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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ㅣ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문득 생각난 책이 있었다.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더불어 숲>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바로 전, 운전면허학원을 다니며 읽었던 책이었다. 전 세계를 돌며 그 곳에서 보고 느낀 바를 적어내려간 그 책은 나에게 내 자신의 배경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책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중간중간 막히는 대목이 참 많기도 했지만 끈덕지게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제목 그대로의 '더불어 숲'의 의미만큼은 어렵지 않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강대국에 가서 그들의 지배를 받던 약소국을 생각하는 것, 문명의 찬란함에서 그 문명의 그늘을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통해, 입시라는 긴 경쟁의 터널을 막 뚫고 나온 나는 뭔가 위안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몇년 뒤,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을 직접 듣게 되었을 때의 그 벅참과 감격은 지금도 두근거릴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보며 <더불어 숲>을 떠올렸던 것일까? 아마도 여느 여행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인문학적 성찰(?)'이 담겨있을 거라는 기대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명', '그리스', '인간의 탁월함', '근원' 등의 단어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그러하였고, 게다가 저자가 박경철이었기에. 그러니까 정치인 안철수와 돋보이는 우정을 보여준 그였고, 당연히 그러한 우정이 정치 파트너십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절대 정치계에 입문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렇게 여행기를 들고 찾아온 그였기에 나는 이 책이 정치의 최후방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결국에는 '정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올바른 통치란 무엇인가?'와 같은 탐색의 결과물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 예상은 절반 정도 맞았던 것 같다. 저자가 젊은 시절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떠난 여행이라는 점, 이 책이 그 점을 매개로 하여 전개된다는 점을 몰랐기에, 이 책의 처음에는 '내 생각과는 달랐구나!', '문학과 여행이 결합한 여행기인가보다!' 하면서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간접적으로나마 그가 위의 질문과 관련하여 어떤 성찰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50%의 확률이었던 것 같다.
그럼 감동도 <더불어 숲>만큼이었을까? 아직까지는 아니다. 이유는 이 글의 제목 그대로이다. 너무나 교훈적이어서 그 무게가 무거웠다. 거두절미하고,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거리감을 표현하자면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두 책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날 것 같다. 우선 인용해 본다.
... (중략) 비록 인생이 부조리한 것(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올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설령 바위가 또다시 굴러떨어지더라도 그것에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기필코 올려놓겠다'는 목적은 환상이다. 부조리한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끝없이 도전하는 행위, 그것만이 진실이며 거기에서 역설적인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삶은 좌절이나 권태가 아닌 고독한 투쟁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숙명지워진 존재가 아닌 온전히 실존하는 내가 된다는 뜻이다. (중략) ...
<문명의 배꼽, 그리스> 97쪽 中
... (중략) 피투성이가 된 손발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올리면 다시 평지로 굴러내리고 마는 절망의 무한궤도 속에서 과연 우리는 그 절망으로부터 '도전과 책임'의 의미를 자각하고 그것을 삶의 가치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수긍할 수 있는가. 그러한 자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비정한 폭력이라고 단어하였습니다.
절망으로부터 도전과 책임의 의미를 자각하고 그것을 삶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초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초인적인 초상을 들어보이는 것은 환상을 강요하는 것이며 환상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기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했던 당시의 열정이 떠오릅니다.
<더불어 숲> 51~52쪽 中
카뮈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는 <문명의 배꼽, 그리스>의 저 대목을 읽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가 카뮈를 잘못 이해해왔던건가?' 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지금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인간이 살아야 하는 부조리한 삶, 부조리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좌절하지 말고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껴라는 대목에서 잠깐 멈춰서 골똘히 그 의미를 생각하다 결국엔 화가 났다. 난 자꾸 '인간'인 나에게서 보이는 어쭙잖음, 나약함이 먼저 보이는데 왜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있는가하고 묻고(라고 쓰고 '따지고'라고 읽는) 싶어졌다. 이 지점이야말로 내가 이 책 전체에서 느끼는 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아니라 '교훈적인, 너무나 교훈적인' 결과물들이었다.
한편으론, 이 모든 것이 탁월함을 찾아가는 여정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동양 중심의 판도를 서구로 가져온 그리스 문명. 그 거대한 흐름의 시작을 연 이들에게서 어떤 종류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또 그 근원을 찾고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인,
가슴 뛰는 말이었다. 이성이 신에 굴복하고 영원히 그 너머의 것을 동경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이성은 어둠 속을 방황하며 추위에 떨고 있었을지 모른다. ... (중략) ... 그의 말대로 불행은 결코 인생의 교훈이 될 수 없으며 위대한 비이성적 모험은 영원히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그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며, 비록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장렬한 순교일 것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 61쪽 中
을 보면서도, 나도 가슴은 뛰는 말이나 문명을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의욕을 꺽이게 만들었다. 차라리 인간의 탁월함을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발견하기 보다는 어떤 상황에서 그 탁월함이 나올 수 있었는지에 방점을 찍고, 그곳에 현미경을 들이대야 하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스파르타 시민들에게서 용기와 우정으로 대표되는 탁월함을 읽어낸 점은, 이미 그런 해석이 있었던 것도 같으나,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했다. 더불어 그 이면에서 스파르타의 가혹한 노예제도를 언급하며 그들의 이중성을 언급한 것은 스파르타를 언급함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니 익숙한 배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체적인 비중이 스파르타 시민들의 탁월함에 좀 더 쏠려있는 듯 것처럼 보였고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책과 계속 충돌했다. 그럼 다시 부제 탓을 할 수 밖에 없겠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왜 저자가 인간의 탁월함을 찾아나선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스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 이것이 답변이라면 난 마냥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하겠다.
그렇기에 나는 앞서 <더불어 숲>에 대한 감상과 이 책에 대한 감상을 견주며 '아직까지는'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러한 조건을 단 이유는 이 책이 총 여정의 10/1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를 보고서야 이 시리즈가 10권으로 기획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 그만큼 큰 작업에서 이 한 권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1권이니 서문 정도에 해당하는 것 아니겠는가?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이 책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그림 속에 이 그리스 시리즈 10권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를 비롯하여 문명이라 불리지 않는 존재에 대한 기록도 들어가 있길 바라본다. 아마 난 그 그림 속에서야 지금의 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재고해보고, 더불어 내 의문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부제가 여전히 인간의 탁월함이라면 다시 만나기조차 좀 힘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