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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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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다산 선생님의 책을 쥐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분주히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반드시 챙기는 책이 「다산어록청상」이다. 다소 졸리는 시간 전철 안에서 먼저 그 분의 말씀 한마디를 읽는다. 오늘은 수신 편 ‘말조심’의 문구가 눈에 확 잡힌다. “백 마디가 다 믿음직해도 한 마디 거짓말을 하면 귀신의 무리가 된다.”는 말에 온 정신이 맑아진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의 정 중앙에 맞아 부르르 떨듯 심중의 한 가운데를 내리치는 문구에 잠시 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이다.

눈을 지긋 감는다. 지금까지 내 입에서 튀어나간 말들을 되짚어본다. 무심코 내 뱉은 말이 아내와 아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성급하게 툭 내 던진 말들이 상대에게 반감을 사지는 않았을까? 모르는 것을 아는 체 교묘히 사탕발림으로 얼버무리진 않았을까? 거짓으로 꾸며낸 말로 사적인 이익을 챙기지나 않았을까? 이런 저런 잡념에 마음이 혼란스럽다. 내 말 속에 나의 얼굴과 마음이 담겨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하며 살아온 나를 반성해본다. 이렇게 이미 지나간 일들을 꼬치꼬치 따져보는 것은 오늘의 나를 다잡기 위한 성찰의 과정이다. 이런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 책 10편의 글속에 담겨있다.

 총 10편으로 구성된 글을 다 읽고 나니 나의 잘못된 삶이 백일하에 드러나 마치 마음을 들여다보는 맑은 거울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질 못하고 믿지 못할 물질적 부(富)를 쫓고 있는 나. 내 스스로 나를 업신여기고 가볍게 여겼던 나. 내 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를 게을리 했던 나. 사소한 이익에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나. 작은 업적을 자랑삼아 크게 부풀려 말해왔던 나. 책 읽기를 소홀히 하고 정신을 산란케 하는 잡록들에 빠져 지낸 나. 쓰레기 같은 잡설을 풀어내어 글이랍시고 긁적였던 나. 시간이 부족하다 불평하면서도 텔레비전 드라마에 도취되었던 나.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내 일거수일투족이 까발리어 그분의 말씀에 빗대어진다. 그리하여 한없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책을 덮어두고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있었을 정도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나의 심금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그 분의 삶 자체가 글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는 점이다. 번듯한 말로 독자를 현혹하는 요새 인생론의 경박함이나, 재산 증식을 마치 인생의 본질인양 나불대는 최근 경제적 처세론의 오만함이 아니라 당신의 삶 속에서 경험으로 축적된 삶의 진리를 간결한 필치나 담박한 문구로 물 흐르듯 풀어내고 있다. 선생님은 책을 읽을 때, 바탕을 먼저 세우고 책을 신중히 고르며, 보탬이 될 만한 것을 꼼꼼히 채록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분이다. 선생님은 글을 쓸 때, ‘깨달을 바를 유추하여 이를 축적하고, 축적된 것을 글로 지었던’ 분이다. 선생님은 먹고 입는데, 호사를 부리지 않고 검소했으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가고자 노력했던 분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내 심장의 정곡을 찌르며 절대 허투루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 선생님의 말씀에는 자식을 어루만지고 북돋우는 절실하고도 따뜻한 부정(父情)이 담겨 있다. 늘 유배지를 전전하여 자식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이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속에 오롯이 표현되어 있다. 선생님은 애틋한 감정의 노출보다는 자식의 올바른 성장에 더 신경을 쏟고 있다.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삼가 경계하고, 몸가짐을 조심하며, 학문에 정진할 것을 주문한다. 짤막한 글귀에 수신의 중요성과 방법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숙한 몸가짐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효제를 학문의 바탕으로 삼을 것과 독서의 구체적인 계획 및 방법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열거한다. 또한 사대부의 가법과  재산 증식에 대해서도 실학자다운 뚜렷한 주관과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 속에서 독자는 아버지의 엄격함보다는 자식에 대한 열정과 사랑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자식에게 던지는 아버지의 말씀이기 보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삶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 자녀의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무조건적인 물질적 풍요와 과도한 애정의 표현으로 나약한 온실의 화초처럼 자식을 키우는 이 시대 부모들에게 다산 선생님의 올곧은 자식 사랑의 표현은 좋은 귀감이 되리라 믿는다.

셋째는 선생님의 말씀에 시대를 뛰어넘는 날카로운 통찰과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고루한 성리학적 사회가 지닌 사농공상의 신분적 폐해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옛것에 안주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편벽함을 경계하고, 몇 대가 지나도 벼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사대부가 추위와 굶주림에 쪼들려 살아가는 비루함을 증오한다. 특히 지금껏 중국(中國)을 사대하여 중국에 노니는 것을 자랑삼아 뽐내는 비뚤어진 사대부의 세계관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자못 통쾌하다. ‘왜 중국이 세상의 가운데 인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른바 동국이란 것도 왜 동쪽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중략) 대저 이미 동서남북의 가운데를 얻었거든 어디를 가든 중국이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동국으로 본단 말인가?’ 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답답한 시대의 두터운 편견을 단박에 부수는 통쾌한 주장이 아닌가?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책은 한번 읽고 책꽂이 한 귀퉁이에 꽂아둘 책이 아니다. 늘 손에 쥐고 놓지 않아야 할 책이다. 한 구절 읽어보고, 곱씹고 곱씹어 의미를 파악하고, 내 삶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할 책이다. 굳이 통째로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필요에 따라 한 구절 한 구절 찾아 되새김하는 맛이 오히려 상큼하고도 짜릿한 묘미를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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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달리는 아이
제리 스피넬리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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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이 편견과 증오의 대상은 아니다. 편견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허상을 내면의 실상으로 우상화시킬 때, 편견은 인간의 심층에 적을 노려보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혀를 날름거린다. 그것이 인간 의식을 점차 좀 먹어 순수한 감정을 희석시킬 때, 그 희석된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증오의 감정이 자리 잡는다.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는 그 증오는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들고 상대를 비방하게 한다. 그런 편견과 오해가 자리 잡힌 사회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영혼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스스로 자의식을 형성하기 이전에 이미 고정된 사회적 편견을 수용해 버린다. 외적 상황에서 강요된 허위의식이 진실과 동떨어져 있더라도 그들의 판단력은 이미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위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책의 배경이 바로 그런 사회이다. 피부색에 따른 오해와 편견이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적대시하는 사회, 투밀즈의 웨스트엔드와 이스트엔드이다. 전자는 백인의 거주지이고, 후자는 흑인의 거주지이다. 묵시적으로 인정된 그들의 규율은 서로의 거주지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규율은 피부색에 따른 편견을 인정하는 그들만의 규율일 따름이다. 만약 애초 이곳의 거주자가 아니면서 기존의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이런 규율이 유효할까? 아마도 그런 자유인은 이 편 가르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가 흑백 거주지의 사각지대에서 양쪽을 소통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매니악 매기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으며 상호 소통의 매개자로 등장한다. 어린 나이에 사고로 양부모를 잃은 그는 투밀즈에 뜨내기로 들어와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 피부색으로 보면 웨스트엔드에 속하는 부류이지만 기성세대의 사고관념에서 자유로운 그는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다. 아마도 어느 편에도 속할 수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애초 그에겐 내 편 네 편이란 것이 무엇인지 뚜렷한 관념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기존의 왜곡된 관념을 전수받기 전에 부모를 잃었고, 고정된 틀을 강요하는 학교로부터도 멀어졌으며, 웨스트엔드의 어느 일정한 거처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살지도 않는다. 하늘을 지붕 삼아 땅을 침대 삼아 살아가는 자연인이다. 동물원의 짐승들이 그의 유일한 삶의 동반자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임을 상징하는 표본이다.

 그런 그에게 흑백의 피부색을 나누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그에게 백인은 흰색이 아니요, 흑인은 검은색이 아니다. 백인도 나름대로 다른 색깔을 다양하게 지니고 있고, 흑인 또한 여러 빛깔의 얼굴색을 드러낸다. 이런 흑백논리에 빠지지 않은 사고의 유연성은 행동의 자유와 여유를 낳는다. 그는 바람을 가르며 웨스트엔드의 거리를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길거리를 몇 시간 동안 정처 없이 뛰기도 하고, 아이들 틈에 끼어들어 운동을 즐기기도 하고, 심지어 아이들이 가장 거리는 장소라도 서슴없이 들어가곤 한다.

 그런 주인공은 스스로 ‘코브라’라 부르는 백인 아이들에게 쫓기어 이스트엔드로 들어간다. 오히려 그들의 편 가르기는 자유인 매니악에게 이스트엔드라는 울타리를 쳐준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는 경우에 따라 다시 웨스트엔드를 피난처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거꾸로 어느 쪽도 자신의 준거집단이 될 수 없는 주인공의 불우한 처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적대적 감정이 편 가르는 사회에서 자유인은 늘 양편 모두에게 소외되고 배척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반면 이런 주인공의 경험은 사회적 편견의 왜곡된 단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반목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인공은 인종적 편견의 깊은 골을 인식하게 되고  그 편견이 소통 부족에 따른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가 본 양쪽의 삶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스트엔드든 웨스트엔드든 인간 삶의 본질적 모습은 똑같음을 경험하면서 그는 흑백의 인종적 편견이 그들 스스로가 지어낸 허상임을 깊이 체득한다. 그렇다면 그가 본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적인 유대감의 형성이다. 근거도 없는 타인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에게 가족은 끈끈한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스스로 경계 지었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스트엔드의 아만다 가족이  매니악 매기를 따뜻하게 맞이한 것처럼, 웨스트엔드의 존 맥냅의 방황하는 두 어린 동생 러셀과 파이퍼가 흑인 가족 초코바 존슨과 그의 어머니 품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매니악 매기가 꿈꾸어온 세상이 바로 이런 따뜻한 가정이다. 상처받아 힘들게 살아가는 영혼들이 서로 교감하여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 흑백의 차이를 뛰어넘어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나눈 사회.  

 이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허울을 벗어던지라고 요구한다. 그 허울은 비단 흑백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 쌓여 있는 타인에 대한 두터운 장벽이 모두 허울이다. 특정인에 대한 편견, 타집단에 대한 배타적 감정, 타민족에 대한 우월의식 등이 모두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좀 먹고, 나와 남을 분리시키는 장애물이다. 이것이 편견을 낳고, 갈등을 일으키고, 불신을 조장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소중한 가족적 유대감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삶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늘 살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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