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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살아가면서 느끼는건데,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듯 하다. 물론 돈이라는 것이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면 그것에 목 매달 일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수단은 바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만 화폐일 때의 '돈'이다. 돈을 쫓는 것을 허상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돈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쫓는 것을 '나쁘다' 손가락질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상은 눈앞에 있으나 잡을 수 없는 존재를 허상이라 한다. 그렇다면, 눈앞에 잡을 수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을 과연 허상을 쫓는 것이라 손가락질 하면서 나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 내게 '시스터 캐리를 세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쁜년과 도시와 욕망을 꼽겠다. (그래서 서평의 제목도 그렇게 지었다) 그 첫 번째인 나쁜년 이야기부터 해 볼까. <시스터 캐리>는 이미 100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현재와는 많이 다른 가치관 속에서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읽어봐도 소설의 주인공인 '캐리'는 나쁜년이란 소리를 들어도 싼, 기회주의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더 나쁜년이겠지만 말이다.) 자신에게 더 나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기회주의자인 캐리. 이는 현재 사회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에서는 (특히 막장드라마라 일컫는 드라마들에서는)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스토리 기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겐 꽤나 익숙한 패턴이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옮겨가며 버려버리는, 나쁜 년의 전형적인 이야기.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쁜년이라고 매도하기엔 그녀의 행동들 모두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동거했던 드루에와는 결혼만 전제로 하지 않았을 뿐 애인 사이였기에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쁠 것 없는 동거였고, (지금의 관점이라는 전제가 꼭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뉴욕으로 건너가 함께 했던 허스트우드는 그가 유부남인 걸 알고서는 나름 그 관계를 끊었었기 때문이다. (후에 허스트우드의 속임수로 함께 뉴욕에 건너가게 된 건 차치하고 말이다.) 나쁜년이 되는 건 배우로 성공하고 나서 허스트우드를 찾지 않은 것 정도랄까. 하지만 그와 결혼으로 묶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의적이 아닌 책임은 질 필요가 없으므로 이 또한 벗어날 수 있는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캐리는 의도하지 않은 나쁜년이었던 것이다. 지나고 나니 나쁜년이 되어 있는 조금은 슬픈 인생.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현재 성공해서 자신의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두번째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도시'이다. 우리나라의 경공업 붐이 일었을 당시가 그랬듯,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여자들의 가장 손쉬운 취업루트인 공장에 캐리 또한 취업해서 일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과는 다른 삶이란 것에 치를 떨며 좀 더 손쉽게 자신의 꿈을 이뤄줄 이를 찾는다. 이를테면 요즘말로 취집이라는 것으로. (취집이라기보다는 동거이지만 어찌됐든) 그 과정에서 막연한 동경만을 가지고 상경한 이들이 겪는 아픔들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환상과 현실과의 경계를 처절하게 무너뜨리면서도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이것이 1900년대의 미국의 참모습이다' 알려주고 있다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근무환경은 열악했고, 그에 비한 주급은 형편 없었고, 그럼에도 각자가 가진 꿈을 잊지 못해 현실에 얽매이고, 그렇게 스러지는 젊은이들을 말이다. 도시는 화려함으로 중무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모습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시스터 캐리>의 주목해야할 '도시'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격으로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하니, 책에서 보여지는 뒷골목은 1900년대의 모습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욕망. 책 속에선 대표적으로 캐리의 욕망만을 집중 조명하지만, 그녀의 주변인들 또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능력이 없으면 자신이 꿀 수 있는 만큼의 꿈만 꿔야 하는데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캐리는 늘 큰 꿈을 꾸는 게 문제였다. 그 꿈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캐리를 짓눌렀고, 그녀는 철저히 그 욕망만을 쫓았다. 그런데 그 욕망을 좇은 결과가 나름 썩 괜찮았다. 그것이 반전이라면 반전. 권선징악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결말이 당시에는 찬반 논란이 극명히 일어났다고 하는데, 현실의 눈으로 보자면, '나쁜년이 더 잘되는 법이다'. 아주 슬프게도 이 말은 진리가 되어 가고 있는 듯 하고 말이다. 착하게 누군가에게 양보하고 뒤로 밀쳐지는 것에 소리지르지 않으면 누구든 '얘는 호구구나' 생각하고 짓밟기 일쑤인 세상에서는 나쁜년이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캐리는 원치 않게 나쁜년 소리를 들었고, 운빨에 의한 거지만 어찌됐든 욕망의 성취도 이뤄냈다. 더이상 주급에 어쩌지 못하는 위치가 아닌 게 되었고, 캐리는 결국 자신이 꿈꿨던 도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 한다. 그녀에게 손톱만큼의 도의적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그녀가 지금껏 함께 해왔던 이들에게 그다지 애정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을만큼 자신의 위치에서 또다른 욕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욕망이 나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욕망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까. 그 속에서 자신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는 그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의 몫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손가락질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에 반해 떳떳하다면 손가락질 받는다 해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캐리는 모든 선택에 있어 수동적이었을지언정, 직접적인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후자 쪽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렸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떳떳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욕망을 이야기함에 있어 후회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하고 회상할때 나오는 후회. 그 후회 대신 <시스터 캐리>는 캐리의 또다른 몽상으로 마무리를 맺는다. 혼자가 된 그녀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고는 하나, 앞으로 그녀에게 펼쳐질 날들이 꽤나 분홍빛이기에 외려 그녀의 인생에 나쁠 것은 없어보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마 그녀는 후회라는 것조차 하지 않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듯 하다. 평평한 시대에 툭 던져진 예쁜 자갈돌같은 그녀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를 나쁜년이라 욕하는 사회만이 남을테지. 여전히 도시는 화려하다. 캐리처럼 큰 꿈을 가지고 상경하는 이들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럼에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건, 100년 전의 시대 상황으로 읽는 것보다 현재의 시대상황으로 읽는 것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시스터 캐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