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6회 

위험한 여자들의 누드 책 읽기



홀딱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여인이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기가 불가능하다. 주변을 서성이는 아들이 다가와 "아빠, 이상한 책 보지 마세요!' 할 것 같다. 아빠의 체면이 구겨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몰래 불수도 없다. 의도하지 않게 책 읽기 자체가 불안하다. 중요한 부분을 가리기는 했지만 과하다 싶은 그림들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다. 책 제목에 끌려 샀지만 마음 편하게 읽을 수가 없다. 그녀들은 왜 이런 모습으로 책을 읽는 것일까? 저자인 슈테판 볼만은 어떤 의도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일까




-데오도르 루셀(1847-1926)


결국 화장실로 숨어 들어갔다. 은밀하게 책을 일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화장실이다. 한 곳 더 있다. 그곳은 차 안이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실오라기 걸치지 않는 누드의 여성들의 책 읽기를 훔쳐 볼 수 있다. 책 읽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죄 짓는 기분이다. 부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는 책 읽기가 아닌 그림 읽기임을 보여 준다.

 

고작 17쪽 읽었다. 한쪽 페이지 전체를 그림으로 채웠다. 그곳엔 1760년경에 앙투안 보두앵이 그린 "책 읽는 여자"가 그려져 있다. 피상적 훑어보기에서는 찾지 못했던 묘한 장면이다. 여인은 가슴을 드러낸 채 왼쪽에 읽던 책을 내려놓았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다. 곧바로 외출해도 될 완벽한 준비를 마친 후작부인은 정신이 잃은 표정이다.

 

"코르셋 단추를 풀고 황홀한 상태로 안락의자에 누워 있는 여인의 치마 밑으로 루소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16)

 

루소가 말하는 한 손으로 책 읽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니 알 길은 없지만, 그림은 여전히 불안하게 한다. 나태함과 나른함, 적어도 황홀경에 빠져 길을 잃은 여인의 모습이다. 여인의 좌우에 책이 있다. 왼쪽은 <여행의 역사>라는 큼지막한 책이 펼쳐져 있고, 여인이 읽다 황홀경에 빠진 왼손에 들려진 책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다. 폐쇄(閉鎖)된 공간에서 갑자가 누군가 들어와도 바로 정색할 수 있는 옷차림은 속이기 위한 것이다. 왼손에 들려진 손바닥만 한 책은 은밀함을 말한다. 그녀는 분명 조용히 책을 읽었을 것이고, 아무도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짐작컨대 외설적인 책인 분명하다.


감각적 몽상에 압도된 음탕한 자세의 여인을 그림으로써 그는 점점 위선적으로 변모해가는 고객을 고려했다. ... 그녀 자신의 세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방탕함이 기꺼이 휩쓸려 갈 준비가 된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지닌 세계상이 중요하다.”(18)


이 그림은 의도된 것이다. 고객이 앙투안 보두앵에게 주문한 것이다. 고객이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음탕한 그림을 요구한 것일까? 18세기는 16세기에 발병된 인쇄술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거대한 크기의 책뿐 아니라 소책자도 만들어 냈다. 작은 크기는 휴대성의 편리함뿐 아니라 은밀함까지 보장해 주었다.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여자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은밀한 독서로 펼쳐 나갔다. 아직은 아니지만, 은밀한 독서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준 셈이다.

 


 



"독서는 유쾌한 고립 행위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의 바르게 자신을 접근하기 힘든 존재로 만든다."(47) 독서는 책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현실세계에서의 도피이자 단절이고, 고립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독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결국 침대라는 유일한 피난처로 숨어 들어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곳, 들어와서도 안 되는 곳이다. 침대는 세상의 짐과 의무를 벗어내는 공간이자 휴식처다. 그들은 정말 옷까지 홀랑 벗어 버렸다. 남성이 공개적 책 읽기에 집중했다면-남자는 과시적이므로-여성들은 내밀한 책 읽기에 빠져들었다. 그곳에서는 딸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고, 첩도 아니다. 자유인이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장 자크 에네르가 그린 '책 읽는 여자'. 막달라 마리아는 언제나 그림의 즐거운 주제였다. 그녀는 창녀였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이다. 장 자크 에네르는 막달라 마리아의 벌거벗은 모습과 흐릿하게 흐트러뜨린 기법은 몽환적 책 읽기를 연상케 한다.

 

 

데오도르 루셀(1847-1926)이 그린 '책 읽는 여자'는 창녀다. 의자에 걸쳐진 옷은 기모노다. 이 그림은 1887년 새로운 고향인 런던에서 전시했다. 2.5제곱미터의 어마어마한 크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네의 그림인 <올랭피아>와 연관 시켰다. 올랭피아는 잠시 후 방문 하게 될 손님을 기다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잠시 틈을 타 독서를 즐기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독서가 종종 식탐과 성적 타락과 결부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대에서 은밀하게 독서하는 여자들은.

 


 



 

스티븐 로저 피셔는 <읽기의 역사>에서 토마스 칼라일의 부인인 제인 칼라인의 말을 빌려와 "남에게 빌려온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남몰래 간통하는 느낌"(381)이라고 말한다알베르토 망구엘도 침대에서의 책읽기는 곧바로 '은밀함'으로 끌고 간다.

 

"그런 책 읽기는 욕망과 죄스럽기까지 한 나태의 영역인 침대 시트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금지된 장난을 하는 듯한 스릴이 느껴지기도 한다……책을 침대로 가져간다는 일상적인 문구도 나에게는 언제나 관능적인 기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227)

 

여성들의 누드 책 읽기는 종속된 인간에서 자유로운 주체로의 엑소두스(Exodus)결국 염려한 일을 일어나고야 말았다여성들은 더 이상 침대에서 책을 읽고 싶지 않다이젠 독립적 존재로서 거리에서 커피숍에서 버스에서 학교에서 당당하게 책을 읽는다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은 옷에 걸쳐진 모든 짐을 벗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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