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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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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는 다른 두툼한 택배 박스에 물음표를 둥둥 띄우면서 개봉하니, 무려 800쪽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두께의 거대한 책 한 권과 또 다른 책 한 권이 나왔다. 그 거대한 책이 바로 <조지프 앤턴>. 그리고 다른 책 한 권은 <그래도 괜찮은 하루>, 신간평가단 지정도서였던 것이다. 일단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 작가? 잘 모르는 작가다. 근데 책의 두께가 역대급이다. 3년째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해 오면서 이렇게 두꺼운 책은 처음이었다. (물론 '크기'가 컸던 책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고 화보를 보는 듯한 에세이가 있었다.)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두꺼운 책이 주는 중압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래도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 자리에서 책을 펴 봤다. 그리고 나서야 알았다. 이 작가가 누구인지 왜 살만 루슈디의 자전 에세이인데 제목이 <조지프 앤턴>인지. 프롤로그는 마치 잘 짜여진 소설 같았다. 왜 안 그렇겠나. 자신이 쓴 소설 <악마의 시>가 종교모독으로 읽혀지고, 자신은 살해 위협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며, 그 와중에 자신은 은둔생활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긴박감있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내용이기 때문에 당시에 무엇을 했고 어떤 상황이었으며 누가 이런 말을 했다,라는 것을 적었다. 그래서인지 더 현실감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20페이지 남짓한 이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 작가 살만 루슈디. 그를 잘 모르지만 그의 대단함은 책 속 곳곳에서 느껴졌다. 특히 자신의 상황을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의 까마귀가 등장하는 장면과 비교하는 부분은 이 프롤로그의 제목 '최초의 까마귀'와 잘 맞아 떨어졌으며, 내게는 꽤 임팩트가 있게 다가왔다.

 

첫번째 까마귀가 정글짐에 내려앉을 떄는 유일하고 색다르고 특별해 보인다. 그 모습을 일반화하여 거창한 이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사후에, 즉 재앙이 시작된 후, 사람들은 흔히 첫번째 까마귀를 어떤 전조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까마귀가 정글짐에 처음 내려앉을 때는 한낱 새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p.15)

 

현실감이 없어 보였던 건 아무래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전조였던 이 부분이 실상은 그저 여느날과 다름없는 하루였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 느낌을 영화와 비교해 정확하게 전달해냈다. 프롤로그에서 부풀어오른 기대감이 다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유년시절, 그리고 왜 <악마의 시>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에게 작품이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됐었던 1장. 여기서부터는 화자가 3인칭으로 등장, 루슈디를 '그'라고 지칭하기 시작하며 소설같은 구성을 띠기 시작한다.

새로움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등장하는가? (p.105)

살만 루슈디는 소설을 쓰기 전 이런 문장을 비행기 안에서 적었었고, 그가 쓴 소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소설이었다. 이 물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왜인지 와 닿는 문장이라서 적어봤다. 루슈디는 이민자였던 자신과 옆집의 할머니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여러 의문이 던져지길 원했다.

이민이라는 행위는 이민자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 자아상, 문화, 신념 등 모든 것을 위기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이민자들에 대한 소설이라면 마땅히 의문을 던져야 옳다. 이민자들의 위기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p.105)

그렇게 등장한 <악마의 시>는 센세이셔널했지만, 머지않아 파트와로 목숨을 잃을 위협에 놓인다. 그가 책상 앞에 적어두었던 "책을 쓰는 일은 파우스트의 계약과는 정반대다. 불멸을 얻으려면, 하다못해 유산이라도 남기려면, 일상생활은 아예 포기하거나 지리멸렬을 각오해야 한다."라는 좌우명대로, 그는 이 책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포기해야만 했다.

 

에세이에서 보건대 다른 나라에서 책을 출간하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하지만 "자유인은 책을 씁니다. 자유인은 책을 펴냅니다. 자유인은 책을 팝니다. 자유인은 책을 삽니다. 자유인은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국민정신에 입각하여 독자 여러분이 전국 방방곡곡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전면광고를 낼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했던 출판계는 확고했고, 비겁자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용자들도 어디서든 등장했다. 그리고 10년의 지리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표현의 자유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하고 어디까지가 모욕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인데, 루슈디의 책도 그런 것이다.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긴 했으나 그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 분명한 종교가 존재함에 '단순'한 것이 '복잡'해 진 것이다. 그럼에도 루슈디는, 쫓기는 신세임에도 예전에 사랑했었던 첫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아들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새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으며, 그와 반대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기기도 했다. 자신이 자신일 수 없음을 괴로워하다가도 자신을 지켜주며 보호해주는 특수부 사람들과 친구들의 위로로 자존감을 되찾기도 했으며, 이름을 조지프 앤턴으로 바꾸고 '조'라고 불렸다. 루슈디가 10년만에 드디어 자유를 얻었을때 나도 얼마나 기뻤던가. (드디어 책이 끝이라는 생각에-)

 

긴 분량은 그만큼 그때 겪었던 일들이 잊을 수 없을만큼의 기억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작가의 기질로 그때의 일을 더 잘 알리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20년 전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경험은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를 이렇게 쓰는 사람은 루슈디가 처음일 듯. 그리고 <악마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파트와가 선포되었더 건지 말이다. 뭐 그때와 지금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의 글솜씨를 보건대 보통은 넘을 듯 하니 말이다. 내게 많이 낯선 루슈디지만 왜인지 그의 인생을 알고나니 궁금증이 생긴달까.

 

책은 작가의 책상을 떠나면서 변모한다. 아무도 단 한 구절도 읽지 못했을 때부터, 글쓴이 말고는 그 누구의 시선도 스치기 전부터, 책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으니 더는 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책은 제멋대로 세상을 여행할 테고, 작가가 간섭할 방법은 없다. (중략) 책은 이미 세상으로 나아갔고 세상은 책을 바꿔놓는다. (p.129)

 

세상에 내놓은 책은 작가의 의지가 아닌 세상의 의지대로 바뀐다고 했다.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그러니 말이든 책이든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게 했던 책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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