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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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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다소 길어서 세 부분으로 나눴다. 먼저 허영덩어리 히틀러를 바라보며 느낀 점과, 히틀러의 주변 사람들을(히틀러에 찬동한, 반동한) 읽으며 우리 역사, 시대적인 부분과 비교를 하며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결론에 담아봤다.

 

 

 

1. 히틀러의 삶을 보며, 나의 허영을 반성하다.

 

사실 뻔한 주제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재미가 있는 책이다. 오래간만에 서평을 맛깔지게 쓸 책을 발견한 것 같다.

 

책은 한 허영심이 많고,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야심가가, 얼마나 무모하게 '철학'을 이용하는지를 다룬 책이고, 그 야심가의 허영의 철학에 동조한 철학자와, 반동한 철학자들의 행보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사실 철학이라는 분야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속성이 있다. 바로 형이상학적이고 궤변적이고 사변적, 관념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철학이다. 답도 없고,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는 난해한 학문, 그러나 이 난해한 학문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인식은 대체적으로 깊이 있는 학문이지만 '어렵다'라는 것이 대다수다.

 

특히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철학에 대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 철학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든다.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기도 싫고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을 배울 가치도 못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소수의, 집념 어린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철학을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단'으로 이용한다. 난해한 철학은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쉽지 않을 부분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적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들도 철학은 어렵다는 생각을 주로 하는 것이 대다수인데, 영리한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자들은, 이를 간파하고, 그 접근성이 용의하지 않은 어려운 철학의 단면으로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덮어버리는 것을 시도한다.

 

즉 어려운 철학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하는 행위가 나타난다. 이들은 철학자의 저서들을 깊이 숙독하지 않으면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철학자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은 철학자의 '명언'등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논고에 그대로 복사하기를 시도한다. 똑바로 그 사상을 이해하지 않으며, 그 격언을 이용하는 것은 명언을 내린 철학자를 죽이는 일이다.

 

철학에 겸손하고 정통한 자들은 본질적으로 그런 행위를 간파하지만, 대중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 지적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 정치가이거나 야심가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히틀러였다.

 

나치는 그렇게 사상적으로 완성됐다. 독일의 거장, 칸트를 비롯한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의 사상들은 모두 히틀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히틀러는 이들의 철학을 깊이 있게 숙독했다고 우기며, 그들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뒤틀린 사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무력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상 속, 철학 속에서도 거장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했던 허영덩어리였다.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진보와 발전을 가져줬지만, 때론 이렇게 오용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숱하게 볼 수 있다. 인문학을 좀 만져봤다면서 아는 척하는 허깨비들에게 철학은 이용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철학뿐만이 아니다. 내가 볼 땐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의 몇몇 부류는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독서로 덮으려고 한다. 독서로 발전을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독서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덮어버리는데, 더 열중을 하는 순간, 배움의 길을 멀어진다.

 

물론 허영이 발전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허영에 집착하다 보면, 배움의 본질보다 허영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자체에 집중을 하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과 철학은 배우는 자에게 지식과, 발전 가능성을 선사하지만, 알게 모르게 인간 내면에 보이지 않는 자만심과 오만의 시각을 키워준다. 이에 굴복해버린다면, 진정한 배움으로의 길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교양 있는 지식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독서와 철학은 깨달음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지식을 추구로 하는 독서와 철학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은, 중고등학교의 학습으로 끝내야 한다고 본다.

 

 <논어> 위정 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는 사람의 태도'라고,

 

모르는 것을 거짓된 지식으로 덮어 버리고, 똑바로 알지 못한 지식을 아집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것, 그 마음에는 알량한 소영웅주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지식의 나열, 인정을 구걸하는, 그렇게 자신을 칭찬하며 자신을 철학이나 여타 다른 권위로부터 포장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이 사회에는 꽤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노자> 20항의 격언이 생각난다.

 

'지식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나는 노자의 저 말에 대해 사실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지적 허영에 가득 찬 인간들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은 격언이다.

 

사실 나의 20대 초반은 이런 지적 허영심에 들떠 있었다. 다소 어린 나이에 동양 고전을 조부로부터 배웠다는 자만과, 서양 철학을 껄떡이면서,  이 서양 철학만 내 손에 넣으면, 완벽한 동서의 지식을 가진다는 망상.

 

그러나 나는 가졌다고 생각했던 동양 철학도 구멍 투성이였으며, 허영으로 시작한 서양 철학 역시도 똑바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동 서양의 고전을 겸손하게 다시 공부하듯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허영이 없다라고는 부정하진 못하겠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시 꿈틀거리는 나의 허영을

서랍 안으로 밀어 처넣으며 나오지 못하도록

반성을 했던 것 같다.

 

내 안에도 '히틀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정도는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히틀러'가 살아 숨 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라는 책.

그 책의 이름을 빌려오자면,

 

내 마음속의 허영덩어리(히틀러)와 나의 자아는 싸울 것이며

이 싸움은 나의 내면에서 평생 갈 것이다. 나는 오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이고,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나만의 히틀러와 싸울 것이다.

그것은 '나의 투쟁'이다. 내 마음의 히틀러를 겸손의 자아로 눌러버릴 것이다. 히틀러가 자행했던 철학의 자의적 인용. 나 역시 그의 저서의 이름을 따서, 내 멋대로 이렇게 붙여봤다.  

 

 

 지식은 양날의 검이다. 올바르게 사용될 경우, 대체적으로 인간에 성장을 가져다주지만,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인간을 몰락으로 몰고 간다.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은 인간이 개인에 국한된다면 그 개인만이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만약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해 버린다면, 공동체의 비극으로 귀결된다. 지식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도 마찬가지고, 독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본보기가 바로 '히틀러'였다.

 

아무튼, 가장 아름다운 철학의 배움과, 가장 아름다운 독서는,

'깨달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적인 탑 쌓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히틀러의 허영으로 덮이고, 뒤틀린 삶은, 나에게 그런 반성을 불러일으켰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히틀러에게 배울 점은 있다. 바로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승화시킨 그 추진력 그것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다만 그 행동력의 바탕에는 뒤틀린 철학이 있었으며, 그로 인한 결과는 인류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드도 쳐주고 싶지 않다.

 

 

 

2. 히틀러의 주변 철학자들(찬동한, 반동한)을 우리 역사와 대비하여 읽다.

 

이들 내용을 보며, 생각한 것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다. 특히 조선 중기와, 일제 치하 시대가 생각났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의 이념화된 성리학이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을 존중하고 중국을 따르는 데에, 대해서 누구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철학, 성리학이라는 체제에 대해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벗어나지 못했고, 그 가치관 내에서 철학을 발전시켰다.

 

조선에게는 성리학에 물음을 던질 만한 조선만의 '발터 벤야민'도 없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도 없었고, '한나 아렌트', '쿠르트 후버'도 없었다. 사회에 통용되는 철학, 체제가 용인한 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을 해 봄 직한데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까지도,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실학이라는 철학이 발전하면서 주체성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자학'의 권위는 대단했었다.

 

일본과 비교하기는 나도 싫은데,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스승으로 불리는 사토 잇사이 어록 <언지사록>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언지사록><언지록>의 131절이다.

 

하늘은 차별하지 않는다. -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국인 중화의 나라가 있고 또 야만스러운 나라가 있다. 하늘은 정말로 어떤 곳에는 후하고 어떤 사람에는 박할까?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며 차별을 할까? 그렇지 않다. 단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을 말한 중국의 옛 성인이 다른 곳보다 특별히 더 빨리 또한 특별히 자세하게 그것을 밝혔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도는 중국의 문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유학자인 사토 잇사이 역시도, 유학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맹목적인 중화 추존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유연스럽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진을 일궈냈던 것 같고, 우리보다 더 빨리 발전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시대, 그리고 권력이 용인한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발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히틀러와 철학자들> 책은 히틀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송강 정철이 참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둘 다 세계적으로, 그리고 조선 내에서 시대의 최고 철학자로 존중받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시대가 규정한 철학, 권력이 규정한 철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두 사람은 분명 뛰어난 자질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로부터의 굴복이 그 명석함에 오점을 남겼다.

 

동시대에는 칭찬과 추존을 받을지 몰라도, 결국은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시대를 거슬러, 일제 치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생존과 진리 중, 생존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일제 치하에도 변절자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의 교조화된 성리학 추존 사상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일제 치하의 시대에서서는 기존의 시대가 규정한 굴욕의 철학으로부터 거부한 '독립 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발터 벤야민'이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였으며, '한나 아렌트'였고, '쿠르트 후버'였다.

 

독립을 위해 일으킨 의병 그 한 명 한 명의 병사들의 마음, 조국을 되찾기 위해 거병한 그들만의 철학, 그들은 비록 히틀러에 반항한 소위 세계적인 네임드 철학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마 더 뜨겁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독립을 위한 의지, 그들의 뜨거운 피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현세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그리고 내가 살아갈 내일들의 무게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3. 결론

 

책은 참 매력적이다. 매력적인 구성, 히틀러를 비롯해, 히틀러에 동조한 자들과, 히틀러에 반대한 자들을 나눠서 잘 대비하여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제지간이었고,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대비되는 것이 루쉰과, 쉬광핑 부부가 생각났다. 하이데거는 결국 권력의 힘에 굴복하여 한나 아렌트와 거리감을 뒀지만, 루쉰과 쉬광핑은 사제지간으로 만났지만, 종국에는 함께 했다. 사상적으로도, 그리고 결혼생활도, 그래서인가? 루쉰의 위대함이 더 부각되는 느낌도 받았다.

 

철학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역사서에 가깝다. 대립되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 묘사가 소설처럼 잘 묘사된 책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모르는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결론은 사실 뻔한 책이지만,

 

히틀러의 모습에서, 나의 내면의 오만, 히틀러의 모습을 반성했고, 히틀러에 복종한 철학자와, 히틀러에 대항한 철학자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역사와 연계하여 봤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현재 마르틴 하이데거를 비롯한, 슈미트와 프레게가 미국과 유럽 교육과정에 중심에 있다고 한다. 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학생들은 무비판적으로 배워나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독일의 지적 유산에서 어두운 요소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에필로그에서 나치 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읽어야 한다고, 다만 저자들이 어떤 만행을 했는지,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가르치고 읽어야 한다고,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읽기보단,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인류 지성에 이룩한 철학적 업적은 인정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릇된 관점 등은 비판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나치 사상에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다 걸러낼 것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역사적 거울로 이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악용될 수 있을 여지는 많고 제2의 나치의 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히틀러가 자행했듯, 철학이라는 칼과 지식이라는 칼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에게 저주를 가져올 수 있다. 

 

과거 독일 선현들의 철학들을 히틀러가 '독이 든 성배'로 조합하여 사용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 태어난 철학들도, 바른 가치관의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옳은 가치로 사용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물론 바른 가치관을 전제로 했을 때 이야기고, 우리는 여기서 그 바른 가치관을 어떻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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