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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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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추상은 구체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행복은 추상에 속한다. 다시말해 행복은 ... 구체적인 희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슬람 정육점>의 인물들은 지극히 보편적이면서 지극히 낯설다. 

나의 주변에서 보임직한 그러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음이다. 

우연히 그들과 마주쳤다면, 어쩌면 나또한 ㅡ 그들을 선에서 비껴난 이방인들로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따듯해지기도, 슬퍼지기도, 무엇보다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도외시하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만큼이나의 거리로서 대했던 누군가들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동정'이나 '연민'따위의 협소한 감정으로서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사람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이들 - 가난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그처럼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 저 불결하고 끔찍한 인간과 내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그 정처모를 '이질감' 혹은 '거리감'의 근원은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또한 나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며, 어쩌면 그들의 생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내는 우리네 삶의 단편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슬람 정육점>은 - 인간에 대한, 고통-슬픔-위로-'함께 있음'-다시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지극히 아름답고, 그럼에 눈물겨운 단상이었다. 

그동안 미워하고, 배타적으로 대했던 이들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이었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 네번 찾아오는 야경꾼이었고 

그때 그 수영의 고민은 사실 내 모습에 다름아니었음을.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에 오히려 잠잠하고, 오히려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이들에게 조그만 분노를 쏟아내는 데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로 표현한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유정은 그래서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언어'를 부정하면서도 언제나 모든 걸 언어로 환언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를 듣기위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천지가 창조되던 순간의 굉음이란 서도 사실은 보잘것없는 가냘픈 목소리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은 소리의 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영혼과 유사한 리듬을 지녔느냐에 따라 음악으로 인식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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