라서 극단적인 책들 중 하나이다. 그 저작은 또한 현대 서양 사상사에서 가장 잘못 읽히고, 잘못 해석되고, 오해된 책들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일은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다.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저작은 항상 비판이 정확하고 정당한지 여부에 관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적 평판을 얻을 것이다.”
―제이슨 맥킨, 『좌파 이후의 아나키즘』의 저자

19세기에 등장한 중요한 철학적 경향
“슈티르너의 비범한 걸작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등 19세기에 등장한 중요한 철학적 경향을 예고하는 ‘지금까지 쓰인 가장 혁명적 책’으로 불려왔다. 여러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슈티르너는 헤겔 사상에 대한 우파와 좌파 모두의 해석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반도 지적으로 무너뜨렸다. 그는 또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제시했다.”
―존 F. 웰시, 전 루이빌 대학교 교수・독립 연구자

두 용어는 모두 공허하다!
“유일자, 또는 유일한 사람이 개념이 아니라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그리고 즉각적인 순간의 각 특정 개인을 위해 사용되는 공허한 이름인 것처럼,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도 개념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각자 즐기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함께 행동하는 각 개인들의 특정한 사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이름이다. (……) 두 용어는 모두 공허하다. (……) 두 용어는 결정된 속성이 없다. (……) 두 용어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것이 슈티르너가 말하는 것처럼 유일자도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도 우리 외부 및 우리 위에 있는 더 높은 힘으로 구체화되고, 신성화되며, 바뀔 수 없는 이유이다.”
―울피 랜드스트라이커, 『슈티르너 비평가들』 영어본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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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고흥까지 520킬로미터의 사색
김학배 지음
372신국판 변형(144*210)반양장18,000
2024년 11월 10ISBN 979-11-89333-86-7 03810
 

어느새 은퇴라는 시간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이 낯선 시간은 작가를 황홀한 고행길로 유혹했고그 유혹을 은근히 즐기고 싶기에 서울에서 고흥까지 두 발로 느리게 가는 여행을 택했다. 자동차 길로 400킬로미터, 4시간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왜 걸었을까.
 
걸음마다 비우다는 서울에서 전남 고흥까지 열닷새 만에 520킬로미터를 걸어가며 기록한 여정을 담은 인문 에세이이다저자는 느린 걸음 속에서 만나는 자연역사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책 속에 오롯이 담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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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 비유를 구체화하는 행위, 몸과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구현함으로써 세상의 지형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라고 리베카 솔닛이 말했듯, 작가도 일종의 순례 여행에서 한 걸음씩 힘들게 몸을 움직여 목적지에 닿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고된 여정을 통해 목적지에 닿은 작가에게 어떤 변화가 있고 무엇을 얻었는가? 정신적 차원의 변화가 있었을까?

이 책에서의 여정은 단순히 고향으로의 물리적 이동을 넘어, 자기 성찰과 존재의 이유를 되새기는 심리적 여정으로 확장된다.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루소의 『고백록』)라고 했듯이, 걷기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사색의 도구이자 목적이 된다. 저자는 삼남대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 그리고 조선시대 유배객들의 길을 포함한 역사적인 경로를 선택하며 과거의 발자취를 되새긴다. 이렇듯, 길 위에서의 만남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고향이란 단순히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마음의 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귀향은 외적 여행이 아닌, 내면의 쉼터와 안식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확장된다.

- 《걸음마다 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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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 소개



“520km의 도보 여행,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나와 세상.”


삶, 그리고 걷기의 인문학




걸음마다 비우고, 한 걸음씩 채우는 삶의 심연


―서울에서 고흥까지 520km 도보 여행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어느새 은퇴라는 시간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이 낯선 시간은 작가를 황홀한 고행길로 유혹했고, 그 유혹을 은근히 즐기고 싶기에 서울에서 고흥까지 두 발로 느리게 가는 여행을 택했다. 자동차 길로 400킬로미터, 4시간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왜 걸었을까.

《걸음마다 비우다》는 서울에서 전남 고흥까지 열닷새 만에 520킬로미터를 걸어가며 기록한 여정을 담은 인문 에세이이다. 저자는 느린 걸음 속에서 만나는 자연, 역사,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책 속에 오롯이 담아 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1866)에 따르면, 한성에서 전국 팔도로 나가는 10대 간선도로가 있다. 그중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을 삼남대로 또는 삼남길이라고 한다. 삼남길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과 상당 부분 겹치고, 소설 『춘향전』에서 어사길(춘향길, 금의환향길)도 이 길을 따라간다. “우리나라에서 도보여행은 자살길이다.”이라고도 하지만, 저자는 육체적 한계를 이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선시대 삼남길보다 더 긴 520킬로미터의 고흥길을 완주했다. 또한, 저자는 심리적·정신적 한계를 이겨내며 그가 마주했던 자연과 풍경, 그가 느꼈던 감흥과 사색, 그가 만났던 역사와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한 땀 한 땀 써내려 갔다. 《걸음마다 비우다》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 하나를 채우기 위한 단순한 개인의 여행기가 아니다. 걷기를 통해 삶을 다시 정의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과정을 담은 사색과 성찰의 기록이다. 빠르게 소비되는 현대 사회의 속도에 지친 당신에게, 이 책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는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당신에게 묻는다. “걸음마다 비우고, 당신의 삶을 다시 채워볼 준비가 되었는가?”


 



걷기의 미학: 느림의 가치


저자는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의식으로서, 탯줄이 묻혀 있고 육체가 성장하고 정신이 태동했던 곳,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할 곳”인 고흥에 이왕 갈 것이면 “부모에게 물려받은 두 다리로 걸어가” 부모님께 무사 귀환을 알리고 싶었다 한다. 책의 첫 부분에서 작가는 걷기의 느림과 불편함이 오히려 삶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고 말한다. 하루에 평균 9시간씩, 40킬로미터 가까이 걷는 동안, 작가는 길 위의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내면과 대화한다. 그는 “속도가 느릴수록 생각은 깊어진다”고 표현하며, 걷기란 단순한 이동을 넘어 자기 성찰과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어지는 점을 강조한다.


안양천의 대나무 숲길부터 삼남대로의 옛길까지, 섬진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작가는 걷는 동안 만나는 풍경과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비행기나 고속버스, 기차를 타고서는 창가에 스치는 사물과 풍경을 소화하기에도 바쁘다. 두 발로 걷는, 보다 느리게 가는 여행일수록 자신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삶의 사색


작가는 삼남대로와 백의종군길, 유배객들의 길을 걸으며 역사를 되새긴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을 따라가며, 그는 장군의 고난과 결단을 떠올리며, 다산 정약용과 김정희 등 조선 시대의 유배객들이 걸었던 길에서 그들의 외로움과 고뇌를 공감한다. 작가는 역사적 여정을 걸으며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걷고 있는 현재의 길 또한 역사의 연장선임을 깨닫는다. 특히 전라도의 들판과 섬진강을 따라 걸을 때, 그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자신의 삶이 조화롭게 얽혀 있음을 느낀다.


 

길 위의 사람들


걷는 동안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여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여행길에서 만난 주민들과 나눈 짧은 대화, 길 위의 동행자들과의 우연한 만남은 작가에게 따뜻한 위로와 영감을 주었다. 특히 수원천에서 만난 한하운 시인의 시비는 저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읽으며, 저자는 소외받은 이들의 고통을 떠올리고 공감한다. 이처럼 길 위에서의 만남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다.


 

고흥 도착: 여정의 끝, 새로운 시작


작가는 서울 집을 나선 지 열닷새 만에 고향이자 안식처인 고흥에 도착한다. 걷기는 끝났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의 무게를 비우며, 새로운 가능성을 채운 여정이었다. 부모님 묘소를 찾아 무사히 돌아왔음을 알린다.


버선발로 뛰어나오실 것만 같은 어머니를 대신해 텅 빈 집 마당 정원에 가득한 잡초 속에서 새와 벌과 나비들만이 작가를 반긴다. 힘들었던 고난을 이겨낸 성취감과 무사히 종주를 마친 안도감, 큰 숙제를 끝낸 해방감, 그리고 기나긴 여정이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한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견한 삶의 새로운 면모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 지혜는 독자에게 ‘귀향’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걸음마다 비우다》는 우리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길 위에서 자신과 대면하며 얻을 수 있는 깊은 감동을 전해 준다.


 


 


걸음마다 피어나는 사색, 길 위에서 깨닫는 비움의 자유


―삼남대로, 백의종군길, 암행어사길에 이어 고흥길을 완성하다


 

서울을 떠나는 첫걸음은 설렘과 긴장이 섞인 특별한 순간이다. 안양천 대나무 숲길에서 시작된 여정은 저자에게 자연과의 첫 교감이자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임을 알린다. 곧이어 수원천에서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 앞에서, 저자는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떠올리며 사회적 소외와 아픔에 공감한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과 삼남대로를 따라 걸으면서는 조선시대를 살아간 역사적 인물들과 자신이 걸었던 길을 연결하는가 하면, 섬진강의 물소리와 주변 풍경 속에서 자연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경험하기도 한다.

여행 중 저자는 마곡사에서 하룻밤 템플스테이를 하는데, 사찰의 고요함 속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내면을 비우는 시간을 갖는다. 논산훈련소 앞을 지나며 저자는 군대 시절이라는 삶의 한 챕터를 떠올리며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본다.

섬진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 순천 낙안읍성에서 조선시대의 삶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여행의 역사적 의미를, 벌교의 전통 시장에서 만난 시장 상인들과의 대화를 나누며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과 활기를 느낀다. 걷기는 단순히 개인적 여정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와 사람들과의 연결임을 말해 준다.

저자가 영혼의 안식처라고 표현한 고향인 고흥에 도착하는 여정은, 이 여행의 절정이자 결말, 그리고 시작이다. 여정의 마지막,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린다. 고향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 비유를 구체화하는 행위, 몸과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구현함으로써 세상의 지형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라고 리베카 솔닛이 말했듯, 작가도 일종의 순례 여행에서 한 걸음씩 힘들게 몸을 움직여 목적지에 닿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고된 여정을 통해 목적지에 닿은 작가에게 어떤 변화가 있고 무엇을 얻었는가? 정신적 차원의 변화가 있었을까?


이 책에서의 여정은 단순히 고향으로의 물리적 이동을 넘어, 자기 성찰과 존재의 이유를 되새기는 심리적 여정으로 확장된다.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루소의 『고백록』)라고 했듯이, 걷기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사색의 도구이자 목적이 된다. 저자는 삼남대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 그리고 조선시대 유배객들의 길을 포함한 역사적인 경로를 선택하며 과거의 발자취를 되새긴다. 이렇듯, 길 위에서의 만남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고향이란 단순히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마음의 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귀향은 외적 여행이 아닌, 내면의 쉼터와 안식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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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

쿠바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던 국가적 영웅이자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중요 인물이다. 그는 시인, 수필가, 저널리스트, 혁명가, 번역가, 교수, 정치이론가였다. 그는 1853년 1월 28일, 쿠바 아바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68년 스페인에 맞서는 쿠바의 독립 투쟁인 ‘10년 전쟁’이 일어나자,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동참했다. 1869년,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는 친구를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6년형을 받고, 이듬해 스페인으로 추방됐다. 1874년 사라고사 대학에서 법학과 인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그해 말 쿠바 귀국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다. 1875-1878년 프랑스를 거쳐, 주로 멕시코와 과테말라에 머물면서 쿠바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878년 ‘10년 전쟁’이 끝나자 귀국했다. 그러나 반정부 폭동의 주도자로 몰리면서 또다시 스페인으로 추방됐다. 그 후 1881년부터 1895년 쿠바 독립전쟁을 위해 떠날 때까지 주로 뉴욕에서 다양한 장르의 창작을 하고 신문 칼럼을 썼다. 이 시기 주요 시집으로는 『이스마엘리요』(1882), 『자유 시집』(1891)이 있고, 대표적인 에세이로는 『우리들의 아메리카』(1891)가 있다. 1892년 자신이 창당에 관여한 쿠바혁명당 대표로 선출된다. 이때부터 1895년까지 미국 전역을 포함해 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누비며 쿠바 독립의 대의를 설파하고 쿠바 독립전쟁을 계획한다. 1895년 1월, 뉴욕을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향한다. 2월 24일, ‘쿠바 혁명의 목적과 원칙’을 밝히는 <몬테크리스티 선언>을 발표하면서 독립전쟁을 선포한다. 4월 11일, 쿠바에 상륙해 현지 혁명군과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5월 19일, 도스 리오스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스페인군 진영으로 돌격하다가 총에 맞아 전사한다.

호세 마르티 작가 연보

1853년 1월 28일, 쿠바 아바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1남 7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 발렌시아, 어머니는 스페인 카나리아 출신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실제로 재능도 보인다.

1865년 멘디베(Rafael María de Mendive) 선생이 교장으로 있는 초등학교에 등록한다. 멘디베는 일생에 걸쳐 마르티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다. 또한 이곳에서 부유한 집안 출신의 발데스 도밍게스(Fermín Valdés Domínguez)를 만나 평생 깊은 우정을 맺는다. 이듬해 멘디베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중학교에 입학한다.

1867년 산 알레한드로 국립예술학교를 거쳐, 멘디베가 설립·운영하는 산 파블로 고등학교 2-3학년 과정에 등록한다. 그림보다는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고 습작을 시작한다. 이듬해에 멘디베의 부인에게 바치는 시를 과나바코아 지방 신문 《앨범(El Álbum)》에 싣는다.

1868년 스페인에 맞서는 쿠바의 독립 투쟁인 ‘10년 전쟁’이 일어나자, 쿠바 민족주의에 동감하고 쿠바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1869년 최초로 정치적 성향의 글을 써서 발데스 도밍게스가 발행하는 신문 《엘 디아블로 코후엘로(El Diablo Cojuelo, 말썽쟁이)》에 싣는다. 같은 해에 신문 《라 파트리아 리브레(La Patria Libre, 자유 조국)》를 창간하고, 가상 국가의 독립 투쟁을 그린 자신의 창작 드라마 「압달라(Abdala)」를 싣는다. 같은 해 10월,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는 친구를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발데스 도밍게스와 함께 체포되어 6년 징역형을 받는다.

1871년 감옥에 있는 동안 부모가 필사적으로 구명 운동을 했으나 실패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석방된 후 스페인으로 추방된다. 마드리드대학교(Universidad Central de Madrid)에서 공부하는 한편, 쿠바 독립을 고취하는 글을 쓰면서 활발한 반식민 운동을 한다.

1873년 사라고사로 이주해 1874년 사라고사 대학에서 법학과 인문학 학사 학위를 받는다. 그해 말 쿠바 귀국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한다.

1875년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를 거쳐, 주로 멕시코와 과테말라에 머물면서 쿠바 독립을 위한 집필 및 투쟁 활동을 계속한다. 1877년에는 과테말라 국립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인문학 강의를 하기도 한다. 쿠바 망명객의 딸인 카르멘 사야스 바산(Carmen Zayas Bazán, 1853~1928)과 결혼한다.

1878년 2월에 ‘10년 전쟁’을 끝내는 산혼(Zanjón) 휴전 조약이 체결된다. 이에 따른 사면령이 내리자 아내와 함께 귀국한다. 그해 11월 22일 외아들 호세 프란시스코(José Francisco)가 태어난다.

1879년 쿠바에서의 변호사 활동이 거부된다. 이에 교사로 일하며 독립을 위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일어난 반정부 폭동의 주도자로 몰리면서 또다시 스페인으로 추방된다.

1881년 프랑스와 뉴욕을 거쳐 베네수엘라에 도착해 《레비스타 베네솔라나(베네수엘라 리뷰)》 잡지를 창간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인 글이 독재자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의 심기를 건드려 다시 뉴욕시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1895년 쿠바 독립전쟁을 위해 떠날 때까지 주로 뉴욕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창작을 하고 신문 칼럼을 쓴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라 나시온(La Nación)》에 실리는 정기 칼럼으로 중남미 전역에서 명성을 얻는다. 이 시기에 나온 주요 시집으로는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드러낸 『이스마엘리요(Ismaelillo)』(1882), 자유를 주제로 한 『자유 시집(Versos libres)』(1891)이 있고, 대표적인 에세이로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우리들의 아메리카(Nuestra América)』(1891)가 있다.

1892년 자신이 창당에 관여한 쿠바혁명당(Partido Revolucionario Cubano) 대표로 선출된다. 이때부터 1895년까지 미국 전역을 포함해 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누비며 쿠바 독립의 대의를 설파하고 동참을 호소하고 군자금을 모은다. 또한 혁명군 지도자인 막시모 고메스(Máximo Gómez),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 등과 접촉하며 쿠바 독립전쟁을 계획한다.

1895년 1월, 뉴욕을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향한다.

2월 24일, 막시모 고메스와 함께 ‘쿠바 혁명의 목적과 원칙’을 밝히는 <몬테크리스티 선언>을 발표하면서 독립전쟁을 선포한다.

4월 11일, 쿠바에 상륙해 현지 혁명군과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5월 19일, 도스 리오스(Dos Ríos)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스페인군 진영으로 돌격하다가 총에 맞아 전사한다.

1898년 쿠바 독립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비화한다. 미국이 승리하면서 마침내 쿠바는 독립을 얻었으나 이후 3년 동안 미군정 치하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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