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기억을 조장하다


올해는 꼭 읽고 싶은 책들이다. 정치란 곧 기억을 조장 또는 조작 나아가 강제하는 것이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대한 거부반응은 결국 우파의 정치학이다. 백동춘의 주장처럼 그건 '강제된 앎'이다. 승자의 관점으로만 해석되는 역사, 강자의 원리로만 풀어내는 역사관이야말로 결국 왜곡된 정치 기억인 셈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억의 정치학>은 이 부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멀리서 들은 그의 주장은 현대를 읽은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허버트 허시는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를 통해 인종청소를 단행하는 무지한 행동이 왜 일어나는지 증명한다. 그것은 미움의 묵은 기억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제노사이드를 해결하는 방법을 또 다른 기억을 이용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생존자의 기억'과 '증언'을 보관하고 공유할 때이다. 미움의 기억이 아닌 '생존의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80년 광주 항쟁이 일어날 때 필자는 광주에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십대 후반이 되고서야 광주 항쟁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멀리서 아련하게만 보고 들었지 단 한 번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군부가 그동안 일관적으로 펴온 '조작된 기억 교육' 때문이었다. 이번 선거는 이러한 조작된 기억은 승자의 관점에서 일관적으로 주입해온 '강제된 앎'의 승리였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그들이 제공하는 인스턴트 정보 때문이다. 이곳에 익숙해 지면 날것의 사실을 왜면하고 '똘아이'로 본다. 자 보라, 죽음의 시체들을.






















권귀숙은 <기억의 정치- 대량학살의 사회적 기억과 역사적 진실> 이란 책에서 제주4.3항쟁을 다르게 듣고자 한다. 공동체의 집단 기억은 전승된다. 역사 기억은 대체로 남성들의 것이다. 제주항쟁 역시 다르지 않다. 권귀숙은 이러한 집단 기억의 왜곡을 여성의 증언을 통해 바르게 보기를 원한다. 제주에 거주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역사를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그녀는 최근에 주목받는 사회학에서 기억 이론'을 기반으로 증언을 재진술 한다. 그녀는 역사적 텍스트 자체보다 기억이 형성되고, 전수, 재현되는 사회적 과정을 무게 중심을 둔다. 




왜 4.3 다큐멘터리에서 사건 자체에 대한 증언·해설·설명 등을 주로 남성이 맡고 있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역할에 배치되어 있는가? 물론 남성을 국가의 중심에, 여성을 국가의 주변에 배치한 스토리 구성과 관련이 있다. 주변에 배치된 여성들이 사건의 중심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성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사회화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이나 사회화 문제 외에도 남성의 증언과 여성의 침묵은 젠더에 따른 기억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다. 4.3 증언에 관한 학술조사를 보면 실제로 여성이 사건 자체에 대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건의 중심이 아닌 일상생활이나 사건 이후의 생활사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다르게 말하면 여성과 남성이 기억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의 제작 목적이 4.3의 재해석에 있기 때문에 여성의 기억보다 남성의 기억과 증언이 더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즉 4.3 진상규명 운동이 사건의 원인, 과정, 피해 등 과거를 재조명하는 데 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의 증언이 더 필요햇던 것이다. - 본문 237쪽에서





 성공회대 교수인 박원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이란 책을 알아보는 가운데 서발턴이란 낯설은 단어를 발견했다. 서발턴, 처음 듣는 단어다. 찾아 보자. 

서발턴(하위주체) 또는 민중 또는 노동자

‘서발턴의 역사’ 엘리트 권력 향해 던지는 짱돌(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95480.html)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이후 25년

(http://greenbee.co.kr/blog/1802)

이 단어는 아마도 사회적 용어인 듯하다. 노동자이며 민중들을 표현할 때 서발턴이란 단어를 통해 억악된 실존을 우회적으로 설명하려는 듯 보인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더 알아 보았다. 서발턴(subaltern)은 영어가 아닌 독일어이다. 네이버 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subaltern [zup|al|tεrn]  [형용사]

1. (untergeordnet) 하위(下位)의, 직책이 아래인;종속되어 있는;자주성이 없는 

2. [멸어] 비굴한 


눈에 띄는 단어는 '비굴한'이란 단어다. 종속된 인간,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이전 책인 <여공 1970-그녀들의 반역사>를 집필하고 다시 박정희를 조명하는 것은 서발턴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다루기를 원하는 갈망 때문일 것이다. 


<여공 1970-그녀들의 반역사> 이후 5년만의 방황과 침묵을 깨고 출간한 김원의 역작.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는 바로 1960~70년대의 서발턴들을 불러내 그들의 삶을 재현한 작업이자 그 이론적인 고민까지 풀어낸 책이다. 저자는 이 서발턴들을 ‘유령’이라는 은유를 통해 호명한다. 


지배 담론은 물론 저항 담론인 민중사에 의해서도 배제되고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 이 유령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지배적인 앎에 의해 배제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한, 전체적 사실에 부수적으로 딸린 부스러기이자, 심지어 저항 담론에 의해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이 존재들을 역사학에서는 ‘서발턴’이라고 부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박정희 시대의 서발턴들은 아직도 담론과 재현의 바깥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 ‘더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을 다시 불러와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유령과 같은 그들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근대 역사서사와 제도화된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시작이다. 또한 지금도 현실을 지배하려는 박정희라는 ‘아비’의 유산을 진정으로 부정하는 출발점이다.


저자는 단언컨대, 아직도 유령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양한 미래 역시 꿈꿀 수도 없음을 주장한다. 그 시대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누락된, ‘유령’들의 기억들을 다시 불러오지 않는 것은 기억을 침묵으로 정지시키고 상상력의 가능성을 제약하며, 미래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발턴들의 증언을 공유하라.


아마 이게 답일성 싶다. 그동안 승자의 논리에 의해 서발턴들의 증언이 침묵을 강요 당함으로 배제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그것들을 끄집어 내야 한다. 서발턴들은 연대하고, 자신들의 목적과 방향을 명료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언들이 필요하고 연대가 필요하다. 더이상 지배자들의 논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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