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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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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평가단이 되고 처음으로 쓰는 리뷰다. 사실 나는 블로그에 책에 대한 서평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서평을 쓴 인문서들이 꽤 있다. 그런데 블로그는 나만의 공간이라서 글을 쓰는 데, 제약이 없고 내 맘대로 리뷰의 콘셉트를 잡아서 썼었다. 그런데 이 리뷰는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했었다. 아무래도 신간평가단으로 작성하는 리뷰라, 대중의 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에, 리뷰의 콘셉트를 어떻게 잡아서 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었다. 또 한 가지는, 여기 분야의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지원하는 다른 평가단 분들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서평을 쓰면 안되겠다는 무언의 강박이 있었기 마련이다. 책을 읽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엔 그냥 내가 써 왔던 대로 마음대로 내가 느낀 대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블로그의 서평 모토가, 부족하면 부족함을 드러내고 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생각과 같이, 최대한 내가 읽은 느낀 점을 위주로 글을 전개하기로 생각했었다. 

 

 사실 알라딘에서 신간 2권을 보내 준다고 했을 때, 기대감이 있었다. 뭘 보내줄까라는 그런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책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 반, 아쉬움 반의 감정이 교차됐다. 우선 아쉬움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생각 외로(?) 책이 적은 분량이었다. 아무래도 받는 김에, 값이 나가고 두툼한, 좋은 책이지만 압박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책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어차피 이 책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적은 양에 비해서, 가격은 높아서 선뜻 또 사기에는 미묘한 그런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애독하지만, 이런 부분에서조차 속물적인 근성이 발동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자조적으로 한심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쨌든 한병철은 친숙했다. 이유는, 한병철의 전작인 <피로사회>도 봤었기 때문이다. 해제에서 나오듯, 한병철은 현대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치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고 재해석을 하며, 오히려 긍정성의 가치에 대해서 검토하고 살펴보는 철학자였다. 전작인 <피로사회> 역시도 그런 책이었다. 근대 산업혁명 이래로, 과도한 긍정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 등을 신랄하게 파헤치며, 인간이 이룩한 성과사회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그는 여러 선현들의 철학자들의 논의를 비판하며, 그의 주장을 드러낸다. 

 

 이 책 역시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투명성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하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두 대립된 측과 개념은 갈등을 유발하고 있었다. 기존의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관념적으로 긍정된 가치관과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의 가치관은 시종 일관 책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책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는 갈등이었다. 그 싸움에서 한병철은 기존의 긍정된 투명성을 그만의 불투명성의 철학으로 전면적으로 재고한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챕터인 <투명사회>는 거국적인 사회의 투명성에 대해서 검토하고 전반적인 사회의 투명성을 재고하며, 여러 부분을 고찰해나간다. 논의 전개에서 여러 철학자들의 글과, 그것을 검토하고 반박하는 한병철의 현학적인 수사가 돋보였던 단락이었다. 물론 그만큼 이해하는데 더 집중을 요했었다. 느낌 상이었지만, 전작인 <피로사회>에 비해서 어렵게 다가왔던 것 같았다. 위의 챕터가 전반적 사회의 고찰이었다면, 두 번째 챕터는, 투명사회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한 대상에 집중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는데, 그 대상은 디지털 사회에 대한 부분이다. 이 두 번째 챕터는 생각보다 쉽게 논의가 전개됐다. 물론, 이 단락에서도 하이데거를 비롯한 롤랑 바르트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가 있지만, 위 챕터보단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페이스북을 들어가 봤다. 하루 만에 선장의 얼굴이 공개되고 신상이 공개된 글에 좋아요가 엄청나게 달렸고, 내 지인들은 그것을 퍼 나르고 있었다. 물론, 그 선장은 도의적으로 잘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그것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정보의 공개 투명성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모든 부분을 감시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모든 부분에서 투명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쪽에서 주장하는 것도 정보였고 저쪽에서 주장하는 것도 정보였다. 정보가 넘쳐나고 있었고, 그 정보와 정보끼리의 난잡한 '난교' 현상에서 나는 책에서 말하는 정보피로증후군(IFS)를 느꼈다. 과연 이게 어떤 정보가 옳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추이를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하루가 지나면 몇 백가지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나의 사유는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었었다. 그것은 정보들의 난교적 해석으로도, 그리고 책에서도 상징하고 있던 투명성이 극대화된 '포르노 사회'였다.

 

 판단과 사색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책에서 말했다. 그리고 정보는 즉각적이고 빠르게 전달된다. 우리는 투명성을 외치며, 즉각적이고 즉답적인 해답을 갈구한다. 그래서 판단과 사색의 기다림의 미학은 사회적인 가치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에는 투명을 추구하는 우리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판단과 성찰 그런 지식적인 부분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사색이라는 가치도 그렇다. 그러나 정보는 그러한 기다림의 가치를 깔아뭉개고 있었고,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공간은 그런 정보를 우리에게 홍수처럼 쏟아붓고 있다.

 

 그러한 무차별적인 정보 속에서 몇몇의 인간은 익명성을 빙자한 악플을 달고 있었다. 책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격분하며, 어떤 대화도 논의도 불가능한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그 악플러의 격분에서 디지털이 야기한 병폐 중 하나인 전형적인 히키코모리적 나르시시즘 보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내뿜는 악플은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승냥이 때와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주권자는,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는? 그러한 악플과 인터넷으로부터 자유로웠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였다.

 

'포르노 사회' 저자는 투명사회를 그렇게 지칭했다. 정말로 적절했다.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흔히 야동을 볼 때 가장 설레고 감정의 최고조가 됐을 때가 어느 시점일까?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주인공이 옷을 벗을까 말까 하는 그 전희가 가장 설렘이 있었다. 벗기 전에는 나만의 상상이 가능하다. 나만의 해석도 가능하고, 기대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벗는 순간 그런 기대는 없어진다. 그리고 점점 벗은 모습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포르노의 속성이 그렇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전희라는 단계도 없다. 여자의 몸은 너무나도 투명하다. 에로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에로스에는 사랑이 있으며, 육감적인 사랑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포르노는 그냥 투명한 것이다. 투명 사회가 그렇다. 너도나도 다 급하게 알려고 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무시된다. 그래서 빠른 정보를 우선시하고 난잡한 정보들끼리 난교가 시작된다. 깊은 사색과, 깊이 있는 생각은 멀어진다.

 

 포르노는 상품적이다. 투명 사회 역시도 그렇다. 보기 좋게 잘 전시된 정보나 매개체는 자본주의를 만나 저열한 상품으로 추구된다. 보기 좋은 것에서 우리는 획일화를 느끼고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좋아요가 많은 포스팅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온 국민이 원하는, 날씬하고 예쁜 몸매, 그것 역시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뚱뚱함의 미학, 그리스 시대의 조각품에 나오던 그런 미의 관념은 이제 사라졌다. 투명을 빙자로 포르노 사회는 모든 상품을 전시시키고 있었다.

 

 참사의 실존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너무나도 투명적인 이런 사태들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던 4월이었다.

 

 내가 페이스북을 관둔 것도, 익명성 커뮤니티 사이트를 내가 관둔 것도, 이 책에는 잘 설명돼져 있다. SNS의 모든 가치는 수량화 개량화로 귀결된다. 친밀감은 친구의 숫자로 판별되고, 자신의 가치는 좋아요의 숫자로 결정 난다. 리플은 자신의 인기로 귀결 난다. 그 속에 진지함이나 진득함보다는 무조건적인 가시적, 몰가치적인 부분만 있었다.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도, 그리고 디지털 파놉티콘의 논의에 이어지는 전 국민의 프로토콜의 흔적의 삶도, 하이데거를 인용하여, 진득한 농부의 삶이 아닌,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사냥꾼의 모습이 된다는 책의 논의도 모두 공감했다.

    

 결국 내가 블로그를 하는 것 역시도, 내 나름의 소신 있게, 글을 쓰고, 표현하는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가끔은 댓글도 많은 이웃들의 블로그나 공감이 많은 블로그를 보면, 뭔가 돌아보게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런 부분도(좋아요의 관심, 댓글의 관심) 디지털 사회가 야기하는 중증이었다. 이 책을 보며 나 역시도 블로그에 대해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운영해야 하나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르게 사용할 수 있나에 대해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그 모든 원론적인 부분엔, 과도한 긍정, 투명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투명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하여 나타나는 것이 디지털 문화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해답은?이라고 저자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만 진단하고 있을 뿐 해답은 주지 않았다.

 

 어쨌든, 해답의 부분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없이, 스마트폰 없이 살아간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 번쯤은 고찰을 해 봐야 한다. 그저 도덕 교과서 뒷부분에 나온 것 마냥, 정보화 사회의 문제점이라고 짤막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진지하게 우리의 인터넷 문화를 비롯한, 사회의 전반적인 투명성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하겠다. 정치적인 부분, 경제적인 체제에 대한 부분, 사회적 현상 모든 부분에까지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특히나 우리나라같이 디지털 강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이 문제는 더욱더 절실하다고 느껴졌다.

 

 어떤 사물이라도 흑과 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부분에 무비판적으로 백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번 사태나 이런 부분에서 흑의 관점도 고찰을 해 볼 필요는 있다. 이 책은 그러한 화두를 던져준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그래도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투명화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말 대로, 정치의 속성은 비밀적이고, 공개적이지 않다는 부분도 동의한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있는 동물이다. 나의 비밀은 공개하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비밀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모순이라 생각하겠지만,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투명성에 부정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찬성하지만, 정치적인 요소에서의 불투명성을 옹호는... 솔직히 선뜻,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겠다. 어쨌든 권력은 감시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자 많은 대가를 치러왔었다. 정치와 정책이 투명하여 보이는 정치, 즉흥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단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공인이고, 국가권력이 집중된 자들이어서 감시를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것은 생각을 해 봐야 한다고 느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철학서들이 그렇듯, 조금은 궤변적인 부분이 있긴 하다. 그리고 내용 자체가 조금 어렵게 전개되는 부분도 있다.

 

 어쨌든 책의 논의가 재미있게 전개된다. 대립되는 두 축의 갈등의 야기, 긍정성과 부정성의 속성의 격돌, 그 사이에서 한병철은 부정의 가치를 현란한 수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은 적절한 시기에 배송됐다. 4월, 너무나도 아팠던 사건이 있었을 무렵 비를 뚫고 배송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서두의 아쉬움적인 부분과, 위의 속물적인 생각을 한 번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이 좋았었고, 다소 가성비적인 부분에서 고뇌를 하게 만드는 작고 적은 책이지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을 논설하고 있었던 책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피로사회> 보다는 <투명 사회>가 더 현실적으로 와 닿았었던 것 같았다. 그만큼 책의 내용은 좋았다. 작고 적은 크기의 책이지만, 내용은 그 이상이다.

 

 

 

4월 이 책을 보던 시기, 참사에 마음도 아팠고, 그리고,

투명하고, 너무나도 투명하여서,

더 혼란스러웠던 한 달이었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여러모로, 깊은 성찰을

제시해 준 책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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