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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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버림받은 실존의 파편들

그저 유명한 사람이라기에 서점에 들르자마자 '김훈 소설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네 몇 권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내어준 책이 흑산과 남한산성이다. <흑산>부터 읽었다. 아무래도 정약전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인 것 같아서였다. 표지를 넘기고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실망과 놀라움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문장 하나하나에 깊이 박혀 있었다. 처절하게 써내려간 문장은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몰아갔다.

김훈의 문장이 좋다고 하기에, 그분의 이름이 유명하다고 하기에 그저 집어든 책인데 받은 충격이 너무 강하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듯한 혼미함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왔다.
'잘 못 샀나?. 그냥 다른 소설책을 살걸!'
약간의 후회가 밀려 왔다. 싫어서가 아니다. 마약처럼 영혼의 미각을 중독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김훈의 작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유난히 바쁜 10월과 11월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잠시 읽다 한쪽에 내팽개쳐두고 두어달을 모른체 할 수도 없는 노릇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밤을 새서라도 다 읽어야할 압박감이 파죽지세로 밀려온다. 기분좋은 흥분, 그러나 절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도 함께 밀려 왔다. 젠장 무슨 소설이 이래!


개인적으로 정약용은 조선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정약용을 세속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신앙을 부인하고 세속으로 돌아가 목숨이나 구걸하며 사는 나약하고 추한 존재로 비춰진다. 실망이다.

이 소설도 실망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가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인줄 알았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약전은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오히려 수많은 버림받고 소외되어 현세를 떠들았던 실존의 파편들만 잔뜩 책을 메우고있다. 그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으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코끝이 찡해져서 책을 몇 번이나 덮어야 했다.

실망이다. 좀더 재미난 이야기, 어떻게 그렇게 멋진 자산어보를 쓸 수 있었는가를 학문적 관점에서 풀어가는 줄 알았다. 공부법, 책쓰는 법 등을 배우려는 얄팍한 나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같아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괘씸하다. 편하게 읽고 싶은데 양심을 깨우는 문장들이 심장을 찔러대서 따금따금하다.

흑산도의 어부들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미치도록 부패한 정부가 미웠다.

"슬픔은 비빌 곳이 없어서 지층처럼 (흑산도)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 쌓였고, 사람들은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87)

김훈의 소설을 처음이다. 아니 김훈의 책 자체가 처음이다. 내가 김훈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고, 불편한 진실을 자꾸 들추어 낸다는 것이다.

숨막힐듯 풀어내는 그의 수사학적 현란함에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전혀 가볍지 않다.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혔지만, 돌아올 때는 지난온 길이 앞으로 뻗었고, 갈 때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 다시 잊혔다. 길은 늘 그 위를 걸음으로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 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43)

주저앉아 울고 싶은 대목도 있었다. 버려진 인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젖공장이 되어 젊은 나이에 죽어간 '아리의 어미'는 유배지 흑산도의 상징 그 자체였다.

"젖 잘 나오는 여종은 팔려간 상전집 아이가 두 돌이 지나 젖을 떼면 몸값이 반으로 떨어져서 전의 상전한테로 다시 펼려왔다. --- 아리의 어미는 아리를 낳고 젖이 흔했다. --- 장단진사의 아들은 두 돌이 지나서 젖을 떼었고 아리 어미의 젖은 마르지 않았다. --- 아리 어미의 젖을 첩의 아들에게 먹였다. 장단에서 아리 어미는 젖 잘 나는 여종으로 소문나서 이 집 저 집으로 팔려 다니며 젖을 빨렸다. 접이 마르면, 상전들은 아리 어미를 다시 남자 종과 붙여서 임신시키고 자식을 낳게해서 젖을 뽑아내었다. --- 아리 어미는 임진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장단에서 젖을 빨리다가 죽었다. --- 마흔 다섯 살에 죽었다."

이건 분명 이용 당한 거다. 젖이 나오지 않으면 남자종과 억지로 '교접'하게 해서 젖이 나오로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흑산에는 이렇게 실존의 파편들이 널려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이름도 없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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