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평점 :
"아! 맞아! 안경세공사 일을 하며 학문을 했던 이가 있었는데! 그게 스피노자였지!"
학문 그 자체가 생계와 이어지지 않는, 그러니까 학문을 '입에 풀칠하는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고 오로지 학문적 즐거움만을 위해 공부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던 중에, 안경세공사일을 했다는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나를 고무시키는 사례 중에 하나였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학문 이외의 일을 하면서도 훌륭한 사상가가 된 사람이 있어! 그래 못할 일은 없지!' 그리하야 나는 지난 2년간 묵묵히 돈을 벌었으나, 결국 일과 공부는 병행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얼마 전 일을 그만두었다. '일하며 공부하기 정말 힘든데 참 옛날 사상가들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역시 넘을 수 없는 벽이었어.'하는 괴리감 언저리에 스피노자가 있었다. 어쨌든 스피노자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경험은 이 정도였다.
그런데 <에티카>라니...! 물론 이 책은 <눈물 닦고 스피노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 이전에 <에티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에티카>를 읽어야 해! 그러고 나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원전을 읽지 않고, 그에 대한 해석서를 먼저 읽을 경우 원전 혹은 원저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몇년 전부터 해설서에 해당하는 것들을 멀리했던 터였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선정소식을 보자마자 <에티카>에 대한 정보를찾기 시작했다. 보자하니 방대한 양에, 읽고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글이 다수였다. 시간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능력의 문제로 주어진 기간 내에 <에티카>를 소화하기란 어려운 일로 보였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책 <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집어들었다. 의심의 눈초리을 가지고 뾰로통한 입을 내밀며 이 책의 첫장을 폈다.
이 책에 호의를 갖지 못한 이유가 또 하나있는데, 그건 '위로'라는 단어때문이었다. 요즘 어디서나 '힐링', '치유'라는 단어들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접근들이 위로해준답시고 자기 자랑만 한다거나, 듣는 사람의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위로들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진정으로 위로를 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나는 제대로 된 위로를 한 번이라도 해준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면 정말 위로란, 치유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요즘 여기저기서 성행하고 있는 '위로', '힐링, '치유'라는 단어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 표지에 그 단어가 떡 하니 박혀 있다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난 뒤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위로받고 싶은 나를 부정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시답지 않은 위로에 진절머리가 나서 위로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위로받고 싶은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했던 것 아닐까? 생각보다 이 책은 길을 걷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관계망의 변화, 변용, 사랑 등의 단어들을 읊조리게 만들었다. 나오는 얘기마다 나의 얘기 아닌 것이 없었고, 그에 대한 치유론조차 나의 마음을 동요케 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이 책에서도 데카르트나 프로이트와의 대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내는 것처럼, 모든 마음의 이상 증상들의 원인을 개인의 심리상태나 고정된 자아에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계발서에 손이 가면서도 그 끝이 늘 허무한 것은 '모든 것이 나하기 나름'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살기에는 '나 혼자만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게 변하는 건 아니더라'라는 현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우고 또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가 바로 관계망이다. 이 지점은 어쩌면 미묘한 지점일 수도 있다. 내 마음의 문제는 내가 원인이 아니라, 내가 놓인 환경때문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는 말처럼 그 관계를 떠나버리면 되는 건가? 이렇게 오독이 되려는 순간에 다행히 어떤 실마리를 잡았다.
"관계는 새롭게 배치되고 만들어 질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이 바꿔야 하는 건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계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망을 바꿀 것인가?
바로, 사랑의 실천.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 두번째 단어이다. 사랑, 변용, 횡단, 되기 등의 단어로 나타나는 이것은 엄청난 기대에 비해서 다소 허무해 질 정도 소박한 어휘들이기는 하나, 이것만큼 개인적으로 마음에 와 닿은 것도 없는 듯 싶다. 언젠가 나만의 원리처럼 여기게 된 것인데, 내가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면, 꼭 그 결과는 기억에 남고, 기록에 남을 정도로 좋게 나왔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는 데 말이다. 나름 이런 경험들이 쌓이게 되다 보니,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어진달까? 스피노자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미지의 것을 향한 욕망의 흐름"이라고 표현하며 관계망을 바꾸기 위해서는 "미세한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여 "생활의 작은 곳부터 혁명"하라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무거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 또한 자주 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변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 듯 싶다. 무엇에 구멍이 난 걸까? 무엇이 빈 것일까?
자유인이 되자! 그렇다. 마지막으로 내가 배운 단어는 자유인이다. 죽음과 욕망과 광기를 응시하는 자유인. 난 진정한 자유인이었는가? 기본적으로 유한자로서의 나를 전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얼마 전 친구가 결혼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어울리던 친구 7명 중, 최초의 결혼이었다. 며칠 간 좀 어리둥절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너무 조용해서였던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어른이 되면 겪게 될 일들, 예를 들면 결혼이나 출산 혹은 내가 바라던 무언가가 되는 것 따위는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 그것을 예비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결론에 가서는 섬광처럼 한번에 빛을 발산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과정부터 결과까지가 하나하나 인식되고,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특별한 무언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물 흐르듯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자체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별게 있진 않았다. 엄마와 이런 얘기를 하다 내린 결론은 '인생 별 거 없네.'였다. 그냥 어떻게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고, 일하고, 그러다 죽는 것. 그러니까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소한 느낌을 처음 알았다.
유한자 얘기를 하려다 위의 얘기를 꺼냈다. 맥락을 잘못 잡은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기간과 위의 일이 비슷한 시기로 맞물리면서 묘하게 오버랩이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인생은 별 게 없으니, 오히려 별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유사하게, 인생은 유한하니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욕망이 생성시키는 색다른 힘과 역능 속에서" "자신의 관계를 선택하고 결정하며" "창조적인 역능에 기반하여 세상을 바꾸려는" 가장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재적 역능이니...!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인이고, 내가 자유인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최근에 보고 들었던 말 중,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왜 사람은 예속을 영예로 삼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처럼, 나도 마지막엔 예속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인의 불안정함 대신 안정감, 정확히 말하자면 표면상의 안정감을 선택하는 것. 마치 수면 아래로 열심히 발을 굴리는 백조처럼 말이다. "고정된 역할을 강조하는 가족은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스피노자는 말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누구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박차고 나온 스피노자일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래서 눈에 띈 문장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과 '스스로 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스피노자의 말이 백번 맞는 것 같은데도 세상은 왜 데카르트와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냐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스피노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가 반일 것이고, 나머지 반은 우리 모두의 용기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오.' 혹은 '내 탓이오.'하는 것은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나의 사상이 오랜 세월동안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려면 쉽고 단순해야 할 것 같은데, 위의 두 사상의 그러했던 것 같다. 적극적으로 바꾸려기 보다는 상황을 해석만하고 그냥 받아들이려는 수동적인 자세가 상황을 신속하고 간결하게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런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기에 적당한 사랑을 갖고는 위의 세 단어를 내 일상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갑옷'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상황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는 미치도록 강렬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사랑은 미치도록 사랑할 관계를 찾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러면 그 관계를 어떻게 찾지? 그래,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 "변용의 흐름이 개척해낼 새로운 지평에 접속하기 위해서 스스로 공동체와 접촉 경계면을 만드는 기본적인 방법부터 스스로가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를 다양한 관계망 속에 노출시키고, 기존의 관계망은 더 깊이있게 만드는 것이 내가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자꾸 되뇌여야 할 문장이다. 그러면 이것이 나의 내면 안에 잠들어있던 자유인을 깨워 관계망의 재배치를 통해 사랑과 변용의 내재적 역능을 끌어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