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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란 1 ㅣ 기란 3
비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후회하지 않을 선택, 역사로맨스를 즐겨 읽는 나로서는 간만에 제대로 된 역사로맨스를 만난 것 같다.
연록흔, 무휘의 비, 궁에는 개꽃이 산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등 흡족하게 읽었던 역사로맨스들...<기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이었다.
<기란>의 저자인 비연님의 <메두사>를 읽고 섬세하면서도 거친 야누스적인 필력에 감동해 다음 작품을 고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근 4년만에 만나는 비연님의 작품인 <기란>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전작과 달리 역사물에 도전한 비연님, 처음 도전하는 역사물임에도 불구하고, 플롯이나 스토리 자체가 아주 훌륭했다.
한 여자의 남자로 있을 수 없는 진(眞)의 황제 윤은 황국의 실세로 정국을 주도하는 효열태후와 자불태후 사이에서 흔들리는 황권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고군분투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제라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윤은 결코평범한 남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그렇기에 내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했던,내가 어엿비 여긴 황제이다. 그런 그에게 한떨기 꽃보다 아름답고 청초하지만, 결코 쉬이 지지 않을 기란이 나타난다. 진(眞)의 복속국인 서촉과의 정략혼으로 윤의 후궁이 된 기란은 여느 황궁의 여인들과는 달리 권모술수에 능하지도 않고 겉으로는 연약한 척하나 속으로 음흉한 속셈을 지니고 있는 표리부동한 사람도 아니고 계산적이지도 않다.
아름다운 빛을 띠는 얼굴만큼이나 그 성품 또한 아름답다. 가식없고 진취적이다. 당당하고 강하지만 약자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여린 심성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런 매력적인 기란에게 윤은 사랑을 느낀다.
한 여자의 남자로는 있을 수도 없고, 한 여자에게만 사랑을 맹세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윤은 기란을 사랑하고만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자신은 기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거기다 자신에게는 병권을 장악하기에 꼭 필요한 어린 정혼녀가 있다.자신이 원하지 않던 결혼이기에 윤이 반가울리 없던 기란 또한 잘생기고 기개넘치며 나라를 위해 열정적인 황제 윤을 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결코 기란, 자신만의 남자가 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열렬히 사랑을 하고자 한다. 서로를 한없이 은애하고 뜨겁게 보듬어주며 그렇게 사랑을 한다.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시기한 것일까? 두 사람의 사랑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한 여자만을 마음에 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황실의 음모속에서 기란은 죽을 고비에 처한다. 죽음을 피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시기하고 견제하는 황실에 의해 냉궁에 유페되기에 이른다.
기란은 그 차디찬 냉궁 속에서 세상과 차단돼 살며 가슴 져미는 그리움과 아픔을 홀로 감내해내야만 했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눈물이 안으로 흘러들어 가슴에 모이고 또 모여서 그랬을까, 그 눈물이 심장 안에서 차가운 강물을 이룬 것일까, 기란은 3년만에 돌아온 황궁에서 사랑따위가 다 뭐냐며, 예전의 자신은 잊어노라 말한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윤을 차갑게 대한다. 윤과 자신의 사랑을 부정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부정하려해봤자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이었고, 잊혀질 수도 끊어질 수도 없는 숙명이었다. 기란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결코 윤의 옆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없다 할 지라도 주어진 삶 속에서 후회없는 사랑을 하고자 한다. 치열하고 처절한 황궁의 암투속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을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시련을 이겨내고 함께 한다.
애절한 사랑과 긴박한 궁중암투 속에서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손에 땀을 쥐기도 하며 책장을 한장 한장 소중히 넘기고 가슴에 담으며 읽어나갔다. 기란과 윤이 되어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기도 했고, 때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두 사람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랬다. 그래서 행복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끝나지 않을 엔딩이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욕심 없이 오로지 윤과의 사랑과 행복만을 바란 기란의 모습을 통해 윤과의 사랑이 더 진실하게 다가왔고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윤의 옆자리에서 기란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해나가리라 바람을 가지며 세 권에 걸친 두 사람과의 여행을 끝마쳤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느끼며...
역사로맨스만큼 작가의 기량을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열정 혹은 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쓸 수 없는 장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철저한 조사가 없거나 기승전결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면 여느 로맨스소설보다 허점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장르다.
결코 쉽게 쓸 수도 가벼이 여겨서도 안되는 역사로맨스는 배경으로 하는 역사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던, 작가가 재창조한 가상의 역사이던 간에 조그만 소재부터 시작해, 고어, 어투, 관직명, 황실의 생활 등 그 어느 것 하나 흐지부지하게 표현해서는 안된다. 하나라도 어색하거나 부족할 경우 스토리 전체의 완성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어떠한 글이든 간에 작가가 쉽게 쓰지 않으며 나름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이겠지만 나는 이러한 이유로 역사로맨스를 시도한, 그리고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안긴 작가들을 존경한다. 물론, 여러 역사로맨스를 읽어본 나로서는 실망스러웠던 역사로맨스도 있었지만 한편의 영화를 읽은 것처럼 남는 것이 많았던 역사로맨스 또한 꽤 많았다. 아직도 가슴에 그 여운이 남아있는 것처럼...
<기란> 또한 그런 작품 중에 하나다.
역사와 로맨스의 결합이라고는 하나, 원체 로맨스소설이라는 장르를 표방하다보니 로맨스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기란>은 역사와 로맨스를 적절하게 비중을 둬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표현함으로써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었던 소설이었다.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라는 게 무엇인지, 황제의 고뇌가 어떠한지, 황실내의 권력암투가 얼마나 처절한지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참 남는 것이 많았던,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도 했지만, 결국 책을 덮으면서 행복을 느끼게 했던 그런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